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삼, <쌉니다천리마마트>

1~4권(미완-연재 중), 미우



풍자만화의 새 지평을 연 김규삼의 네이버 웹툰 <쌉니다천리마마트>가 단행본으로 나왔다대형마트를 다룬 만화가 이렇게 재미날 수 있다니! 그것도 사업체 내 연애와 승진을 위한 악다구니를 그리는 게 아니라 마트가 그 자체로 품고 있는 정치-사회-경제적 부조리를 웃음으로 비틀고 메치며 웃긴다또 이 시대의 젊은 감수성과 잉여의 언어코드를 실시간으로 소화한 다양한 패러디가 매장 곳곳에서 펼쳐진다씁쓸한 현실을 계속해서 참고하며 웃음을 발명해내는 이 저렴하고도 엄청난’ 천리마마트 경영 원칙의 현실 도입이 시급하다


이를 위한 우리의 구호!


하나, 전국의 대형마트는 정복동식 경영을 실천하라

하나, 단행본을 대량매입한 후 마트 서점코너에서 반액대매출하고 직원교육 교재로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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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12694&seq=1&weekday=fri


(원래 <싱크> 10호 싱크만화경 코너에서 소개했는데 그 내용을 약간 수정해 블로그에서도 소개합니다.)



원글 링크: http://blog.naver.com/808thirty/11014733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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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런 '프레이' 1 나이트런 '프레이' 1
박성규 지음, 김성민 원작 / 길찾기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 폭력, 사랑.

 

1.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대해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리라. 2012315일 오늘은 한미 FTA가 발효된 날이며,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구럼비 바위가 발파된 지 9일째 되는 날이다. 또 일부 웹툰에 대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안내라는 긴 이름의 공문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공지된 지 38일째다.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는 1547일째, 4대강 사업이 첫 삽을 뜬지는 857일째. 이명박 대통령 가카의 임기 종료까지 345일이 남은 현재 굵직굵직한 갈등 중 극히 일부만 모아도 이 정도다. FTA 발효를 맞아 강정을 염려하며 방심위의 웹툰 유해물 지정에 대해 고찰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 문제 뒤에 또 문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득달같이 추가되는 새로운 문제. 아아하아아...”

 

이처럼 너무 많은 사안 가운데 살며 쓰다 보니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 이 모든 사안의 핵심은 폭력이다. 이 핵심 단어에 수식어를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공적 폭력, 국가적 폭력, 자본의 폭력, 제도적 폭력, 제국주의적 폭력. 조금 더 자세히 대상관계를 밝히면 이렇게도 쓸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폭력, 문화예술에 대한 폭력, 인권에 대한 폭력, 자연에 대한 폭력, 지역에 대한 폭력, 전 국민에 대한 폭력.

 

그런데 이 글의 가장 주요한 사안인 방심위의 유해 웹툰 지정은 무려 폭력 예방을 위한 조치였다. 그들이 말하는 예방되어야 할 폭력은 학교폭력이다. 이 합성어를 마주하며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체벌과 구타가 떠오르는 이도 있을 것이나, 방심위의 이목은 그것을 향해 있지 않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23편의 웹툰이, 그 폭력의 유발자로 지적되었다. 졸지에 잠재적 폭력 유발자가 되어버린 웹툰 작가들은 이를 웹툰에 대한 폭력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작가 노컷툰 릴레이 중 억수씨>

 

웹툰 작가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논자들과 독자들이 그 반발에 함께하고 있다. 노컷툰 블로그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담긴 만화가 연이어 게시되었으며, 또한 만화를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방심위의 조치에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여 만화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러한 그림과 글을 살펴보면 만화계가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만화계는 1997년에 청소년 보호법에 크게 당했던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웹툰 작가들을 포함한 만화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역량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방심위는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가 훨씬 큰 판이다.

 

<독자 노컷툰>


방심위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심성을 보호하여 부모님 마음을 안심시켜보려던 방심위의 행동에 부모님이 안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이 제대로 뿔이 난 것만은 확실하다. 오호 통재라, 방심위가 학교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한 청소년, 고교 학생들이 노컷툰 블로그에 방심위의 결정에 반대하는 배너를 달고 있는 것이다.(<독자 노컷툰>) 이처럼 방심위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말을 보태려니 어르신들이 약간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이 분들은 사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폭력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여, 이미 많은 작가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조치 자체의 문제점은 생략하도록 하자. (노컷툰 블로그에 가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되려 그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그 분들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곡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 나는 방심위의 결정이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정권 말기나 선거철에 으레 등장하는 어떠한 정치적 술수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라고 보지 않으려 한다. 조선일보가 웹툰을 학교 폭력 유발매체로 지목한 데다 동급생들에게 폭력을 당하다 못해 자살한 청소년의 사연이 언론에 회자되어 여론이 들끓는 마당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을 누셨던게 아니라고 보려 한다. (만약 그런 거였다 해도 이거 웬걸 발이 녹기는커녕 오줌줄기가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언 발 위에 떨어져버린 모양새니 측은하지 않은가.)

 

방심위는, 정말로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 그들의 조치는 사랑에서 출발한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사랑의 표현인 이 조치가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치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 볼 수 있다. 혹은, 조치가 없을 때 얻어질 결과를 상상하여 조치로 인해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사실상 이 두 가지 방법은 초점만 명확히 한다면 동일한 것으로, 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초점은 만화 속의 폭력이다. 더 명확하게는, ‘만화 속의 폭력이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을 심히 사랑하는 방심위가 만화계에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2.


폭력을 유발하는 웹툰을 금하려는 방심위의 사랑은 웹툰을 포함한 대중매체에 그려진 가상적인 폭력을 접한 청소년 독자가 현실 속에서 폭력을 저지를 공산이 높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이 가설은 꽤나 많은 연구를 통해 검토되었으나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은,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 이와 함께 논의되는 다른 가설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대중매체 속의 폭력과 향유자의 폭력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히려 가상적 폭력이 향유자의 잠재된 폭력성을 대리 충족하여 현실 속에서는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 국내에서 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대중매체의 폭력이 청소년의 폭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다. 아마도 방심위 분들도 그 연구들을 근거로 하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설문을 통한 통계학적 연구가 주종을 이루는 폭력적 매체와 폭력적 행동의 연관성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설문 문항이 유도심문처럼 구성되어 폭력적 영향을 시인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필자가 확인한 논문들은 주로 TV나 게임의 영향에 관한 것이었는데, 질문 문항은 대개 다음과 같다.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처럼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변자는 이에 전혀 아니다에서부터 매우 그렇다까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심지어 아니다는 하나만 주고 그렇다앞에 조금’, ‘매우등을 붙여 구성된 선택지도 있었다.) 답변을 하는 입장에서는 질문에 매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게 통계를 내 보면 당연하게도 게임을 많이 한 집단의 답이 그렇다쪽에 더 많이 분포될 수밖에 없다. 게임 경험이 많은 만큼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며, 그러다보면 여러 생각 중 하나로 폭력적인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역시도 게임 경험이 많은 향유자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듯이 실제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은 게임에서처럼 내 삶의 레벨을 높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둘 다 매우 그렇다인데 말이다.

 

위와 같은 연구가 설문조사였던 데 반해, 실제 범죄 행위 통계를 통해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간의 영향관계를 조사한 예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이 군사정권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연출이 포함된 TV 애니메이션의 방영을 금지했다. 809월을 기준점으로 그 이전까지 방영되었던 TV 애니메이션 중 요술공주 새리와 같은 작품만 남고 마징가’, ‘그랜다이저’, ‘독수리 오형제등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정책은 1985년 어간까지 시행되었으며, 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것은 1970년부터이니 이 시기들에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대조해보면 그 정책의 유효성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에는 DVD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비디오(VCR)로 시청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으니, TV 애니메이션이란 단일 변인의 효과를 검토하기에 상당히 변별력 있는 분석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의 결론은 방심위 어른들께는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경찰청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 청소년 범죄는 폭력적 애니메이션 금지기에 오히려 증가했다. 금지 이전 시기의 청소년 범죄 증가추세가 금지 이후의 증가추세와 거의 동일하므로, 폭력적 애니메이션의 금지가 더 많은 범죄를 불러왔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정책의 효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충분히 타당하다. 세부적으로 볼 때, 단순 폭행보다 죄질이 높은 상해죄의 비율이 높아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최성락 외, 폭력성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 만화애니메이션연구』,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08.)

 

물론 학술적 연구 결과는 제한된 데이터에 의존해 도출된 것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대한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 이번 방심위의 조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폭력유발자웹툰을 금지하려 하셨던 방심위에게는 안타깝지만, 웹툰의 가상적 폭력과 청소년의 실제 폭력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관련한 우리의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 웹툰 속의 폭력은 폭력적 영향만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력을 그린 웹툰을 통해 폭력성만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방심위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생각의 소산일 것이다. 방심위가 폭력을 그리는 웹툰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게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는, 그려진 폭력에 청소년들이 얻게 될 모든 것들로부터의 보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만화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이다. 폭력적 웹툰이 검열당하고 1997년과 같은 자체검열의 역사가 반복되게 되면 바로 그 의미가 사라질 것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물론 이 질문은 쉽게 대답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이 아니다. 허나, 구체적인 작품을 경유할 때에 그 작품에 해당하는 답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답은 만화 전체에 던진 동일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될 수 있을 테니, 한 작품을 통해 물어보자. 이를 위해 이 글은 (산 말고) 우주로 간다. 그리고 방심위의 사랑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잃어야 할 어떤 가치가, 웹툰의 폭력에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3.


방심위가 지정 예고한 유해 웹툰 중 하나인 김성민 작가의 나이트런은 확실히 폭력적이다. 적어도 방심위의 폭력이 피가 낭자하는 잔인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나이트런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게다가 포털사이트와 작가의 협의에 의해 18세 이상 구독 가능하게 설정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나이트런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청소년의 폭력성을 고심하는 방심위에게는 안성맞춤의 타겟이었을 것이다. (18세 이상 구독 가능한 웹툰까지도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 예고한 코미디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성토하고 있으므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괴수의 전쟁을 그린 SF 대서사극 나이트런은 폭력적이므로 유해한가? 우리는 나이트런에서 폭력적이라는 것과 유해하다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이런 질문도 답이 안 나오긴 매한가지이므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이트런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이를 조금 더 연장해서, “‘나이트런이 폭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가?”까지도 물어보자.

 

지금까지 연재된 나이트런의 분량은 상당한 편이다. 아마도 이 만화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시리즈나 1986년부터 시작해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나가노 마모루) 정도로 길어질 듯하다. 내용과 설정도 이런 걸작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헌데, 이런 작품들보다 나이트런은 확실히 잔인하다.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정도의 피가 튀는데다 죽어나가고 잘려나가는 신체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 괴수의 공격에 의해 수억 명의 인간이 몰살당하고 행성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별이 되고 말았다는 우주 속 인류의 역사가 만화 속에서 그려진다.

 

<그림 1>

 

<그림 2-1>

 

그러나 한 도시가 파괴당하는 익명의 죽음들을 담은 컷(<그림 1>)보다 독자에게 더 잔인하게 느껴질 것은 구체적인 전투와 죽음의 순간이 묘사된 컷들이다. 누나를 구하러 달려오던 동생의 팔이 괴수에 의해 잘리는 장면(<그림2-1>)은 생생하게 잔인하다. 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할 수도 있다. 또 방심위처럼 우려하시는 어른의 눈에는 유해하게까지 보일지 모른다. 칼로 신체를 베는 모방범죄를 걱정하실런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전혀 그럴 리 없어 보이지만. 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널렸다. <그림 3>의 잘려나간 수족들을 보라. 이는 괴수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싸움을 그린 장면이다. 이 도륙을 몸소 행한 은 되도록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려 관대하게도 수족만을 벤 것이지만, 잘려 날아다니는 신체를 보는 것은 여전히 처절하게 잔인하며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함에 압도되어 앞서 우리가 물으려 했던 것을 잊지 말자. 아니, 그 압도가 주는 감각에서부터 출발해 물어보자. 이러한 장면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폭력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의미가 과연 여기에 있는가? <그림 1><그림 2, 3>들의 대비를 통해 이에 답할 수 있다. 도심의 폭파를 그린 <그림 1>은 분명 다른 그림들보다 더 많은 인명의 살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이 상상할 수 있으나, 그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조명되지 않은 까닭에 그것을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지각할 수는 없다. 폭파되는 것은 건물이지 죽어나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 미국과는 물리적 거리가 먼 우리에게, 9.11의 이미지가 테러 당한 무역센터와 솟아오르는 연기로 기억될 뿐, 사람의 눈물과 절규와 참혹한 주검의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묘사된 폭력 앞에서 우리는 그만큼 가깝게 폭력을 느낀다. 폭력의 힘을, 폭력의 인과를 더 실감나게 깨닫는다. 동생의 팔이 잘리는 비극을 눈앞에서 본 누나의 감정 상태에 공명하게 된다.(<그림 2-2>) 이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이며 생생한 폭력의 이미지다.


<그림 2-2>


그림 <2-3>


이런 점에서 <그림 2, 3>에 동일하게 채택된 검이라는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더 상세히 설명되어야 한다버튼 하나만 누르면 대량 살상이 가능한 시대에방아쇠만 당기면 한 목숨을 빼앗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우리는 이 웹툰을 통해 손가락이 아닌 온 몸으로 행하는 폭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원거리의 여러 사람들을 버튼으로 살상하는 것보다, 주먹으로 칼로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폭력을 가하는 그 순간의 표정이, 튀는 피가, 단말마의 비명이, 빠져나가는 생명이 지각된다. 온 몸으로 행할 때 폭력은 힘겹다. 가까운 대상과 주고받는 폭력은 어렵다. ‘이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며 속으로 하는 생각들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 지키고픈 대상을 구하기 위한 길에서 다른 대상을 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을 짓누른다. 보통 아버지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베트남전에서, 5.18에 방아쇠를 당겼던 기억과 닿아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이 폭력적 묘사이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억을 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더 큰 폭력은 더 큰 사랑이라는 듯이 그려지는 비극이 이 장면에 새겨져 있다. 덜 잔인하게 묘사되었더라면, 덜 생생하게 느꼈을 고통의 감각이 여기 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3>

 

따라서, ‘나이트런의 폭력적 장면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폭력으로 잃게 될 것과 폭력이 낳는 잔혹한 경과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 폭력적 상황 자체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핵을 맞아 죽어간 히로시마 사람들에 대한, 고문당한 민주 열사에 대한, 내가 지키지 않으면 폭력 상황 속에 놓일지도 모를 내 친구에 대한 사랑의 작용이다. ‘잔인하다는 즉물적 감상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는 독자도 있을 것이나, 이는 오히려 잔인한 것을 잔인하다는 이유 하나로 배격하는 어르신들의 빗나간 사랑의 교육 때문이다. 서사와 그림 속에서 잘 표현된 폭력이라면 독자는 그 가상의 폭력에서 의미를 충분히 포착해 낼 수 있다. 특히 나이트런은 폭력을 통해 비폭력을 꿈꾸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모방하기에 너무 잔혹한, 도저히 모방할 수도 없으며 모방하고 싶지도 않은 폭력은 방심위의 우려와 달리 폭력적으로 무해하며, 폭력적으로 유의미하다.

 

방심위의 조치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앗아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이다. 이 의미를 그릴 수 없게 될지 모르는 웹툰 작가들에게도 그것은 폭력이다. 그런 사랑을 거부함으로써만 만날 수 있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다.

 


 

4.


처음 나열했던 여러 폭력들과 나이트런의 생생한 폭력은 명확한 차이를 지닌다. ‘나이트런이 폭력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폭력을 가하는 자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한미 FTA와 해군기지의 폭력에서는 폭력을 당한 자들의 아픔만이 표현된다. 여기에 가해자는 은폐되어 있다. 방심위 역시도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했고 웹툰 작가들은 그 가해자 없는 폭력에 아프다. 그러나 나이트런의 인물들, 특히 은 폭력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폭력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깊이 자각하고 스스로를 정의와는 거리가 먼 나쁜 놈으로 인식한다. 그것이 사랑과 닿아있는 것일지라도, 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많은 폭력들, 특히 국가적 폭력은 국익을 위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보호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때리는 자는 스스로 때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맞는 자들만 울부짖고 있다. 이런 문제적 상황 속에서 나는, 웹툰을 통해 청소년들이 접하게 될 폭력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걱정되는 것은 사랑을 내세운 어른들의 폭력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배울까봐 두려운 그들의 허울 좋은 사랑에, 나는 지금도 괴롭다.

 

- 제주도 강정에서

 



싱크 8호에 기고한 글.

싱크 SYNC 8호 - 10점
싱크 편집부 엮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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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와 용산과 강정 그리고 재현그 사이 어딘가.


 

1. 강정

 

(전략) 무인도인 범섬과 제주월드컵경기장, 한라산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강정마을은 600여 가구에 1900여 명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

이 지역 주민들은 해군기지 논란을 지켜보다가 지난달 26일 마을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

-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수용>,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7-05-15 03:01:00 기사수정 2009-09-27 08:27:39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건설지역으로 결정된 5년 전 그 날 동아일보가 실은 기사를 보면 지금 강정마을을 뒤덮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깃발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을 총회를 거쳐,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면서 왜 뒤늦게 반대를 외치는가? 이런 의문은 위 기사와 현재의 상황 사이의 모순을 감안할 때 분명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 합리적 의문은 전문시위꾼이라고도 불리는 시민단체’, 혹은 종북좌파세력의 공작에 의해 주민 일부가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거나, 더 심하게는 주민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데 육지에서 날아들어온 외부세력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해소된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지식인 서비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림1> 박건웅, <안보입니까?> 중 한 컷. http://ppuu21.khan.kr/146

  

그런데 <그림 1>은 이 만장일치” “마을 총회를 달리 그리고 있다. 만화는 마을 총회가 아닌 마을회의라 표현하며, 마을회의“80여명만이모여서 “2시간 만에 졸속으로 결정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음표를 머리 위로 띄운 마을회의건물 밖 사람들도 그렸다. 이 그림과 동아일보기사 사이에 꽤나 큰 거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사실관계로만 따지면 둘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동아일보가 말했듯 마을 총회는 열렸고, 그 회의 결과가 해군기지의 유치를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것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다. 단지 그 회의에 모여 만장일치로 결의한 사람의 수가 “1900여 명가운데 단 “80여명만이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림 1>이 추가적으로 제공한 정보로 인해 “80여명만만장일치가 되면서 강정마을 전체가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했다는 의미는 거부되고 만다. 마을 전체의 민의가 아닌 일부의 민의만이 반영된 결정이었음이 폭로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 1>동아일보가 아닌 다른 자료들에서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향약은 주민총회를 하려면 7일간 공고를 하도록 정하고 있으나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총회는 고작 4일간만 공고를 했다거나(그러니 마을 가 아닌 마을회의인 것), 수시로 하게 되어 있는 안내방송도 몇 차례 하지 않았다거나, 공고된 총회의 내용도 해군기지 관련 건이었다가 정작 회의 때는 해군기지 유치 건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제주에 해군기지가 결정됐다?>, 한겨레21664, 20070614) 이쯤 가면 동아일보마을 총라는 표현으로 담으려 했던 의미, 곧 절차적 정당성까지도 부정되고 만다.

 

이제 마을의 찬성이 마을 사람들 일부만의 찬성임이 드러나고 그 과정까지도 정당하지 못했음이 폭로되니, ‘뒤늦은 반대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제기할 수가 없다. 의문이 정당하지 않으므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었던 외부세력의 개입을 주장할 논리적 개연성도 사라진다. 이런 논리적 선후관계를 따질 필요도 없이 한겨레21기사의 내용을 주장한 인물이 마을 주민이니 외부세력운운은 기각될 수밖에 없지만.

 

 

2. 산리즈카

 

재현(re-present)된 것은, 재현되기 전의 실재(존재, presence)와 다른 무엇이 되고 만다. 문자든 그림이든,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이든 매체(medium)을 거치는 한 그 변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동아일보기사에서처럼 변이와 함께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재현 과정에서 삽입된다. 마치 영화 <라쇼몽>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처럼, 우리는 말하면서 왜곡한다. 따라서 만약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재현이 얼마나 실재에 가까운가를 확인하는 불가능한 작업이 아니라 재현()을 통해 실재에 최대한 근접하려 노력하는 심판관(<라쇼몽>의 마을 원님)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 재현들을 통해 강정마을의 회의에 담긴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했던 것처럼.

 

일본 산리즈카 마을의 공항건설 저지 투쟁을 담은 만화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길찾기)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담아낸 재현이다. 그 재현은 진실을 찾는 자에게 진실일 수 있는재현으로서 다가가기 위해 실재를 가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마을 이야기>는 실재와 재현의 차이를 계속해서 그려내는 재현 방식을 통해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권력관계가 뚜렷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림 2>는 재현이 어떻게 실재를 대하는가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소년 뎃페이는 마을 주민으로, 만화 속에서 실재로 가정된 인물이다. 만화 안에서만큼은 뎃페이와 마을주민들이 실재이자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뎃페이를 신문이 날아와 때린다. 그것도 입을 막으며 때린다. 실재의 발화를 막으며 실재의 현실을 재현하는 신문기사 제목은 통계적 수치와 분위기를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수치로만 존재하는 30%의 피폐한 삶과 반대 의지는 삭제한 체로, 현지 분위기가 호전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뎃페이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재현이다. 그에게 공항건설은 기정사실이 아니지만, 신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뎃페이는 그런 신문을 손에서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1-156~7)

 

<그림 3>에 이르면 실재와 재현 사이의 간극은 더 확연하게 벌어진다. 반대동맹은 공청회에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전했으며, 공청회 후 거리에서 반대 퍼레이드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문기사는 공청회가 무사히마쳤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 재현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재현 주체에 따라 無事에 담는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입장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지거나, 부상자가 나오는 일이 없으면 충분히 무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반대주민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버린 것 자체만으로도 무사한 일이 아니며, 공청회 전후의 반대활동과 대표의 반대발언이 모두 에 해당할 테지만 말이다. 이런 반대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청회가 무사히 끝났다는 신문의 재현은 17쪽에 걸쳐 그려진 주민들의 공청회 전후 사정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는 허탈하고 폭력적인 일이 되고 만다. 공청회 전에 반대주민들은 공청회를 기대하며 들떴고, 방청석에 반대동맹원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게 된 사실에 분개해 항의했지만, 이런 모든 주민들의 이야기도 재현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1-200)

 

(1-204쪽, 1-206쪽)


1권의 이런 에피소드처럼 마을주민들의 실재와 신문 속의 재현을 대비하는 장면들이 <우리마을 이야기>를 관통한다. 온도 차이는 있다. 초반에 실재와 재현의 간극에 분노하던 인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이용하기까지 한다. 요컨대 자신들이 재현당하는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현하려 노력한다. 마을신문을 만들고, 선전지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정들을 그려낸 <우리마을 이야기>는 그 자체가 재현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폭력성을 재현해내고 있다.

 

산리즈카와 강정은 폭력적인 재현의 피해자라는 면에서 40여 년의 시간과 지리상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까이 있다. 오히려 먼 것은 실재와 재현 사이의 거리이다. 196~70년대 산리즈카와 2천 년대 강정을 그린 동시대의 재현은 실재와 너무나 멀다. 언론의 보도는 시간적으로 사건과 가깝지만, 그 입장으로 인해 실재를 폭력적으로 재현하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정현 신부의 말대로, 산리즈카와 강정은 너무도 똑같다.” 재현의 폭력에 희생당한다는 면에서까지도.

 

 

너무도 똑같다.

이 만화에서 그려지는 산리즈카 마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나라 제주의 강정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너무도 닮았다. 아니다. 새만금과 부안 핵폐기장, 미군부대에 땅을 내준 평택 대추리에서 서울 용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에 의해 고통받았고 또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다. - 문정현 신부의 추천사 첫머리

 

  

3. 용산

 

<우리마을 이야기>의 재현 전략이 마을주민인 뎃페이를 중심으로 한 가정된 실재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마을주민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의 폭력적 재현을 비판하며 다른 재현을 도모하기 위해 취해진 선택이었다.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보리)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마을 이야기>처럼 신문의 재현을 주민들의 가정된 실재와 부딪히게 만들며 대비하는 방식보다는 그저 철거민들의 삶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실재를 가정하며 언론의 재현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달리 해 다른 재현을 펼치는 것이다. 크게 보아 이는 산리즈카 마을 농민들의 저항과 언론보도가 매우 긴 시간 동안 이어졌던 데 반해 용산 철거민들의 저항은 단지 용산사태로만 보도되었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25시간 동안 펼쳐졌고 순식간에 불타올라버렸던 2009120일의 용산사태 직후 재현된 언론보도는 대부분 남일당 망루를 배경으로 한 철거민들의 저항과 특공대의 진압, 그리고 그 모두를 종결시킨 화재 사건만을 다루었다. 반면 <내가 살던 용산>은 철거민 희생자 5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사건 앞뒤로 배치하며, 폭력적 재현을 재맥락화 했다.




재맥락화 한 용산 철거민들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진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 희생자들이 망루에 올랐는가하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희생자들이 철거민이 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낙차를 통해 그 사실의 배경이 드러나고, 그들이 철거민으로서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과 용역과 경찰력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물리적 폭력을 상세히 재현하는 것을 통해 그 불가피함이 설명된다. 언론이, 특히 보수언론이 사건만을 부각하며 외면하려 했던 삶을, <내가 살던 용산>은 용산에 살았던 사람들을 재현하는 것을 통해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던들 철거민 희생자들은 단지 대테러 임무를 주로 하는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한 테러리스트이며 폭력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재맥락화와 더불어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함께, 종결된 줄만 알았고 이미 모든 재현이 마무리된 것만 같았던 대상들의 사연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만화들은 언론보도로 인해 은폐되는 것으로 끝났을지 모를 국가와 사기업의 이미지와 탄압당한 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는 대안적 재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살던 용산>이 아니었던들, 국가 폭력은 그 가공할 위력을 뽐내며 보통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했을 테지만, 또 사기업의 용역 폭력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지만, 이 만화 덕에 국가 폭력의 부당성과 사기업 폭력의 치졸함이 부각되어 일반 사람들의 입방아를 탈 가능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서울인권영화제 폐막작이었으며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영화 <두개의 문>테러범으로 판결이 나버린 망루 위 철거민들과 대테러작전을 펼친 경찰특공대의 25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재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그와는 다른 재현을 제공하는 일이며, 재현물을 보는 독자들이 진실에 다가설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다.


<두 개의 문>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2_doors

 

 

4. 다시 강정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일단락이 나지 않은 강정은 여전히 폭력적 재현 아래 현재진행형이다. 강정에 대한 폭력적 재현의 주체들은, 심지어는 재현하지 않는 폭력까지도 일삼고 있다. 지금 강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는 비재현의 폭력은 강정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진행되어 온 시공사의 불법탈법과 용역의 광포, 공권력의 과잉진압 등을 은폐한다. 강정이 이슈가 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강정에 힘을 보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부터 차단한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강정 사람들은 사진과 SNS와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강정을 재현해내고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산리즈카가 시대적으로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용산이 공권력의 급작스러운 투입으로 인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대안을 강정은 누리고 시도하고 있다. 가능성은 열려있는 가운데, ‘만화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강정은 또 하나의 큰 가능성을 껴안고 있다. <우리마을 이야기><내가 살던 용산>이 모두 산리즈카와 용산에 연대한 작가들에 의해 뒤늦게 만화로 재현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강정의 만화적 가능성은 특별하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재현되었던 다른 두 지역과 달리 현재 많은 웹툰 작가들이 강정에 연대하고 있는 것(<그림 6, 7>(<"구럼비 발파 안돼", 만화가들도 화났다>, 머니투데이, 입력 : 2012.03.07 19:13)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도 물론 고무적이지만, 다른 엄청난 강점이 강정에는 있다.

 

<그림 6> 출처: 김한조씨 블로그(http://sanchokim.khan.kr/123)


<그림 7> 출처=강풀씨 트위터(@kangfull74)

 

 

 

바로 강정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만화가가 넷이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두 명은 이미 프로로 활동했던 만화가와 에니메이터이다. 이들, 고권일과 김민수는 그들이 직접 겪은 일을 각각 만화와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하니, 그들의 재현이 선사할 진실이 기대된다. 하루빨리 강정의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어, 투쟁하느라 만화 그릴 여력이 없는 강정 만화인들이 작품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정에 이미 한쪽 발을 들여놓은 나도, 그 날이 오면, 늘 재현당하기만 하던 실재들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즐거운 일을, 기꺼이 비평해 보리라.

  

 
 

 

 

 

 

 

 

 

 

 

 

 

 

 

























싱크 SYNC 9호 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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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힘없는 판타지


불의한 재벌을 국가()권력이 어떻게 비호하는지를... 눈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하나님 부처님 자연의 신이여 나에게 저 벽을 넘을 수 있는 초능력을....


2차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내려갔던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부산 영도에 강림한 닭장차형 명박산성 앞에서그것으로 상징되는 넘을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초능력을 바랐다힘없는 사람들이 불의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기댈 것은 결국 초()현실적 힘이다.


그래서 초현실적 세계나 현상을 담은 판타지 장르는 유난히 현실을 전복하려 한다. 거의 모든 판타지의 내러티브 속에는 바꾸고 싶은 현실과 그 현실을 바꿀 초현실적 힘이 들어서 있다. <홍길동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해리포터><엑스맨>, <반지의 제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초현실적 설정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재벌 3세 백화점 사장과 부모 잃은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몸이 바뀌는 기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뒤집어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서는 계급을 넘어선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높고 두터운 현실의 벽이다. 이처럼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판타지 이야기 속에는 초현실적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현실이 전제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판타지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날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도저히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날 공산은 없으니 이야기 속에서라도 기적을 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해보려는 것이 판타지의 시도다. 혹 판타지에 빠지는 것을 잉여나 오타쿠의 길이라 여겨 거부한다면 자기계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현실이야 어떻게든 바꾼다 해도 우리들의 현실은 바뀔 가망이 없다. 결국 내 입에 풀칠하거나 혼자 떵떵거리면서 우리의 문제에는 눈을 감아 우리그들로 치환하는 게 상책이다. 허나 상책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못마땅하다면? ‘우리로서 연대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바꾸어 나가거나, 다시 판타지로 돌아올 밖에.


하지만 판타지에 빠지는 것이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시도보다 저열한 무엇은 아닐 수도 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말했듯 애초에 판타지는 현실의 확고부동한 부정성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때로는 판타지로 인해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힘을 얻기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낚시 저녁에는 목축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마르크스가 상상 속에서 그린 공산주의의 결과적 장면이지만, 노동에 찌든 이들에게는 세계를 바꿔야 할 당위로 작동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앞서의 판타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단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힘이나 의지가 다른 판타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 이 만화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현실 즉, 이야기 속 이승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3부작 중 현재 완료된 두 편 모두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두 세계는 확고한 경계와 법으로 나뉘어 있다. ,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이로 이승에 속한 이는 저승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저승사자들 역시도 사자(死者) 이송 업무 외에는 이승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 있다. 이 힘없는 신들은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이승의 부조리에 눈 감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슈퍼히어로물이나 기적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의 판타지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신과 함께>의 판타지는 어쩌면 슈퍼히어로물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독자들 안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웃기고 울리기에 있다.




웃고 울기


먼저 웃자. <신과 함께>의 웃음은 해학과 풍자에서 발생한다. 이야기가 웃음을 주는 방식을 논할 때 자주 함께 사용되어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는 해학과 풍자는, 그 자체로는 웃음과 상관없는 요소를 새로운 맥락 안에 배치하는 것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예를 들어 커피숍이나 사대강 사업 자체는 웃기지 않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저승 안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 웃음의 질이나 웃는 독자가 느끼는 감상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해학과 풍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둘은 주체(독자)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해학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낸다. 앞서 든 예처럼, 커피숍이 저승에 헬벅스(Hellbucks)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웃음을 줌과 동시에 저승에 대한 친숙함을 이끌어낸다. 독자가 경험적으로 익숙한 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가까이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풍자는 대상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환기하면서 거리를 확인하게 하고 더 멀어지게 한다. 사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독자가 저승중심부를 관통하는 강인 삼도천이 하천 정비사업으로 물줄기가 직강화되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 그는 웃음과 동시에 사대강 사업에 대해 가졌던 비판적 정서를 감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저승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느끼게 될 수 있지만, 대개는 원래 비판하던 하천 정비사업이 저승까지 망치고 있다는 식의 감상으로 이어지게 될 공산이 높다. 이 경우 거리가 멀어지는 대상은 사대강 사업이 된다. 더 극명한 예로, 불효자를 가두는 한빙지옥이 불효자 급증으로 넘치는 제소자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다는 저승타임즈기사는 불효자와 이승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해학과 풍자는 독자 안에서 어느 대상에 대한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는데, 이 때 대상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신과 함께>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해학은 저승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혹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 독자의 거리감을 좁히고, 풍자는 이승의 부정성을 인식시키며 이승 및 이승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거리감을 넓히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독자는 만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저승의 자리에서 이승을 바라보게 된다. 이 말은 독자가 이승보다 저승을 좋아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저승이 독자에게 이승을 바라볼 가상의 공간으로 작용하여, 이를테면 저승에서 확고하게 적용되는 권선징악과 같은 법칙이 독자에게 내면화된다는 뜻이다. 그 시선으로 이승을 바라보게 될 때, 독자는 그들이 바라본 구체적 대상에 따라 다음 댓글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혀 뽑힐 정치인 많겠네” / “나 튜브 타면 어쩌지..” /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처음에는 가벼운 웃음이었던 것이 <신과 함께>의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타자를 바라볼 때는 냉소나 조소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는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윤리적 태도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이 <신과 함께>가 만드는 웃음의 힘이다.


이제 울 때다. 앞서의 웃음은 모험담의 틀을 취했던 <저승편>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반해 울음은 <이승편>의 지배적인 정서다. 하지만 <저승편>에도 이승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병렬되었는데, 이 이승 역시 눈물 나게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는 저승을 이승(=근현대)처럼, 이승을 저승(=지옥)처럼 그리려고 했다는 작가의 의도와도 부합한다. <이승편>의 눈물을 살피기에 앞서 <저승편> 안에서 이승을 그린 장면을 먼저 보자.


<그림1> 신과 함께 저승편 65

 

<그림1>에서 흐느끼고 있는 인물은 죽은 유성연 병장이다. 그의 죽음과 그 후의 이야기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 흐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이 장면은, 그러나 배경을 통해 비애감을 증폭한다. 지면에 근접한 창문과 전봇대에 기댄 쓰레기봉투를 담은 첫 두 칸, 미디엄숏 속에 창문을 담은 다음 칸. 그리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달동네의 풍경 속에서 차사들의 발목에 위치한 창문을 통해 말풍선이 흘러나오는 마지막 칸. 주거의 지옥(지하와 옥탑방)인 반지하는 거주자의 가난을 표현한다. 쓰레기봉투도 가난한 자의 삶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창문이다. 낮은 창문이 반지하임을 증거하듯 여러 칸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눈물이 흐르게하는 이 만화를 가장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를 창문이라고 생각해 보자. 만화의 칸처럼 네모난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온통 가난한 자의 삶이다. 창문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을 바꿀 수 없다.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적어도 이승을 그릴 때만큼은 한울동이라는 달동네의 풍경을 꾸준히 비춘다. 창문은 그러나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풍선까지 통과시킨다. 보이고 들린다. 보고 듣는다. 그래서 눈물이 창문을 통해 흐를 수 있다. 보이는 이들의 슬픔이 보는 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잠깐만 만화의 중요한 특징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 만화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매체로 자리 잡고, 또 정서적 이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카툰화()의 효과가 크다. 스콧 맥클루드가 <만화의 이해>에서 말했듯, 독자는 실제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그린 그림일수록 그것을 독립된 특징을 지닌 타자로 인식하며, 보다 더 단순화한 그림일수록 그것에 독자 스스로 성격을 부여하고 더 쉽게 동일시하게 된다(그는 이것을 탈바가지 효과라고 불렀다). <신과 함께>의 화풍은 한 눈에 보아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작품 내에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보통 사람들과 더 쉽게 연결하게 된다. 때로는 그림 속 인물에 독자 자신에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을 대입하는 일도 일어나며, 자기 자신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신과 함께>라는 창문은 흔히 진실을 보는 창으로 비유되는 다큐멘터리와도 다르다. 다큐멘터리 속의 삶은 많은 경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만화 속의 삶은 와 닿아 있는 우리들의 것, 혹은 적어도 보편일반의 한 부분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신과 함께>의 창문을 통해 보는 유성연 병장은 군대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게 하고, 펑펑 울고 있는 동현이(<그림2>)는 어린 동생이나 조카, 심지어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으로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독자가 느끼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다. 흐르는 것은 농도가 짙은, 순도 높은 눈물이다.




웃고 우는 만화적 리얼리즘의 판타지

 


<그림2> 신과 함께 이승편 19

 

독자의 눈물 젖은 공감은 <그림2>의 배경을 통해 통감(痛感)으로 이행한다. 이 배경은 동현이네를 퇴거시키기 위해 집에 들어온 용역들의 난동이라는 사건을 담고 있다. 잔뜩 어질러진 가재도구와 쏟아진 장독 그리고 그냥 발자국이 아닌 신발자국은 동현이의 눈물과 커다란 말풍선 소리와 겹쳐져 사건의 잔혹성을 환기한다. 이 짓밟힌 삶을 만들어 내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승편> 전반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구청직원들이 철거를 위해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는 철거민 대책의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파트 지어질때까지 어디서 살란 거요? 아파트를 하루에 지을수는 없잖여.” / “그래서 주거이전비 구백만원을 드리는 겁니다.” / “구백만원으로 집을 구하라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끼고, 담벼락과 창문에 빨갛게 칠해진 나가라자진철거에 고물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동현이 할아버지의 삶과 일주일 만에 발견된 오락실 할아버지의 주검을 겹쳐 연상하고, 사람도 아닌 가택신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분노한다면, 이미 그 독자는 통감의 역치를 초과해 버린 것일 테다.


게다가 그 독자는 이미 웃다가 저승의 법칙을 내면화했기에 울면서는 그 법칙으로 지옥 같은 이승의 부정성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더더군다나 <신과 함께>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신들(차사들과 가택신들)말이 안되잖아”, “지옥이 따로 없구만”, “내 동생은 어쩌란 말이야!”와 같이 독자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 줄 때,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승 사건에 결국 간섭할 때, 독자들은 신들의 통감에 다시 공감한다. 이것이 만드는 효과는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초월적 위치에 있지만 이승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신들의 시선으로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 신들처럼, 독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독자 스스로를 이입하고 있던 신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현실에 참여할 때, 그것이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는 뼈저리다. 끝까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으려던 철융신이 인간의 삶이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몸을 사리지 않고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 독자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장면, 용산참사를 상징하는 여섯 명의 사자(死者)를 데리러 재개발 반대 농성장을 향하는 차사들의 저 실루엣(<그림3>)<이승편>이 연재되는 내내 타이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아무리 무딘 독자라고 해도 <신과 함께>라는 창문이 그동안 무엇을 비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몰랐다 해도 다른 이들의 댓글을 통해서라도 눈치 챘을 것이고. <신과 함께>가 군데군데 배치했던 힌트들(용역 보스와 시공사 중역의 대화나 경찰과 용역의 공조관계 등)을 캐치한 섬세한 독자라면, 차사들이 밟고 있는 저 쓰레기더미의 근원까지도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독자는, 후경 속의 크레인이 개발의 랜드마크인 동시에 소금꽃의 투쟁처라는 것까지도 연상했을지 모른다. 이런 독자들이 <신과 함께>로 웃고 울다 탄생한다. 그것이 이 색다른 판타지의 힘이다.


편편마다 수천 개씩 달린 댓글을 독자에 대한 이해의 자료로 활용했지만 이 글이 상정하는 독자가 얼마나 존재할지 혹은 탄생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히 만화적 리얼리즘이라 할 이 판타지가 정말로 힘을 지닌다면, 그 힘은 독자를 성장하게 하는 힘까지도 포함한 것이어야 할 터다. 물론 그 힘은 <신과 함께>만화와 공론장의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는 웹툰이라는 두 멋진 형식의 힘을 손오공의 원기옥처럼 끌어 모아 쏘았기 때문에 분출되었다. 힘없는 신들이 쏘아올린 작은 원기옥이 어디까지 날아갈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만약 이승이 조금이나마 더 살만한 곳이 된다면 그것을 이끈 아주 작은 지분은 <신과 함께>에 있을 것이다.



<그림3> 이승편 최종화






싱크 5호에 기고한 글

싱크 SYNC 5호 - 10점
싱크 편집부 엮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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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YNC 5호]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
    from toon_er 2012-10-11 16:19 
    판타지로 웃고 울기 - <신과 함께>힘없는 판타지불의한 재벌을 국가(사)권력이 어떻게 비호하는지를... 눈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하나님 부처님 자연의 신이여 나에게 저 벽을 넘을 수 있는 초능력을....2차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내려갔던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 부산 영도에 강림한 닭장차형 명박산성 앞에서, 그것으로 상징되는 넘을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초능력을 바랐다. 힘없는 사람들
 
 
 

살림지식총서가 지닌 의의라면

-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편히 읽을 수 있는 판형과 분량이다.
- 교양과 학술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기에 그 분야 입문서로 좋다.(어중간하다는 면에서 이건 물론 단점이기도 하지만.)
- 위 장점과 맞닿아 있는 점으로, 글쓴이가 각주를 안 달아도 된다! 부럽부럽.(하지만 학술적 독자 입장에서는 무지 불편하다.)
- 가격이 싸면서도 출판사로서는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등이 있을텐데... 불행히도 공부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저자들의 관련 논문을 검색해서 접근하기에는 좋은 출발점인듯.

그리고 학술서적은 블로그 포스팅을 '편하게' 하기 어려운데, 이건 세미-학술서적이라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3종 세트로 포스팅 하나를 장식한다!

 
여학생에 얽힌 근대의 풍속을 1930년대 잡지들 -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등 - 을 자료로 하여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틀이 잡혀 있지는 않고 각각의 이슈별로 정리해 놓은 정도이다. 이슈로는 유행-패션, 대중문화와 여성, 연애, 성교육 등이 있다. 신여성, 여학생에 대한 담론의 출발점이 궁금하다면 살펴볼만 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 권의 빨간 책(공교롭게도 그렇게 되었다) 중에서는 가장 무난한 책. 하지만 구체적인 분석은 기대하지 말 것.



 




 

'하이카라 여성'보다는 분석이 조금 더 들어가 있는 책. 하지만 통일성은 적다. 아무래도 두 편의 논문을 짜깁기한 듯한 느낌이다. '에로 그로' 부분과 '넌센스' 부분이 텍스트나 분석의 층위가 매우 다르다. 또한 '근대적 자극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반해, 시기상으로는 1930년대라 탄생보다는 난숙기에 해당한다. 물론 어휘의 계보를 살필 때에 그러하다는 것이며, 감각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표현과 그 내용이 합해지기 시작한 건 1930년을 전후한 시기가 맞는 것 같다. (ex, 1910년대 『매일신보』만 해도 그로테스크한 내용(예를 들어 연인들의 음독자살이나 기차자살)은 나오지만 그것에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이 붙지는 않았다.) 분석도 적절하고(이상 분석은 제외), 군데군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서 '빨간 책'들 중 가장 재미있었다.

 





 

이 책이 제일 별로였다. 자극적인 제목에 비해 사실상 아무것도 찾아낸 게 없다. 어쩌면 2004년에는 금기였던 것이 2011년 현재는 더이상 금기가 아니어서일런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기대했던 '금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혹은 학제간의 벽 문제 등과 같이 내 관심사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는 너무 아쉬운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있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쉬움의 가장 큰 지분은 '편견'에 맞서는 책이 그 스스로의 '편견'에는 눈을 돌리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차지한다. 석사논문을 모아 낸 책에 대해서는 석사 수준의 글이라 치밀하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내놓고 있는 등이 그런 대목이고 그 외에도 비판과 의미 부여가 대개 자의적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언제고 필요한데, 강준만 급을 넘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을 본 적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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