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7년의 밤 / 정유정 / 은행나무 

작년 이맘때쯤, 아무런 정보 없이 <내 심장을 쏴라>를 읽었다. 정유정이라...솔직히 듣도 보도 못했던 작가였기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었는데, 소설은 뜻밖에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꽤나 훌륭했다. 무엇보다 마치 영화처럼 과감한 전개와 감각적인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순수 문학의 관점에서는 그리 장점이라 할 수 없는 부분들이지만, 이제는 견고하다 못해 답답하게까지 느껴지는 자의식 과잉의 한국 소설들에 서서히 싫증을 느끼던 참인지라 정유정은 오히려 기억할 만한 이름이 되었다.  

그로부터 일년, 그의 이름을 기억해놓은 보람을 만끽할 시간이 마침내 찾아왔다. 그의 신작, <7년의 밤>이 마침내 출간된 것이다. 그렇다고 손꼽아 기다렸다거나, 득달같이 달려가 구입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랬다면 나는 이미 이 책을 읽었을테고, 이렇게 이 소설이 읽고싶다며 주절거리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읽고 싶었으면서도 '선뜻'이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전작과 달리 조금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 탓이었을게다. 작정하고 썻다는 야심작이라는 느낌, 그렇기에 그 두께도 만만치않을 뿐 아니라 전작처럼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도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부담감 또한 적지않게 작용했을 터이고. 

그럼에도 마냥 미뤄두기에는 아까운 소설인지라, 이렇게 신간서평단 추천을 핑계로 이 소설과 마주하려 한다. 부디 인연이 닿을 수 있기를. 

 

생강 / 천운영 / 창비 

천운영의 <잘가라, 서커스>를 읽은 것이 대체 언제이던가. 이 작품, <생강>이 고작 두번째 장편이라니 전작을 읽은 순간들이 가물해질 만큼의 시간 동안 작가는 이 작품을 벼르고 별렸던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 작품 또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을 듯 하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잘가라 서커스>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끼쳐오는 탓이다. 

읽었던 순간의 기억들. 어느 계절이었는지, 어디서였는지, 내용은 까먹어도 그 책을 읽던 장소와 시간은 되려 또렷하게 기억하는 나이건만, 이상하게도 <잘가라, 서커스>를 어디서 언제 읽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대신으로, 소설의 내용, 아니 차라리 무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그 질감과 부피가 아직도 또렷하다. 남한으로 시집 온 조선족 여인. 그녀가 버텨낸 시간들. 구체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하루하루를 집요하게 기록해낸 작가의 끈질기다 못해 징글징글한 문체가 방금 손으로 만진 듯 생생한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떻게 얼만큼 후벼팠을까, 한 인간의 혹은 어느 인간들간의 관계를 집요하게 헤집고 도려냈을까. 읽기도 전부터 걱정스러운 것이다. 대략적인 시놉을 보아하니 역시나 이번에도 만만치가 않다. 고문기술자와 그 딸이라니. 그들이 한 공간에서 동거를 하다니. 내게 그 소름과 아픔을 기꺼이 감당할 마음의 자리가 과연 있을까.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이, 스멀스멀 호기심이라는 녀석이 두려움을 누르고 올라서기 시작한다. 그래, 호기심, 니가 이겼다. 모든 것을 앞서는 호기심의 힘으로, 나는 <생강>을 읽을 것이다. 4월이 가기 전에. 

 

일단, 웃고나서 혁명 / 아지즈 네신 / 푸른숲

터키의 아지즈 네신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이다. 물론 터키를 가 본적도 없고, 작가의 이름 역시 처음 듣는다. 그렇다면 터키의 소설이라도 읽어 본 적이 있던가. 아무리 애써봐도 떠오르는 건,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정도다. 그마저도 학교 때 선생님의 강제로 간신히 필요한 부분만 띄엄띄엄, 꾸역꾸역 읽은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이 책을 고른 것은...혹시 표지의 체 게바라 때문일까? 뭐, 그럴수도 있겠다. '체 게바라는 터키 사람도 아닌데? 체 게바라가 터키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썼다는 이야기 역시 금시초문인데, 대체 왜 그가 표지에 6번이나 찍혀 있는 거지?' 슬몃 궁금해졌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 책이 읽고 싶어진 것이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 풍자. 엽편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부담없는 단편들의 모음집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지하철을 오가며 가볍게 한편씩 읽고는, 있는 힘을 몽땅 쏟아내야 하는 화장실에서의 치열한 시간 동안 혹은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하루 중 가장 노곤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 동안 방금 읽은 단편의 유머를 다시금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짓다가도, 그 안에 담긴 만만치않은 메시지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기도 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나가사키 / 에릭 파이 / 21세기북스

아, 읽고 싶다. 책 소개를 보는 순간 바로 든 생각. 오랜만에 설정만을 보고 읽고 싶어진 소설이다. 남의 집 벽장 속에 숨어사는 여자라니. 게다가 실화라니, 오 읽고 싶다. 작가가 누군지 무슨 상을 받았는지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소설이 결국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만으로 읽고 싶어지는 소설을 만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가사키>는 내게 오랜만에 순수하게 이야기만으로 호기심을 갖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니 얼른 읽고 싶을 밖에.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이 책이야, 4월은 이 책과 함께라며, 잔뜩 호들갑을 떨려는데, 출간일이 4월로 되어 있다.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아직 3월인데 왜 4월이란 말인가. 지금 주문도 가능하구만. 어떤 분의 질문과 서평단 담당자의 친절한 답변을 보니 무조건 3월 신간만 가능하다던데. 아 아쉬워라. 너무 아쉬워서, 신간서평단이 처음이라는 핑계로, 짐짓 모르는 척 그냥 한번 소개해본다. 왜냐구? 그만큼 읽고 싶으니까. 물론 선정이 안되면 사서 읽으면 그만이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읽었으면 참 좋겠으니까. 그 정도로 마음에 꼭 들었으니까.  

미스터 피넛 (전2권) / 애덤 로스 / 현대문학 

아내의 죽음을 상상하고, 바라고, 실행에 옮기려는(혹은 이미 옮긴) 남자의 이야기. 이 역시 설정에 강력하게 이끌린 소설이다. 나는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쪽이고, 그렇기에 소설은 쉽게 읽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비정상적이다 싶을 만큼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선명하고, 순수문학에 비해 장르문학이 무시당하는 우리 문학계의 현실이 나는 아쉽다 못해 걱정스럽다. 왜 순수문학은 쉽고 재미있으면 안되는 것인지, 자의식을 내보이거나 묵직한 메시지가 없으면 왜 소설취급을 못 받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처럼 매체간의 교류가 활발하고 원형으로써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소유한 나라가 콘텐츠 강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 문학계가 가진 지나친 엄숙함과 폐쇄성은 그리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우려는 이렇게 <미스터 피넛>같은 작품을 만났을 때 더욱 더 커진다. 미국이나 일본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며 이렇게나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우린 뭘하고 있나 싶어지는 것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미스터 피넛>이 더도 덜도 말고 <시간 여행자의 아내> 처럼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슬기롭게 허문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이 작품을 감명 깊게 읽은 젊은 세대들이 얼른 자라, 우리 문학계에도 이러한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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