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인간의 , 한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작가의 표현대로 별 같은 시간을 포착하여 그와 그 시대의 삶을

그려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솜씨는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츠바이크는

우연적이거나 아니면 일상의 단순한 일들로 묻혀 버릴 뻔한 사실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감별해

낸다. 마치 생선을 앞에 놓고 가시와 살코기를 예리하게 발라내듯이 그의 칼은 살점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으

면서 역사의 핵심부분들을 도려낸다. 장인의 솜씨와 안목으로. 그리하여 이미 죽어버린 역사를 살아있는 역

사처럼 요리해 내는 것이다. 한 인간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과 그의 뱃가죽의 두께로 그의 삶, 그의 시대를

통찰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작가의 역사관과 세계관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머리말을 보자.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

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사소한 것의 연속이지만 그런 것들의 집약된 결과가 어느 순간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에 의해 역

사적인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별처럼 등장하는 천재들의 입김을 통하여 역사는 변환된다는 것이다. 그

의 글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이라고 할까. 하지만 천재나 영웅들의 출현도 평지돌출이

아닌 기나긴 역사의 응집의 힘이 만들어내는 결과라고 츠바이크는 이해하고 있다.

츠바이크의 글에서 한가지 아쉽다고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의 하나는 역사변환의 어떤 우

연적 요소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다 보니 역사발전의 필연성이 다소 무시되는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동

로마제국의 멸망이 잊혀진 문 '케르카포르카'가 우연히 열려 있음을 기화로 촉발되었다든지 혹은 워털루에

서 황제 나폴레옹의 직접적인 명령만을 기다리다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그루쉬 장군으로 인하

여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다는 것이라든지 하는 부분은 다소 수사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지

더라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소설보다도 재미있고 시처럼 리드미컬하며 산문처럼 우아하고 교향곡처럼 장중한 그의 문체와 글은

유사한 다른 역사이야기들과는 애초에 비교하기가 뭣할 정도로 빼어난 감이 있다. 아울러서 이런 훌륭한 글

을 유려하고 솜씨있게 번역해서 독자들에게 내놓은 번역자의 공 또한 무시 못하리라.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도 이 책의 장점은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퇴근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이 책을 읽다가 하마터면 버스

를 놓칠 뻔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께서는 화장실에서나 혹은 아이를 돌보면서는 읽지 마

시라. 책에 빠져 뭔가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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