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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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빌브라이슨은 우리로 치면 백두대간 종주같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선다. 그런데 그 길이가 자그만치 삼천킬로미터가 넘으니 우리 백두대간 남쪽구간의 한 6배정도나 되려나? 그 길을 2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 시작이 가상하다. 완주하는 사람들이 10%도 안된다고 하니 그 고되고 험난한 여정을 미루어 짐작할 만도 하겠다. 더구나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뚱뚱한 친구 녀석이 딸려 있어 영 신통치 않아 보인다.

이렇게 다소 어설프게 시작한 그들의 트레일을 독자는 터덜터덜 따라가게 되는데 도시의 때가 잔뜩 묻은 것 같은 카츠의 넋두리나 별로 재미없거나 뻔한 에피소드를 지루할만큼 듣다 보면 ‘그런데 저치들이 여기를 왜 걸어가고 있지?’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들의 트레일에서는 흔히 말하는 거대한 자연속에서 자신의 한계와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고 어쩌고 하는 그런 내용은 없다. H.D.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사색의 글귀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친구인 카츠는 걷는 동안에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 음식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고 이따금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내려가는 도시에서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추파를 보내다 곤욕을 치른다든지 하는 것이 일상이다. 저치들이 뭐하려고 저런 고생을 할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유사한 다른 여행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증기에 덮힌 거대한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사의 덧없음을 뼛속깊이 느끼는 것이었다’ 라든지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울면서 혹은 웃으면서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라든지 하는 내용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런 감흥 쯤은 초월했거나 아니면 천성들이 너무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하여 작가의 글 자체가 긴장감이나 엄숙함 고요한 사색의 색감과는 거리가 멀고 보다 쾌활하고 명랑한 색감이 묻어 있기 때문일까?. 하여간 카츠라는 친구가 그의 트레일 기간 중에서 가장 즐겁고 감동을 느낀 일은 생필품의 공급을 위해서 내려갔던 작은 도시의 가게에서 종주하는 산악인을 처음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산에서의 생활과 장비들을 흥이 나서 소개해 주었을 때였다는 것이다. 농담이라도 다소 심하다.
책은 종주하는 길의 숲이나 계곡의 아름다움보다는 각종 통계와 수치를 동원해 숲이 얼마나 소멸해 가고 있는지 또는 트레일의 건설 역사 같은 것과  트레일에서의 살인사건 발생일지, 흠곡의 내습 빈도 등의 종주 외적인 얘기로 일관한다. 따라서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독자로서는 종주길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떤 산이 있고 무슨 호수가 있으며 그곳에서 자라는 나무와 숲의 모습, 동식물의 생태환경이 어떠하다든지 하는 등의 기본적으로 예상했던 내용의 글은 별로 볼 수 없다.

그래서 혹여 애팔래치아를 걸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별로 쓸모가 없지 않나 싶다. 더구나 첫 페이지의 개략적인 지도 외에는 단 한 장의 지도나 사진도 없어 활자로만 그 기나긴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따라가야 한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작가는 왜 그 장대한 산길의 트레일에 들어섰는지. 그것도 먹보에 짜증 잘 내는 친구까지 동행하면서. 책을 읽은 독자의 나름대로의 결론은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주를 시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책을 쓰기 위해 애팔레치아 트레일이라는 자신에게도 벅찬 여정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작가는 산을 사랑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작가를 탓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무언가 허전하다. 애팔래치아라는 거대한 숲으로 초대를 했으면 적어도 그 거대한 자연속에서 어떤 감흥쯤은 느끼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이 책은 미국의 자연과 산림정책 그리고 애팔래치아의 지질과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한 번 트레일을 해 보고 싶다든지 혹은 트레일을 통해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모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그다지 별로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되 묻는다. 혹시 내가 너무 심각하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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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약속 -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심산 지음 / 이레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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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8000미터를 넘어서는 죽음의 지대에 장갑마저 벗겨 진 상태의 시

신 한구가 들짐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시신이 누워 있는 곳은 힐러리스텝(정상 직전의 50미터 정

되는 수직의 암벽)부근으로 초모랑마를 등정하려는 산악인들이 오가는 길에 마주치게 될 정도로

척인 곳이다.  그의 이름은 박무택,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평가받던 사내였다.  당시 박무택

더불어 초모랑마를 등정하던 2명의 산사나이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

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거나 흔적없이 사라져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났다.  이들과 함께 산

을 오르던 사람들 사이에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사람들

이 모여 들었다.  그 중심에 엄홍길이 있었다.  여기에 신문사의 기자들과 TV 방송팀이 가세했다.  언론

의 집중된 보도로 이제 유족들과의 약속은 국민들과의 약속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은 엄홍길 자신의 약속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후배를 그 삭막한 곳에서 데려와 비록 시신이지

만 가족의 품안에 안겨주겠다는......... 그리하여 결성된 원정대. 이름하여 휴먼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원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가졌던 셈이다.  산소가 평지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죽음의 지대에

서 시신 구조작업이라니.  자신의 한 몸도 간수하기 어려운 고도에서 몇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작업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이런 일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했다.

약속이기에.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약속.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고봉 14개를 아

시아 최초로 오른 한국 산악계의 기린아다.  그 죽음의 여정에서 엄홍길과 박무택은 4번이나 자일을

묶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이들의 우정은 이처럼 한쪽이 죽어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왜 산으로 가고 산에서 죽어 가는가.  따뜻한 집과 소중한 가족들의 품을 떠나서 황량한 벌

판과 눈폭풍이는 거친 그 곳으로.  히말라야 등정과 같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산행은 알피니즘의 실

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속세의 삶과 긴장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흰 산

을 향한 열망과 자신의 모태인 가족과의 사이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다리가 놓이는 셈

이다.  어찌할 것인가.  삶은 자신만의 것인가.  책에는 망자들을 향한 가족과 살아남은 친구들의 눈물

이 시종일관 베어 있다.  그  눈물을 뒤로 하고 원정대는 한 발짝식 나아간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

당초 목표한대로 시신들을 찾아 가족들의 품에 인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그토록 서 있고 싶어

던 자리에 케른을 쌓아 장사지내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가고 원정대는 돌아

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도전속에서 죽어간 자들과 그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내 자신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삶은 그런 것인가.  슬픔을 팔아 기쁨을 사듯

이.

 

아무리 휴먼원정대이지만 100일간이나 지속된 힘들고 모진 원정에서 어찌 반목과 갈등이 없었으랴.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종일관 연대감과 의무감 그리고 인간애에 충실한 원정대의 일정을 따라간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도 공해의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스토리의 영화를 본 듯

하다.  박인식 정광식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산악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저자의

남성적이고 시원스런 문장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악인들의 남다른 우정과 희생적인 삶이

이 각박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준 빛나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엄홍길이 서문에서 말한 바

'이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잊어버리게 된 소중한 것들. 인간애

우정 의리 약희생과 같이 너무도 오랬동안 들어본 적이 없어 생뚱맞은 느낌마저

주는 빛바랜 단어들'을 이 책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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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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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처방전을 받고 근처 약국에 가서 약을 타서 나오려고 하는데 판매대에 있는 노란색 [레모나]가 눈에 띄었다. 그 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이에게 그 것을 사주려고 했었다는 생각이 났다. 한통을 들고 약사에게 값을 치루려고 하니까 약사가 지나가는 말로 누가 먹을 것인지를 물었고 나는 피곤해 하는 아이 얘기를 했더니 요새 새로 나온 비타민제가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하면서 처음 보는 제품을 소개했다. 그것은 [레모나] 통보다 부피도 훨씬 컸고 가격도 3배 정도 비쌌다. 그 때 이제 늙어가고 있는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아이도 같은 시간 속에 묻혀간다는 구슬픈 생각이 갑자기 들었으므로 그 비타민제를 샀다. 원형의 약통을 하얀 비닐종이에 싸들고 출근하는 내게 아는 사람들마다 봉투의 내용물과 그 용도와 효능에 대해 연속적으로 물었다. 나는 아침부터 피곤해졌다.

사실 전날만 해도 나는 병원에 갈 일이 전혀 없었다. 옆 자리의 동료 직원이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며 결근하는 바람에 그의 일의 일부를 처리하게 됐고 다음날 대직을 해주어서 고맙다며 그 직원이 저녁을 샀는데 음식점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와 2차를 갔다가 마침 그 친구의 집이 근처에 있다고 하여 친구의 집으로 3차를 가게 됐는데 그날 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9층이 친구의 집이었는데 계단을 오르다가 가게에 간다는 그의 부인을 만났다. 집에는 9살 먹은 그의 딸이 자고 있었는데 원피스인 잠옷의 색깔이 노란색이었다. 나는 가는 길에 멜론을 사 가지고 갔었는데 그의 부인이 그것을 몰랐는지 레몬을 사왔다. 레몬을 보는 순간 며칠 전 공휴일에 아이와 함께 집 앞의 불곡산에 올라가서 맛있게 먹었던 오렌지에 대한 기억이 났다. 나는 친구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가져온 칼을 보니 스위스 제 빅토리녹스 칼이었다. 내가 수 년 전 직장에서 단체로 보내주는 해외연수 길에 선물로 사서 친구에게 주었던 기억이 났다. 조금의 흠집도 없이 아직도 반짝이는 스텐레스날 그대로였다.  그런데 칼을 사용하지 않고도 벗길 수 있었던 레몬의 껍질을 벗기다가 그만 그 예리한 칼날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지혈이 잘 되지 않아 병원에 갈까 했으나 귀찮기도 하고 취기로 인해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지라 결국 병원에는 가지 않고 그 밤을 넘겼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가락의 상처가 덧 나 있었다. 이 것이 내가 출근길에 병원에 들리게 되었던 이유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생각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무수히 겹쳐진다. 내가 옆자리 직원의 대직을 하지 않았으면, 아니 그전에 옆의 직원에게 돌발적인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 내 책상앞에 놓여 있는 약통은 약국에 그대로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을까. 친구의 집에서 레몬주스를 먹고 그의 어린 딸의 노란 잠옷을 보지 않았다면 내가 약국에서 노랗게 포장돼 있던 [레모나]를 발견했을까. 아니 내가 수년전에 그 친구에게 문제의 스위스제 빅토리녹스 칼을 선물하지 않았었다면 그렇다면.............. 이처럼 지금 나에게 이렇게 일어 났던 일들은 연속적인 것인가. 아니면 공간속에 중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인가.

이 책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오는 단편 [끊임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이와 같은 시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루고 있다. 즉 ''공간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시간의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합한 비유는 아니지만 얼마전에 개봉되어 인기를 끓었던 영화 [메트릭스]를 통해서 우리는 프로그램상의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을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인한 바도 있다. 종전까지의 시간에 대한 생각 즉 시간은 무한히 계속되고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어 있다고 본 뉴턴이나 시간이란 개인적이고 특별한 상태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파악한 쇼펜하우어(164쪽 22번 주 참조)와 달리 보르헤스는 주인공인 유춘의 말을 빌어"시간의 다른 차원들 속에서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비밀스럽고 분주한 알버트와 나"와 같은 개념으로 시간을 바라 본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에게 빅토리녹스 칼을 선물하지 않고 같이 근무하는 직원에게 선물했다고 하자. 산을 좋아하지만 물건 챙기는 데는 서투른 그 직원은 등산갔다가 칼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다른 등산객이 그 칼을 주워 갔을 것이다. 그럼으로서 칼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됐고 그 공간속에서 다른 시간의 흐름을 타는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처럼 다른 차원에서 순간 순간 지금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무한히 엮어지며 전개되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삶이. 놀랍지 않은가.

난해하지만 보르헤스라는 늪에 빠지면 결코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리뷰어들의 평처럼 독자는 지금 이 책 중에 몇개의 단편만을 읽었지만 이렇게 사고의 확장을 통한 충일한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근래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간에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서 있는 내가 혹여 지금 다른 차원의 공간속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섬뜩해진다. 보르헤스의 생각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현재의 시간이 지니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를 앎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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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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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라는 덩굴손은 알게 모르게 혹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그 촉수를 뻗쳐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정치가가 정치는 종합예술이다라고 수사적으로 말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거렸는데 그만 낮술로 고양된 기분에 그는 재빨리 사실대로 자백했다. 정치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여간 당대나 과거나 정치는 끊임없이 사람을 유혹해서 포장하고 떠벌리고 고양시키고 매장하고 폐기시키는 기괴한 공간의 속성을 가진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망상과 무모함으로 승부를 걸어 보지만 탁월한(?)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카루스처럼 추락해 간다. 그 몇 몇 중에 여기 녹지 않는 날개와 발톱을 가지고 음울한 구름속을 날면서도 최후의 한번을 제외하고는 결코 추락해본 적이 없는 프로페셔널이 있다. 그 인물,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거장이 펼쳐놓은 그물에 걸려든 새, 그가 바로 조세프 푸세이다. 프랑스 대혁명 25년동안의 극단적인 변동속에서도 살아남았으되 결코 조연이 아니었으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되 전 유럽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이 책을 통하여 작가는 붉은 휘장에 비치는 검고 커다란 그림자의 실체를 예리하게 추적해 간다. 

우리의 정치역사로 말하면 자유당독재정권을 무너트린 4월혁명 후의 장면정권과 뒤이은 5.16으로부터 5공 6공을 거치는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인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문민정부의 그 긴 세월 동안을 정치의 막전 막후의 핵심부를 헤집고 다닌 셈이라고 할까. 우리의 격동의 현대사에서도 얼핏 푸세같은 인물이 한 두명 떠오른다. 정치 현실이나 시대상황이 프랑스와 우리의 경우가 물론 다르겠지만 정치의 속성상 유사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츠바이크가 그리는 푸세는 계산적이고 냉혈한 음모가이면서 타고난 수완가였다. 물론 운도 그의 편이었다. 혁명으로 만들어진 자코뱅당의 초강경파에서 혁명을 부인하고 과거로 회기하는 왕당파의 핵심인물로까지의 극과 극을 넘나들었던 그는 나폴레옹같은 천재의 정적이면서도 자신을 등용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이제 거의 무너졌다 싶은 순간에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살아남아 불사조처럼 재기하는 모습에 두려움을 넘어서 차라리 경탄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다.

독자는 정치를 떠나서 사람 만나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재주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지라 사실 푸세같이 능수능란한 모사꾼을 보면 거부감부터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일정부분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를 따라 건설된 도로를 우리는 걸어온 것이 아닌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다루 사람은 결코 호감있거나 본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고맙게도 그를 통해 우리는 정치의 냉혹한 현실과 실체를 알게 된다. 그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리고 조세프 푸세가 펼치는 정치를 통해 프랑스 혁명의 이면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이 책에서의 두 번째 소득이다.

사실 텅 빈 머리로 보면 정치만큼 생동감있고 재미있는 소설감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이 책도 당연히 재미있다. 소설보다도. 그러나 심각해야한다.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치는 끝없는 환멸이다. 나아가 푸세를 아니 그와 같은 사람들을 오늘날도 계속해서 보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정치판과 꾼들에 대한 반면교사로서의 역할도 충분하고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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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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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탁월한 전기작가인 츠바이크가 [정신세계의 건축가들]이란 책에서 다른 문인들과 함께 다루었던 발

자크를 좀더 크고 세밀한 그림으로 엮은 책이다. 츠바이크는 앞서의 책과 구별하여 큰 발자크란 별칭을 달고

이 책을 썼는데 이는 작가가 그만큼 이 천재적인 작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발자크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한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다.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10

명의 작가도 생산해 내지 못할 작품들을 써 갈겨댄 시대의 천재이면서도 일상의 삶은 온갖 속물적인 것으로

얼룩진 다면적인 성격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온라인 상에서는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사람이 오프라

인 상에서는 아주 엉뚱하거나 무지한 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무한한 지적 편력

그리고 다함이 없는 에너지로 불멸의 작품들을 써냈다. 그러나 현실 삶에서는 끝없는 돈의 추구, 여성 편력,

귀족주의의 추구로 표현되는 속물적인 인간의 표상이었다. 이 천재에게 있어 그 양면 삶의 절충점은 결코 없

었다.

수준높은 교양을 가진 지적 인격체로 표현될 수 있는 작가라는 존재가 이렇듯 이중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는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해지는 부분이 있지만 당시의 유럽 나아가 혁명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던 프랑스사회

에서는 아주 낮선 인간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발자크는 프랑스 혁명 뒤 전쟁영웅 나폴레옹이 부상하던 시기

에 인생의 노련한 승부사였던 시민계급 출신의 아버지와 그보다 30여년이나 젊은 계모밑에서 태어났다. 가

엽게도 어머니의 사랑은 그에게는 소설속에나 있는 얘기였다. 일찌감치 부모곁을 떠나 기숙사가 있는 학교

에 보내졌던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책을 통하여 온갖 지식들을 빨아들이면서 이 복잡한 세상에

눈을 떠갔다.(어제의 세계의 슈테판 츠바이크처럼) 스무살 청년이 되어 공증인으로서 평범하지만 안정된 직

업이 눈앞에 있던 그에게 가슴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작가에의 열망은 그를 평범한 그 직업에 매달려

있게 하지 않았다. 글로서 세계를 정복하리라. 나폴레옹이 칼로서 정복한 세계를 펜으로 완성하리라. 나폴레

옹처럼 그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나폴에옹처럼 그도 이미 천재였다. 스무살 청춘의 시절

부터 온갖 세상살이에 눈뜨게된 그는 또한 너무 조숙했다. 처음의 작품에서 무참한 실패를 하고 나서 그는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무수한 글품을 팔았으며 인쇄소 등 닥치는 대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문학외

에서는 백이면 백 실패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폭발적인 괴력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인생의

물러섬이란 없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즉흥적으로 시작한 그의 온갖 사업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거나

몽상적이었기에 혹은 너무 순진했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문학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진지함이

나 집중력 그리고 글감을 찾아내는 천재적인 안목이나 필력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여성편력 또한 화려

했다. 수많은 여성을 상대하면서도 하나하나의 여성에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한 삶은 생이 마쳐질 때까지 일관됐다. 죽기 직전에 결혼을 하였지만 평생을 독신아닌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거나 여유로운 삶이 아니었다.

그에게 수많은 여성은 성적인 쾌락의 대상이 아니었다. 계모로부터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대신

하는 피난처이자 조언자였으며 신분상승을 위한 창구였다. 그러기에 상대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나이

가 많거나 아니면 유부녀였으며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여성도 돈도 그의 문학적인 성공만큼 인

생에 성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평생을 채무자로 살았으며 자신이 선택한 여성에게는 하인처럼 노예처럼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의 삶은 화려했으나 지속적이지 못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갔으나 손과 발은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 그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은 오로지 문학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붙잡기 위해 바친 그의

노력은 너무나도 헌신적인 것이었다. 독자들은 츠바이크가 펼쳐놓은 발자크의 일생을 추적하며 그의 천재적

인 작품에 경탄하기도 하고 코미디 같거나 속물적인 삶에 비웃음을 날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무릇 역사의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작품은 그의 삶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의 삶의 온갖 거품은 말그대로 거품일뿐

그것으로 인하여 발자크라는 거인에 대한 평가가 왜곡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아니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자유지만 그 누구도 그의 몸으로부터 새어나온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츠바이크의 예리하면

서도 애정어린 필치로 낱낱이 해부되어있는 발자크의 일생을 보며 한 천재 예술가의 외로운 말년을 생각한

다. 영감처럼 쓸쓸한 거인의 생을.  

이 책은 시중에서 이미 절판됐다. 이런 좋은 책들은 왜 다시 발행되지 않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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