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김홍모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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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함께 용감하게 살아가고 또 무너지고, 그래도 함께 일어서려 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지지하는 다른 삶들도 담겼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주신다면 아픔의 결을 벗기고 삶의 결을 더하는 일을 더 꿈꿀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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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여름
엠마뉘엘 르파주, 프랑수아 르파주 지음, 박홍진 옮김 / 길찾기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르파주다운 이야기. 처음 읽을 때는 그림에 빠져버려서 잡히지 않던 생각들이 읽을수록 명료해진다. 인간에 대한 치열한 애정이 가득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애정이라 더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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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유령 - 어른들을 위한 영국의 동화
로버트 헌터 지음, 맹슬기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부터 색감에 홀렸다. 한 번은 빠져들어 읽고 두 번은 서성이며 맴돌았다. 알고 보니 새내기 출판사의 첫 책이다. 보는 사람이 다 뿌듯한 출사표다. 유령도 출판사도 첫 임무를 멋드러지게 마쳤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감각과 이야기로. `새롭다`는 말을 쓸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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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만 이번엔 예외적으로 데스크에서 잡은 제목으로 둡니다. 잘 붙였거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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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대한 ‘규제’는 답이 아니다 - <시티헌터>



 



요즘 만화 세미나를 즐겁게 진행하고 있다. 함께 다양한 만화를 읽고 각 작품의 의미를 새기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다. <말과활>을 펴내고 있는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시간과 장소를 내준 덕에 좋은 분들을 만나기도 했거니와,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로 글감까지 얻고 있으니 나로서는 이런 호사가 없다.



지난주에는 쉬어갈 겸해서 추억의 만화를 읽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 나름의 의도는 만화를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되새겨 보자는 거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대중문화를 통한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을 검토해본 셈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슬램덩크>와 <시티헌터>를 다시 읽었다. 사실 <슬램덩크>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티헌터>는 첫 두 권밖에는 읽지 못했지만, 고백하자면 그 두 권을 읽는 것마저도 상당히 비위가 거슬렸다. 첫 만남의 강렬한 기억에 기대어 다시 펴들었음에도 이내 눈살을 찌푸렸던 것은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티헌터>(호조 츠카사 작, 1990년 완결)를 처음 만난 건 199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던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작은 연쇄점을 운영했는데, 실상은 ‘아무거나 상점’에 가까워서 오뎅과 호두과자도 있었고 라면도 조리해서 내놓곤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500원짜리 해적판 만화를 진열해 두고 판매했다는 거다. 손바닥 크기 장정의 해적판 일본 만화 신간이 배달되면 스포츠신문 매대 옆에 비치된 서너 칸짜리 작은 책장에 채워졌다. 단, 내 손에서 하루를 거친 후에. 나는 이 작은 만화방의 첫 독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집어들던 만화가 바로 <시티헌터>였다. 당시만 해도 이름이 ‘우수한’이던 주인공 사에바 료의 매력에 나는 푹 빠져 있었다. 료는 사립탐정이자 악한에 한해 청부살인도 하는 프로 헌터인데, 사실 내게는 그의 뛰어난 실력보다 다른 면이 더 흥미로웠다. 열 살을 갓 넘긴 남자아이가 이해하기엔 낯설었던 료의 ‘밝힘증’이 그것이다. 성에 대한 지식은 고사하고 아예 개념마저도 없던 어린 나에게 료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시각성/접촉성 발기 현상’과 여성을 대하는 ‘거침없는 태도’는 너무나 새로웠다. 당시 우리 또래가 쓰던 말로는 ‘변태’요 지금 말로는 ‘마초’이자 ‘성추행범’에 해당할 료는 어린 내게 만화적 과장을 통해 (왜곡된) ‘남자 어른의 세계’를 가르쳐준 교사였던 셈이다. ‘성’을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으로 배우기 전에 달리 이해할 기회를 <시티헌터> 덕에 얻었다는 점만큼은 쾌거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남성성을 과시하는 장면들을 보는 일이 썩 불쾌했다. 하물며 여성이 대부분인 세미나 자리에서 그 얘기를 추억이랍시고 내놓을 요량으로 다시 읽었으니, 생각과 말을 고르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했다. 허나 그 덕에 다시 짚어볼 만한 기억의 조각을 몇 점 건질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물론 매우 부족한 것이지만) 성적 차이(gender difference)에 대한 배움이다. 성추행이 분명한 료의 행동에 당황하고 화내면서 ‘10t’이라고 적힌 망치로 그를 내리치는 여성 파트너 카미무라 카오리(당시 이름은 ‘사우리’)의 반응을 다시 보자니, 어린 나였다곤 해도 성차를 이해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지상태의 내가 여전히 성을 터부시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던 90년대 초 일반 사회의 인식을 접하기에 앞서, 자연스러운 것이면서도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남성성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료의 행동이 만화 속에서는 아무리 유쾌해도 여성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 역시 눈치챘을 테고 말이다. 보다 명확한 기억도 있다. <시티헌터>는 여성 인물을 성적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존재이자 남성의 불완전한 파트너로도 그렸는데, 이것이 어린 시절의 내가 여성을 대하는 시선과 행동에 선명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 나이 어린 여동생을 윽박지르기 일쑤에 심지어는 손찌검을 하기도 했던 내가 동생을 ‘보호하고 아끼기’ 시작했던 것이. 엄청 나쁜 놈에서 일반적인 나쁜 놈으로 조금은 성장했다고나 할까.


결이 조금 다른 하나는 료에게서 받은 윤리적 영향이다. 료와 카오리가 버스에서 강도를 퇴치하는 에피소드에서 오래된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버스에는 유치원생 아이들도 타고 있었는데, 료와 카오리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남자 둘이 버스에 오른다. ‘프로’답게 료는 그들이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친다. 결국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겁박하고 금품을 갈취하려는 그들을 료와 카오리가 퇴치한다. 후에 카오리가 왜 그냥 내리지 않았냐고 묻자 료가 답한다. “그 귀여운 개구쟁이들을 두고 어떻게 내리냐?” 이 장면은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내게 정의감이 끓어올랐던 건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신의 일을 잠시 접어두는’ 료의 모습이 ‘멋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멋있으니’ 따라 하고 싶었고 그 후로 그런 식의 이타적 태도를 꽤 오래 견지하며 살았다는 건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이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사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때문이다. 2012년에 일부 웹툰을 ‘폭력성’을 빌미로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려다 철회한 해프닝을 그사이 잊었는지, 이번에는 온라인 웹툰사이트 레진코믹스의 ‘음란성 콘텐츠’를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강압적) 자율규제’로 일단락이 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규제적 접근’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방심위의 부적절한 처사에 대해서 여러 방향의 비판이 있어 왔고 대체로 다 적절하지만, 그간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논점 하나가 있다. 그걸 짚기 위해 지금껏 재미있는 <슬램덩크> 대신 굳이 ‘폭력적이고 음란한’ <시티헌터>를 놓고 이야기한 거다.



(2012년 독자와 작가가 함께 참여한 노컷툰 릴레이)




요컨대 방심위는 ‘폭력적인/음란한’ 만화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면서 동시에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폭력성’과 ‘음란성’이 설령 다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 작품의 부분적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다. 매체보다 더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닌 것은 가족이나 또래집단, 직장 등의 주변 환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폭력성’과 ‘음란성’의 긍정적 영향도 따질 수 있다. 폭력과 외설을 상상 속에서 경유할 때에야 더 적실하게 얻게 되는 성찰이 있다는 것을 방심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폭력과 외설로 점철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작품의 전체적 영향력에 대한 과소평가를 통해 작품의 다양한 독해 가능성이 몰각된다. 이는 곧 독자에 대한 과소평가이기도 하다.


성인만화 <시티헌터>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이가 성인이 되어 그 만화를 다시 읽으며 느낀 양가적 감상을 솔직하게 늘어놓은 것은 방심위의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서다. 이런 감상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려면 그 만화를 본 경험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 ‘타율 규제’든 ‘자율 규제’든 문화에 대한 규제는 답이 아니다. 기실 그간 규제가 침해해온 것은 만화가와 사업자의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다. 독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하며 넘어설 부정성을 규제로 막고,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하며 발견할 긍정성을 규제로 막은 것이 방심위와 같은 기관이 여태껏 해온 일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크게는 97년에 그들이 만화를 마녀사냥하면서 독자들의 ‘눈’을 뽑아버렸던 것이 토론 없고 성찰 없는 만화 읽기 문화를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규제’가 전면에 나설 때 침해되는 것은 독자와 시민사회의 자유다. 독자의 ‘표현물에 대한 감상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표현물에 대한 토론의 자유’, 이 두 자유를 침해하는 규제는 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자유로운 감상과 토론을 통해 작품과 그 영향을 바라볼 만큼 성장한 ‘눈’을 가진 독자들이 방심위보다 큰 힘을 발휘할 때에 만화가와 사업자의 ‘표현의 자유’도 더 책임 있는 형태가 될 수 있다. 다른 답을 찾고 기대할 권리가 우리들 독자에게 있다.


2015.5.1 송고

2015.5.12 <주간경향> 1125호






  



P.S. 1년 전 글이지만 서재에선 발행도 안했었고 안타깝게도 YES-CUT(25일 현재는 NO-SHIELD)을 외치는 독자들이 등장한 마당이라, 다시 짚어봤습니다. 최근의 맥락과 관련해서는 새 글을 준비 중입니다. <주간경향> 출간 일정상 상황이 어느정도 조용해진 후에나 글이 나오긴 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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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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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랑을 말하는 만화들


최근 한 온라인 서점[아시겠지만, 알라딘입니다]에서 여성, 젠더, 성폭력, 성추행 관련 도서” 50종을 선정해 둔 것을 보았다. 그 중 만화는 몇 권이나 있을까 살펴보니, 딱 세 권이 있었다. 아쉬운 비율이었지만 마침 모두 읽었고 곧 소개하려고 벼르던 책들이었다.



 

첫 책은 <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맹슬기 옮김, 푸른지식, 2016)이다. 프랑스 만화가 토마 마티외가 인터넷에서 연재한 만화 중 일부를 묶었다. 프로젝트 이름을 악어로 명명한 것은 이 작품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과 관계있다. 만화 속에서 모든 남성이 연녹색 악어로 표현된다. 달리 말해 만화 속에서 인간으로 그려진 건 죄다 여성이다. ‘여자만 인간이고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악어라니!’ 남자들의 불쾌한 반응이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사실 나도 불쾌했다. ‘왜 남자만 악어로 그린 거야!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지 끝까지 읽어주겠다!’ 이게 내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작가의 의도는 남자들의 불쾌너머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나처럼 오기를 부리든, 더 그럴싸한 이유를 찾든 끝까지 읽어보길 권한다.




끝까지 읽으며 다다를 수 있었던 불쾌너머에서 나는 공감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질문이 생기기도 했고 다시금 불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불쾌 너머에서 만나는 불쾌함은 처음의 불쾌와는 꽤나 다른 것이었다. <악어 프로젝트> 속에 그려진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여성이 당한 성폭력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단순히 악어로 그려졌을 뿐이지만, 그림 속의 여자들은 모두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불쾌함을 경험했단 걸, 그림으로 그려진 그녀들의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길을 걷던 한 여성의 얼굴이 길거리 성추행 이후 어떻게 눈물범벅이 되는지를, 무척 절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현실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그 현실을 주로 남성이 만들었단 것 역시도.




그러니 남자들이야말로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 이 얘기도 빼놓으면 안 되겠다. 이 책의 일부를 얇게 재편집한 소책자 <일상 성폭력 꼼꼼 대응 가이드북>을 무료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을 구입하면 인쇄된 가이드북을 받을 수 있다. 가이드북도 무척 잘 정리되어 있으니, 책은 누가 사든 여남소노 할 것 없이 나눠 보고 가이드북은 가까운 여성 지인에게 선물해도 좋을 듯하다. 불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프로젝트 홈페이지(projetcrocodiles.tumblr.com)에서 책에 실리지 않은 에피소드도 시도해볼만 하다.



   


 

<악어 프로젝트>가 프랑스 젠더 현실을 도발적으로 다루었다면,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하겠어?>(박희정 지음, 길찾기, 2012)는 한국의 젠더 현실을 성희롱을 키워드로 하여 꼼꼼히 짚어낸 책이다. 4년 전부터 이곳저곳 추천하던 책이건만, 이번에 다시 읽으니 완전히 새로웠다. 작년 무렵부터 문제제기가 불붙기 시작해 올해는 더욱 첨예한 논제가 된 여성혐오와 그것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과거를 통해 복습한 기분이랄까. 성희롱 발언을 사과하라는 요구에 왜 내가 사과해야 되지? 나에게도 표현할 자유가 있지 않나?”라 대답하는 남성의 말이 너무나 익숙했다. 또 성희롱 예방교육에 참가한 남성들이 한다는 항의가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남성들의 목소리와 어찌나 똑같던지. 아래는 모두 이 책에서 발췌한 대사다.


남자들을 모두 잠재적인 성희롱 가해자로 몰고 있는 거 아닙니까?” / “남자를 너무 죄인 취급하는 것 같아요.” / “난 성희롱을 하지도 않았는데 비난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 “남자라는 이유로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은 피해의식 아닌가요?”



 

이런 복습을 통해 젠더 불평등을 드러내는 표현들 그 자체보다는, 뭇 남성들의 한결같은 반응이 훨씬 더 문제란 걸 깊이 자각할 수 있었던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복습만큼이나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것은, 이 책이 담은 반성희롱 운동의 성과와 최근 여성들의 반여성혐오 실천의 성과를 감히 남성인 나도 나름대로 연결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여성주의 운동이 ‘(직장내) 성희롱을 법정 용어로 명문화하도록 싸우는 등 다져낸 기반 덕에 사회의 현실과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뀌었고, 그 바탕 위에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여성들의 여러 실천이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데이트폭력 같이 가려져 있던 의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소라넷을 폐지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트는 등 지금 여성들이 살아갈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실천은 과거의 실천과 더불어, 다른 방식의 성과로써 분명한 의미가 있다.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의 또 다른 미덕은 직장생활에서 겪는 차별을 성차와 계급 모두의 구조적/사회적/문화적 문제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고 얽혀 있는 것들을 잘 분간하여 함께 설명하는 것이다. 정규직 여성보다 비정규직 여성이 당하는 성희롱 피해가 더 다양하고 노골적임을 통계 자료와 함께 짚어낸 것이 한 예다. 좋은 논문 여러 편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실제 에피소드를 풍성하게 삽입하여 쉽게 이해되니, 거의 단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굳이 하나 꼽자면, 젠더 현실의 일부만을 풍자한 제목이 작품의 너른 의의를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란 점 정도? 어떤 면에선 출간 시점보다 지금에 더 어울리는, 앞으로도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마지막 책은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레드 로자>. (케이트 에번스 지음, 박경선 옮김, 산처럼, 2016) 앞선 두 책이 현대 프랑스와 한국의 유사한 젠더 현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포착했다면, <레드 로자>100년도 더 넘는 과거 유럽의 젠더 현실을 군데군데 담고 있다. 로자에게 숙녀를 기대한 어머니에 대한 묘사나, 여성의 대학 교육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에 대한 서술, 그녀가 죽을 때까지 여성에겐 투표권이 전혀 없던 상황 등이 그렇다. 하지만 젠더 문제가 작품이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사실 로자는 19세기 중후반을 살아가기에 힘겨울법한 온갖 소수자성을 한 몸에 안은 인물이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당시에는 사라진 나라 폴란드 출신이었다. 게다가 당대 온 유럽에서 질시 당하던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핵심 이론가로 활약했으며 당대의 적대 세력에게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후 10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읽히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손꼽힌다. 100년 전 여성에게는 더 어려웠을 현실을, 다른 모든 소수자성을 끌어안은 채로 저처럼 당당히 살아낸 연원이 궁금한 이유다. 짐작에 도움을 줄만한 단서는 이 책 군데군데에서도 발견되고, 34페이지에 이르는 주석을 통해 더 찾아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 만화는 한국 만화 출판 역사를 통틀어도 희귀한 축에 속할, ‘여성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담긴 논픽션들이다. 또 지난한 공부와 생각의 흔적이 가득한 노작이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 만화들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담겨 있다. 세 작품은 꾸준히 인간을 신뢰하며 말을 건다. 자기갱신을, 연대를, 가장 정확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 혹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 책들에선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들의 사랑이야말로 진짜배기다. 때론 날이 서있고, 눈물을 머금었으며, 매섭고 두렵고 어렵다. 그리고 함께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한 무대 위에 함께 존재하며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걸 이 세 만화는 좀처럼 잊지 않는다. 그러니 무대의 독점을 포기한 용감한 당신이라면, 이제는 함께 있기 위해 공부해야 할 때다. 이 책들은 분명 좋은 출발이다.





2016.6.16 송고

2016.6.28 <주간경향> 1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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