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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정치라는 덩굴손은 알게 모르게 혹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그 촉수를 뻗쳐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정치가가 정치는 종합예술이다라고 수사적으로 말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거렸는데 그만 낮술로 고양된 기분에 그는 재빨리 사실대로 자백했다. 정치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여간 당대나 과거나 정치는 끊임없이 사람을 유혹해서 포장하고 떠벌리고 고양시키고 매장하고 폐기시키는 기괴한 공간의 속성을 가진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망상과 무모함으로 승부를 걸어 보지만 탁월한(?)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카루스처럼 추락해 간다. 그 몇 몇 중에 여기 녹지 않는 날개와 발톱을 가지고 음울한 구름속을 날면서도 최후의 한번을 제외하고는 결코 추락해본 적이 없는 프로페셔널이 있다. 그 인물,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거장이 펼쳐놓은 그물에 걸려든 새, 그가 바로 조세프 푸세이다. 프랑스 대혁명 25년동안의 극단적인 변동속에서도 살아남았으되 결코 조연이 아니었으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되 전 유럽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이 책을 통하여 작가는 붉은 휘장에 비치는 검고 커다란 그림자의 실체를 예리하게 추적해 간다.
우리의 정치역사로 말하면 자유당독재정권을 무너트린 4월혁명 후의 장면정권과 뒤이은 5.16으로부터 5공 6공을 거치는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인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문민정부의 그 긴 세월 동안을 정치의 막전 막후의 핵심부를 헤집고 다닌 셈이라고 할까. 우리의 격동의 현대사에서도 얼핏 푸세같은 인물이 한 두명 떠오른다. 정치 현실이나 시대상황이 프랑스와 우리의 경우가 물론 다르겠지만 정치의 속성상 유사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츠바이크가 그리는 푸세는 계산적이고 냉혈한 음모가이면서 타고난 수완가였다. 물론 운도 그의 편이었다. 혁명으로 만들어진 자코뱅당의 초강경파에서 혁명을 부인하고 과거로 회기하는 왕당파의 핵심인물로까지의 극과 극을 넘나들었던 그는 나폴레옹같은 천재의 정적이면서도 자신을 등용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이제 거의 무너졌다 싶은 순간에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살아남아 불사조처럼 재기하는 모습에 두려움을 넘어서 차라리 경탄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다.
독자는 정치를 떠나서 사람 만나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재주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지라 사실 푸세같이 능수능란한 모사꾼을 보면 거부감부터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일정부분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를 따라 건설된 도로를 우리는 걸어온 것이 아닌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다루 사람은 결코 호감있거나 본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고맙게도 그를 통해 우리는 정치의 냉혹한 현실과 실체를 알게 된다. 그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리고 조세프 푸세가 펼치는 정치를 통해 프랑스 혁명의 이면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이 책에서의 두 번째 소득이다.
사실 텅 빈 머리로 보면 정치만큼 생동감있고 재미있는 소설감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이 책도 당연히 재미있다. 소설보다도. 그러나 심각해야한다.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치는 끝없는 환멸이다. 나아가 푸세를 아니 그와 같은 사람들을 오늘날도 계속해서 보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정치판과 꾼들에 대한 반면교사로서의 역할도 충분하고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