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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약속 -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심산 지음 / 이레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히말라야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8000미터를 넘어서는 죽음의 지대에 장갑마저 벗겨 진 상태의 시
신 한구가 들짐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시신이 누워 있는 곳은 힐러리스텝(정상 직전의 50미터 정
도 되는 수직의 암벽)부근으로 초모랑마를 등정하려는 산악인들이 오가는 길에 마주치게 될 정도로
지척인 곳이다. 그의 이름은 박무택,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평가받던 사내였다. 당시 박무택
과 더불어 초모랑마를 등정하던 2명의 산사나이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
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거나 흔적없이 사라져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났다. 이들과 함께 산
을 오르던 사람들 사이에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사람들
이 모여 들었다. 그 중심에 엄홍길이 있었다. 여기에 신문사의 기자들과 TV 방송팀이 가세했다. 언론
의 집중된 보도로 이제 유족들과의 약속은 국민들과의 약속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은 엄홍길 자신의 약속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후배를 그 삭막한 곳에서 데려와 비록 시신이지
만 가족의 품안에 안겨주겠다는......... 그리하여 결성된 원정대. 이름하여 휴먼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원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가졌던 셈이다. 산소가 평지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죽음의 지대에
서 시신 구조작업이라니. 자신의 한 몸도 간수하기 어려운 고도에서 몇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작업
을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이런 일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했다.
약속이기에.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약속.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고봉 14개를 아
시아 최초로 오른 한국 산악계의 기린아다. 그 죽음의 여정에서 엄홍길과 박무택은 4번이나 자일을
묶었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이들의 우정은 이처럼 한쪽이 죽어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왜 산으로 가고 산에서 죽어 가는가. 따뜻한 집과 소중한 가족들의 품을 떠나서 황량한 벌
판과 눈폭풍이는 거친 그 곳으로. 히말라야 등정과 같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산행은 알피니즘의 실
현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속세의 삶과 긴장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흰 산
을 향한 열망과 자신의 모태인 가족과의 사이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다리가 놓이는 셈
이다. 어찌할 것인가. 삶은 자신만의 것인가. 책에는 망자들을 향한 가족과 살아남은 친구들의 눈물
이 시종일관 베어 있다. 그 눈물을 뒤로 하고 원정대는 한 발짝식 나아간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당초 목표한대로 시신들을 찾아 가족들의 품에 인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그토록 서 있고 싶어하
던 자리에 케른을 쌓아 장사지내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가고 원정대는 돌아
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도전속에서 죽어간 자들과 그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내 자신이 감동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삶은 그런 것인가. 슬픔을 팔아 기쁨을 사듯
이.
아무리 휴먼원정대이지만 100일간이나 지속된 힘들고 모진 원정에서 어찌 반목과 갈등이 없었으랴.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종일관 연대감과 의무감 그리고 인간애에 충실한 원정대의 일정을 따라간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도 공해의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스토리의 영화를 본 듯
하다. 박인식 정광식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산악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저자의
남성적이고 시원스런 문장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악인들의 남다른 우정과 희생적인 삶이
이 각박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준 빛나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엄홍길이 서문에서 말한 바
'이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잊어버리게 된 소중한 것들.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이 너무도 오랬동안 들어본 적이 없어 생뚱맞은 느낌마저
주는 빛바랜 단어들'을 이 책에서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