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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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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벌써 많이들 읽으셨을 겁니다.
굳이 제가 소개를 해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비평과 인터뷰 등 관련글들도 넘쳐납니다.
그러니 오늘은 기존의 리뷰와는 다른, 조금은 새로운 방식으로 '7년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바로 소설 '7년의 밤'이 아닌, 영화 '7년의 밤'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영화? 소설이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영화가 나왔냐구요? 물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상상이지요, 말그대로...상상.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것은 조만간 '7년의 밤'이 영화로 제작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7년의 밤'이 출간되자마자 가장 뜨거운 관심을 보인 것은 일반 독자나 평론가들이 아닌 영화제작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항상 콘텐츠 부족에 허덕이는 제작자들이다보니 오랜만에 볼만한 한국소설이 한 편 나왔다는 입소문을 듣자마자 판권구입을 위해 달려든 것이지요. 어떤 영화사가 판권을 구입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추세라면 '7년의 밤' 이 영화화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실제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과연 영화 '7년의 밤'은 어떤 모습일까...한번쯤 제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7년의 밤
 / 소설 / 정유정 / 은행나무 (2011)

주인공과 화자는 누구인가

'7년의 밤'은 의외로 화자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소설입니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실제 화자는 분명히 승환이지만 정작 유일하게 일인칭을 부여받은 공식적인 화자는 서원입니다. 소설 속의 7년전 과거가 팩트가 아닌 승환이 쓴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걸 알고나면 둘 중 누구를 화자라 해야할 지 더더욱 망설여집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쉬운 질문.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야 당연히...

어라? 당연히...곧바로 자신있게 누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최초로 떠오르는 이름은 물론 현수입니다. 승환이 쓴 소설 속의 소설의 주인공이자 모든 사건의 시초이자 주체인 인물. 서원과 승환은 물론이고 영제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의 삶을 송두리채 뒤버꿔버린 인물. 그렇게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의 전부일 수 밖에 없는 인물. 최현수.
그러나 우리는 서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원은 이 소설 전체의 화자이자 이 소설을 움직이는 또다른 동력입니다. 현수도 승환도 오직 서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일생을 바치고 영제 또한 서원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서원은 이 소설 최대의 미스터리이면서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인물, 즉 '7년의 밤'에서의 바로 그 '7년'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 소설에서야 둘 중 누가 주인공이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장성한 서원이 승환이 쓴 소설을 읽으며 7년전 그 밤의 진실을 향해 차츰 접근해가는 소설의 구조는 굉장히 안정적이며 그렇게 탄탄한 구조 안에서 서원과 현수는 각자의 파트에서 주인공으로써의 역할에 최선을 다합니다. 굳이 누가 진짜 주인공이냐를 따지지 않아도 될만큼 의식하며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균형과 안배가 잘 되어 있는 것이지요.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다해도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입니다. 영화에서도 소설처럼 서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 될 듯 합니다. 그러면서 서원이 승환이 쓴 소설을 읽는 방식으로 7년의 밤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날 그 밤으로 넘어가면 될 듯 합니다.

복잡한 구조를 어떻게 단순화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소설에 비해 일방적이고 불친절한 매체입니다. 소설처럼 잠시 멈춰서서 정리하고 생각하며 음미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며, 소설처럼 모든 걸 풀어서 설명해 줄 수도 없습니다. 영화는 공간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입니다. 씬이라는 영화적 시공간 안에서 배우들은 리얼타임의 순간을 재현해냅니다. 몽타주와 나레이션이 시공간의 점프를 가능케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공간과 시간에 자리잡은 인물은 움직이고 말함으로써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야 하며, 사건은 오직 그러한 인물들간의 물리적인 부딪힘과 대화를 통해서 발생하고 설명됩니다. 보는 이들은 그러한 씬들의 나열을,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저 따라가며 지켜봐야 합니다. 따라서 소설에 비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주인공이라 부르는 중심이 확실해야 하며 그 중심을 둘러싼 사건과 갈등은 최대한 선명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설령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최대한 쉽고 가지런하게 나열하고 배치해서 관객들이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영화가 진행되는 두시간 동안 관객들은 영화의 강제성을 용인하며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집중하며 빠져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소설 '7년의 밤'을 영화로 각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승환이 쓴 소설속의 소설은 분명 현수가 주인공이지만 시점과 화자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중심에는 분명 현수가 있지만 사실상 이 소설속의 소설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현수, 영제, 승환 그리고 현수의 아내인 은주까지. 총 4명의 시점에서 소설속의 소설은 진행됩니다. 덕분에 읽는 이들은 모든 인물의 입장과 심리상태를 속속들이 알 수 있고 거의 완벽하게 7년전 그 밤 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며, 이러한 선택을 통해 작가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매력이 어느 만큼인지 독자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이쯤되면 작가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야만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애초부터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혹시 무리해서 시점을 다변화하는 시도를 해본다 해도 성공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인물들을 옮겨가며 시점이 바뀐다면 영화는 산만해지기 십상이며 관객들은 대체 누구에게 이입하며 따라가야 할지 헷갈려하며 집중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과 그를 모방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이러한 시점의 다변화는 분명 효과적이었지만, 이는 분명 일반적인 경우라  하기는 힘듭니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을 인물 각자의 진술을 통해 회상함으로써 진실이라는게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장치로 쓰였기 때문에 관객들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7년의 밤'은 이러한 '소설 속의 소설'을 읽는 현재의 서원의 이야기가 병렬되는 구조입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차츰 차츰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소설인 것이지요. 

이렇다보니 소설 '7년의 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은 성가시다 못해 난해한 작업이 될 공산이 큽니다.

소설의 액자구성을 그대로 차용할 것인지, 차용한다면 영화 전체의 화자는 서원과 승환 중 누구로 할 것인지, 소설 속의 소설의 다양한 시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나의 시점으로 모아내서 7년 전 그 밤을 보여줄 것인지, 현재의 서원의 스토리는 어떤 식으로 솎아내서 알맹이만 매끈하게 관객들에게 설명해낼 것인지...고민거리 투성입니다.

정답은 없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원작을 해체하고 발려내서 하나씩 하나씩 나열한 다음에 섬세하게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뭐든지 선택 가능합니다. 소설에 얽매일 필요없이 기본적인 이야기 재료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구조로 만드는 것도 좋고, 원작에 충실하게 다층적인 구조를 고스란히 살리려 노력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구조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결국 스토리를 전하는 형식일 뿐입니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살려내서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구조이고 좋은 각색인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은 결국 현수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될 실수를 저지른 한 인간이 차츰 파멸해가는 모습. 그러면서도 더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그리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나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현수를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증오할 것인가. 작가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인 현수를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증오할수도 없는 인물, 현수. 이 선과 악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비주얼부터 캐릭터까지 너무나도 완벽하게 영화적인 이 인물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묘사해낼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영화 '7년의 밤'이 성공하기 위한 최초이자 최대의 관건일 것입니다. 

모든 고민과 선택은 바로 이러한 '현수의 현현'에 맞춰져야 하며, 현수를 실물처럼 살아 움직이게만 할 수 있다면 화자도 구조도 나머지 캐릭터들도 전혀 새롭게 바뀐다해도 상관 없을 것입니다. 아예 화자가 현수 자신이어도 좋고 심지어는 서원과 승환의 현재를 날리고 '7년전 그 밤'만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줘도 좋겠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한 현수의 광기어린 폭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압도당할 것이며 시각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굉장한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7년의 밤'에 대해 상상한다 해놓고 결국 원론적인, 당연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섣불리 상상하기에는 소설의 구조가 너무나 촘촘하고 탄탄합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겠다 싶어질 만큼, 그냥 영화같은 건 만들지 말고 소설로만 놔두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질 만큼, 그렇게 말입니다.
그럼에도 방금 말씀드렸듯이 현수를 생각하면 아직 막연하기는 하지만 분명 확연하게 떠오르는 그림들이 참 많습니다. 영제가 설치한 덫에 걸려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는 현수의 모습. 손에 든 서원의 하얀 농구화를 차마 던지지 못한 채 통곡하는 현수의 모습.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몸으로 아들 서원을 구하기 위해 안개 가득한 세령댐을 가로지르는 현수의 모습까지. 이쯤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욕심이 나기 시작합니다. 섬뜩하면서도 안쓰러운 현수의 모습을 직접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

이렇게 저조차도 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니 결국 영화화가 되긴 될 모양이네요. 기왕 그렇게 될 것이라면, 그것이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부디 좋은 감독 좋은 작가, 그리고 좋은 배우의 손을 빌려 자신의 참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현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소설 '7년의 밤'과는 또 다른, 우리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인...영화 '7년의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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