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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ㅣ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달리의 고치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북홀릭 (2012)
달리를 동경해 달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력을 거스르는 콧수염을 똑같이 기른 도조 슈이치가 그 수염이 잘린 채, 평소 애용하던 고치 안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도조를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이며 왜 죽였을까?
'달리의 고치'는 이 짧은 컨셉을 압축한 소설의 제목처럼 유명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고치라는 '최첨단 휴식머신?'이 중요한 상징과 은유이자 사건해결의 열쇠로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달리
달리의 수염으로 상징되긴 했지만, 도조가 동경하는 건 달리의 외양이나 그가 수집한 달리의 작품들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입니다. 그렇다고 지극히 범상한 두뇌와 사고방식을 가진 도조가 달리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쫓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도조 스스로도 그에 대한 욕심은 그리 크지 않았던 듯 하구요. 도조는 이를 대신해 달리의 뮤즈였던 올가와 같은 여인을 만나는 것이 평생의 로망이었던 모양입니다. 올가가 달리의 영혼의 안식처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듯이 자신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해줄 여인이 필요했던 것일 터 입니다.
비서인 사기오 요코는 바로 그러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현실 속 요코는 진정한 달리의 뮤즈였던 올가와 (물론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뮤즈라는 표현 또한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의 결과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다르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지극히 현실적 고민을 하는 속물에 가깝습니다.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도조는 달리의 외양은 카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끝내 일치시킬 순 없었던 겁니다. 나는 나, 일 뿐 누구가 될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아픈 진리. 도조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사실을 끝내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한, 외롭고 고독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이러한 삶에 대한 모방을 자신 스스로의 인격적 완성 혹은 라이프스타일의 창조적 재해석이 아닌,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완성하려했다는 것 자체가 도조라는 인물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반증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고치
고치는 바로 그러한 도조의 불안정하고 유아기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정신상태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회사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수완 좋은 사업가이자 한 회사의 수장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해내지만, 실제 삶에서는 진정한 친구도 사랑하는 이도 없이 홀로 모든 걸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그 압박과 고독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한 도조가 유일하게 기대며 유일하게 평온을 얻는 곳이 바로 이 고치인 것입니다.
엄마의 뱃속처럼 아무 고민도 걱정도 필요없이, 태아때의 알몸으로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그곳에서 도조는 비로소 짧은 순간이나마 위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역시 각박하고 숨막히는 현실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 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리 없습니다. 도조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알면서도, 그 잠시 잠깐의 도피라도 자신에게 허락하고 싶었던 것일테지요.
굼벵이의 허물
'달리의 고치'라는 제목의 함의를 떠올리면서, 저는 굼벵이의 허물이 떠올랐습니다. 매미가 되기 위해 7년의 긴 시간 동안 허물을 벗지 못하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허물을 벗어나 매미가 되면, 겨우 10여일의 시간동안 소리내어 울다가 생을 마치는 굼벵이, 그리고 그러한 굼벵이가 수년 동안 견디며 살아냈던 허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고조는 그토록 원하며 기다리던 매미가 되지 못하고, 그를 꼭 닮은 허물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고조를 죽인 물리적 범인은 물론 따로 있지만, 결국 고조를 죽인 것은 굼벵이로써의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평생 매미만 꿈 꾼, 고조 자신이 아닐까요? 더 이상 말씀드리면 소설의 결말과 연관된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 이쯤에서 멈춰야겠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는 떳떳하고 멋진 모습만이 아닌, 굼벵이처럼 못나고 추레한 자신의 속내까지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러한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고 채워나갈 노력을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고 비로소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진짜 인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