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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꼭 살아 돌아간다 - 전설적인 클라이머, 조 심슨의 생존 실화
조 심슨 지음, 정광식 옮김 / 예지(Wisdom)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살다보면 영화나 픽션같은 상상속의 세계보다 더 비현실적인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9.11테러라든지 동남아의 쓰나미 해일같은 경우도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다. 영화나 소설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인 것이다.
이 책의 내용도 이처럼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할 정도의 극한적인 인간생존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잔인한 책이다. 주인공이 정상을 등정한 후 하산하는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
진 채 베이스캠프까지 굴러와서 구조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인간 한계의 한 극점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
프다.
언론이나 서평란에서 이미 생존기의 고전으로 평가된 이 책은 원래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라는 책으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되었던 책이다. 책의 내용은 남미의 안데스 산맥의 시올라 그란데라는 고봉을 등반한 후
조난당한 두 명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자일 파트너인 조 심슨과 사이먼은 아직 사람이 한번도 등정한 적이 없는 이 험산의 최난벽인 서벽을 통하
여 정상에 오른다. 알파인 스타일로 정상 정복에 도전했던 그들은 예상과 달리 험난한 설벽에서 2번의 설동
을 파고 비박을 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오르지만 지쳐있는 상태에다 악천후로 방향을 잘 잡지 못하
고 허둥지둥 하산하는 과정에서 조 심슨이 크레바스로 떨어져 오른쪽 다리가 골절된다. 자일파티에서 한 명
이 부상을 당하면 부상당한 당사자는 말 할 것도 없고 나머지 한 명도 같은 죽음의 운명속에 빠진 것이나 진
배없다. 사이먼은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에 동상에 걸린 손가락으로 조를 1,000여미터가 넘는 벽 아
래쪽으로 한구간씩 달아 내린다. 식량과 연료가 바닥난 그들은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게속해서 하강을 시도
한다. 수직의 암, 빙벽이 끝나고 빙하지대로 접어드는 마지막 구간에서 조는 사이먼이 내려주는 자일에 매달
려 내려오다 엄청난 오버행에 오도가도 못한 상태에 빠진다. 십수미터 아래에는 커다란 크레바스가 아가리
를 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위에서 확보를 보면서 조를 달아 내리고 있던 사이먼은 매달린 조의 무게만큼 팽팽해진 자일을 움켜잡
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한다. 한시간이 지났는가. 더 이상 확보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조
는 둘 다 떨어져 죽느냐 아니면 사이먼을 버리느냐의 마지막 기로에 서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반 무의식적
상태에서 자일을 자른다. 툭 하고 끊어진 자일, 조는 크레바스로 추락한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조는 크
레바스 속의 얼음 다리에 걸려 잠시 살아난다. 다리가 부러지고 탈수와 탈진속에 크레바스에 갇힌 조는 스스
로 생명을 거두려는 생각과 살아보려는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탈출을 생각하고 자일을 회수한다. 땡겨진
자일의 끝을 확인하는 순간 조는 절망감이나 사이먼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뜻밖에도 평온해진 자신을 본다.
그리고 새롭게 탈출의 욕구와 희망을 가지고 벌레처럼 꼬물거리며 벽에 붙어서 기어코 크레바스를 탈출한
다. 이때부터 베이스캠프까지 살아 돌아오는 과정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한다. 부러진 다리로 빙하를
건너고 모레인 지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는 만신창이가 된다. 자다 깨다 잠시 혼절했다가 다시
기어가고 하는 과정은 인간 의지의 시험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본능적인 꿈틀거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편 사이먼은 조가 크레바스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감과 자괴감속에 캠프로 돌아온다. 사이
먼은 자기가 조를 죽인 것인지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스스로를 다짐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공허함과 자괴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산은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며 오르려던 산이 더 이
상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지겨워진 것이다. 사이먼은 친구의 유품을 챙기고 남은 옷들은 모두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한다. 사이먼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잠이 든 새벽녘 이제 캠프 근처까지 기어온
조는 거의 환각상태에서 사이먼을 부른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기 머리위에 우주선이 나타난 듯한 착각을 한
다. 바로 사이먼의 후레쉬가 자신의 머리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생환한 것이었다. 이 비현실
적일 정도로 기가 막힌 상황에서 둘은 뜨거운 눈물을 쏟는 수 밖에.
사실 이 책이 그저 단순한 조난과 그 후의 생존기였다면 독자들에게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
리라. 책은 정상등정 후 조가 부상당한 순간부터 생환할 때까지 두 사람의 심리상태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자신의 한 몸뚱이도 감당하지 못하는 수직의 절벽에서 한순간에 짐덩어리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놔두고 친
구가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조,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같이 죽을 운명속으로 내던져진 사이
먼의 내면세계.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에게 연결된 자일을 끊는 사이먼의 심리상태와 내동댕이져친 조의 마
음을 참으로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다.
책은 조와 사이먼의 내면을 각자의 독백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조와 마주친 사이먼. 그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조는 또 어떤 모습으로 사이먼을 만나게 될지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차마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다. 사이먼은 조에게 도데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조가
얘기한다. "고맙다, 나를 산에서 내려준 네가 고맙다"고. 아마 조의 이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이먼은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상태에서 이제는 자기를 살리기 위해 그
런 행동을 했노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그러나 현장에 있지 않고 단지 활자로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더듬어가
는 독자로서는 사이먼이 산악인으로서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
이먼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자일을 자른 행위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크레바스에 떨어진 조가 죽
었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고 수색도 하지 않고 철수 해버린 것은 너무 성급했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만약
에 조와 사이면의 상황이 바뀌었다면 어떠했을까? 역시 결론을 같았을까? 허나 사람의 일을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더군다나 살고 죽는 일의 엄숙함을 말이다.
이 가혹한 생존의 드라마는 조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경제적인 성공과 명예가 또 다른 인생의 산으
로 그에게 등정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 스스로 인정하듯이 시올라 그란데를 무사하게 등정하고 하산하였다
면 그보다 더 혹독하고 험한 산을 목표로 계속해서 전진했을 것이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죽음을 포함한)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혹독한 시련속에서 살아난 조. 자신의 말대로 패가 주어졌는데 그
패를 가지고 안전플레이를 할 것인지 블러핑을 칠 것인지 아니면 올인할 것인지는 패를 가진 사람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말이다. 어떤 패가 주어 지는지는 그들의 몫이 아니지 않는가.
시올라 그란데라는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올인했던 그지만 그에게 작가라는 패가 다시 쥐어질 줄은 그도 몰
랐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