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폭력사랑.

 

1.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대해 먼저 밝히는 것이 필요하리라. 2012년 3월 15일 오늘은 한미 FTA가 발효된 날이며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구럼비 바위가 발파된 지 9일째 되는 날이다또 일부 웹툰에 대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안내라는 긴 이름의 공문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공지된 지 38일째다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는 1547일째, 4대강 사업이 첫 삽을 뜬지는 857일째이명박 대통령 가카의 임기 종료까지 345일이 남은 현재 굵직굵직한 갈등 중 극히 일부만 모아도 이 정도다. FTA 발효를 맞아 강정을 염려하며 방심위의 웹툰 유해물 지정에 대해 고찰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문제 뒤에 또 문제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득달같이 추가되는 새로운 문제아아하아아...”

 

이처럼 너무 많은 사안 가운데 살며 쓰다 보니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이 모든 사안의 핵심은 폭력이다이 핵심 단어에 수식어를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공적 폭력국가적 폭력자본의 폭력제도적 폭력제국주의적 폭력조금 더 자세히 대상관계를 밝히면 이렇게도 쓸 수 있다비정규직에 대한 폭력문화예술에 대한 폭력인권에 대한 폭력자연에 대한 폭력지역에 대한 폭력전 국민에 대한 폭력.

 

그런데 이 글의 가장 주요한 사안인 방심위의 유해 웹툰 지정은 무려 폭력 예방을 위한 조치였다그들이 말하는 예방되어야 할 폭력은 학교폭력이다이 합성어를 마주하며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체벌과 구타가 떠오르는 이도 있을 것이나방심위의 이목은 그것을 향해 있지 않다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그리고 23편의 웹툰이그 폭력의 유발자로 지적되었다졸지에 잠재적 폭력 유발자가 되어버린 웹툰 작가들은 이를 웹툰에 대한 폭력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작가 노컷툰 릴레이 중 억수씨>

 

웹툰 작가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논자들과 독자들이 그 반발에 함께하고 있다노컷툰 블로그를 중심으로 작가들의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담긴 만화가 연이어 게시되었으며또한 만화를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방심위의 조치에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여 만화계에 힘을 보태고 있다이러한 그림과 글을 살펴보면 만화계가 상당히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만화계는 1997년에 청소년 보호법에 크게 당했던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다행스럽게도 젊은 웹툰 작가들을 포함한 만화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역량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그 이후로 방심위는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가 훨씬 큰 판이다.

 

<독자 노컷툰>


방심위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학생들의 심성을 보호하여 부모님 마음을 안심시켜보려던 방심위의 행동에 부모님이 안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학생들이 제대로 뿔이 난 것만은 확실하다오호 통재라방심위가 학교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한 청소년고교 학생들이 노컷툰 블로그에 방심위의 결정에 반대하는 배너를 달고 있는 것이다.(<독자 노컷툰>) 이처럼 방심위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말을 보태려니 어르신들이 약간은 불쌍하기까지 하다이 분들은 사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폭력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하여이미 많은 작가와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조치 자체의 문제점은 생략하도록 하자. (노컷툰 블로그에 가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되려 그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그 분들의 사랑스러운 마음을 곡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나는 방심위의 결정이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정권 말기나 선거철에 으레 등장하는 어떠한 정치적 술수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라고 보지 않으려 한다조선일보가 웹툰을 학교 폭력 유발매체로 지목한 데다 동급생들에게 폭력을 당하다 못해 자살한 청소년의 사연이 언론에 회자되어 여론이 들끓는 마당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을 누셨던’ 게 아니라고 보려 한다. (만약 그런 거였다 해도 이거 웬걸 발이 녹기는커녕 오줌줄기가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언 발 위에 떨어져버린 모양새니 측은하지 않은가.)

 

방심위는정말로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 그들의 조치는 사랑에서 출발한 행위였을지 모른다그런데만약 그렇다면 사랑의 표현인 이 조치가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조치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 볼 수 있다혹은조치가 없을 때 얻어질 결과를 상상하여 조치로 인해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사실상 이 두 가지 방법은 초점만 명확히 한다면 동일한 것으로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모두가 알다시피 초점은 만화 속의 폭력이다더 명확하게는, ‘만화 속의 폭력이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이다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을 심히 사랑하는 방심위가 만화계에 폭력을 휘두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므로.

 

 


2.


폭력을 유발하는 웹툰을 금하려는 방심위의 사랑은 웹툰을 포함한 대중매체에 그려진 가상적인 폭력을 접한 청소년 독자가 현실 속에서 폭력을 저지를 공산이 높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사실 이 가설은 꽤나 많은 연구를 통해 검토되었으나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은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이와 함께 논의되는 다른 가설이 두 가지 더 있다하나는 대중매체 속의 폭력과 향유자의 폭력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오히려 가상적 폭력이 향유자의 잠재된 폭력성을 대리 충족하여 현실 속에서는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그러나 필자가 살펴본 바국내에서 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대중매체의 폭력이 청소년의 폭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다아마도 방심위 분들도 그 연구들을 근거로 하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설문을 통한 통계학적 연구가 주종을 이루는 폭력적 매체와 폭력적 행동의 연관성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특히 설문 문항이 유도심문처럼 구성되어 폭력적 영향을 시인하는 답변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필자가 확인한 논문들은 주로 TV나 게임의 영향에 관한 것이었는데질문 문항은 대개 다음과 같다.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처럼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변자는 이에 전혀 아니다에서부터 매우 그렇다까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심지어 아니다는 하나만 주고 그렇다’ 앞에 조금’, ‘매우’ 등을 붙여 구성된 선택지도 있었다.) 답변을 하는 입장에서는 질문에 매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그렇게 통계를 내 보면 당연하게도 게임을 많이 한 집단의 답이 그렇다’ 쪽에 더 많이 분포될 수밖에 없다게임 경험이 많은 만큼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며그러다보면 여러 생각 중 하나로 폭력적인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면 어땠을까이 역시도 게임 경험이 많은 향유자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듯이 실제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혹은 게임에서처럼 내 삶의 레벨을 높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둘 다 매우 그렇다인데 말이다.

 

위와 같은 연구가 설문조사였던 데 반해실제 범죄 행위 통계를 통해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간의 영향관계를 조사한 예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이 군사정권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연출이 포함된 TV 애니메이션의 방영을 금지했다. 80년 9월을 기준점으로 그 이전까지 방영되었던 TV 애니메이션 중 요술공주 새리와 같은 작품만 남고 마징가’, ‘그랜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등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이 정책은 1985년 어간까지 시행되었으며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것은 1970년부터이니 이 시기들에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대조해보면 그 정책의 유효성을 파악할 수 있다당시에는 DVD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비디오(VCR)로 시청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으니, TV 애니메이션이란 단일 변인의 효과를 검토하기에 상당히 변별력 있는 분석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이 논문의 결론은 방심위 어른들께는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경찰청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청소년 범죄는 폭력적 애니메이션 금지기에 오히려 증가했다금지 이전 시기의 청소년 범죄 증가추세가 금지 이후의 증가추세와 거의 동일하므로폭력적 애니메이션의 금지가 더 많은 범죄를 불러왔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정책의 효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충분히 타당하다세부적으로 볼 때단순 폭행보다 죄질이 높은 상해죄의 비율이 높아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최성락 외폭력성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만화애니메이션연구』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08.)

 

물론 학술적 연구 결과는 제한된 데이터에 의존해 도출된 것이므로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하지만 폭력적 TV 애니메이션 금지 정책의 효과에 대한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 이번 방심위의 조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사랑의 마음으로 폭력유발자’ 웹툰을 금지하려 하셨던 방심위에게는 안타깝지만웹툰의 가상적 폭력과 청소년의 실제 폭력 사이에는 뚜렷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어렵다그럼에도 불구하고주제와 관련한 우리의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웹툰 속의 폭력은 폭력적 영향만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오히려 폭력을 그린 웹툰을 통해 폭력성만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방심위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생각의 소산일 것이다방심위가 폭력을 그리는 웹툰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게 될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는그려진 폭력에 청소년들이 얻게 될 모든 것들로부터의 보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만화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이다폭력적 웹툰이 검열당하고 1997년과 같은 자체검열의 역사가 반복되게 되면 바로 그 의미가 사라질 것이므로우리는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물론 이 질문은 쉽게 대답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이 아니다허나구체적인 작품을 경유할 때에 그 작품에 해당하는 답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또 그 답은 만화 전체에 던진 동일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은 될 수 있을 테니, 한 작품을 통해 물어보자이를 위해 이 글은 (산 말고우주로 간다그리고 방심위의 사랑으로 인해 청소년들이 잃어야 할 어떤 가치가웹툰의 폭력에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3.


방심위가 지정 예고한 유해 웹툰 중 하나인 김성민 작가의 나이트런은 확실히 폭력적이다적어도 방심위의 폭력이 피가 낭자하는 잔인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나이트런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게다가 포털사이트와 작가의 협의에 의해 18세 이상 구독 가능하게 설정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나이트런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청소년의 폭력성을 고심하는 방심위에게는 안성맞춤의 타겟이었을 것이다. (18세 이상 구독 가능한 웹툰까지도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 예고한 코미디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성토하고 있으므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괴수의 전쟁을 그린 SF 대서사극 나이트런은 폭력적이므로 유해한가우리는 나이트런에서 폭력적이라는 것과 유해하다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역시나 이런 질문도 답이 안 나오긴 매한가지이므로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이트런의 폭력은 어떻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이를 조금 더 연장해서, “‘나이트런이 폭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가?”까지도 물어보자.

 

지금까지 연재된 나이트런의 분량은 상당한 편이다아마도 이 만화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나 1986년부터 시작해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만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나가노 마모루정도로 길어질 듯하다내용과 설정도 이런 걸작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헌데이런 작품들보다 나이트런은 확실히 잔인하다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정도의 피가 튀는데다 죽어나가고 잘려나가는 신체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괴수의 공격에 의해 수억 명의 인간이 몰살당하고 행성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별이 되고 말았다는 우주 속 인류의 역사가 만화 속에서 그려진다.

 

<그림 1> ⓒ김성민

 

<그림 2-1> ⓒ김성민

 

그러나 한 도시가 파괴당하는 익명의 죽음들을 담은 컷(<그림 1>)보다 독자에게 더 잔인하게 느껴질 것은 구체적인 전투와 죽음의 순간이 묘사된 컷들이다누나를 구하러 달려오던 동생의 팔이 괴수에 의해 잘리는 장면(<그림2-1>)은 생생하게 잔인하다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할 수도 있다또 방심위처럼 우려하시는 어른의 눈에는 유해하게까지 보일지 모른다칼로 신체를 베는 모방범죄를 걱정하실런지도 모르겠다내 눈에는 전혀 그럴 리 없어 보이지만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널렸다. <그림 3>의 잘려나간 수족들을 보라이는 괴수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인간과 인간 사이의 싸움을 그린 장면이다이 도륙을 몸소 행한 은 되도록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려 관대하게도 수족만을 벤 것이지만잘려 날아다니는 신체를 보는 것은 여전히 처절하게 잔인하며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함에 압도되어 앞서 우리가 물으려 했던 것을 잊지 말자아니그 압도가 주는 감각에서부터 출발해 물어보자이러한 장면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런 폭력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의미가 과연 여기에 있는가? <그림 1>과 <그림 2, 3>들의 대비를 통해 이에 답할 수 있다도심의 폭파를 그린 <그림 1>은 분명 다른 그림들보다 더 많은 인명의 살상을 담고 있다우리는 이를 수이 상상할 수 있으나그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조명되지 않은 까닭에 그것을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지각할 수는 없다폭파되는 것은 건물이지 죽어나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미국과는 물리적 거리가 먼 우리에게, 9.11의 이미지가 테러 당한 무역센터와 솟아오르는 연기로 기억될 뿐사람의 눈물과 절규와 참혹한 주검의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반면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묘사된 폭력 앞에서 우리는 그만큼 가깝게 폭력을 느낀다폭력의 힘을폭력의 인과를 더 실감나게 깨닫는다동생의 팔이 잘리는 비극을 눈앞에서 본 누나의 감정 상태에 공명하게 된다.(<그림 2-2>) 이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이며 생생한 폭력의 이미지다.


<그림 2-2> ⓒ김성민


그림 <2-3> ⓒ김성민


이런 점에서 <그림 2, 3>에 동일하게 채택된 검이라는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더 상세히 설명되어야 한다버튼 하나만 누르면 대량 살상이 가능한 시대에방아쇠만 당기면 한 목숨을 빼앗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우리는 이 웹툰을 통해 손가락이 아닌 온 몸으로 행하는 폭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원거리의 여러 사람들을 버튼으로 살상하는 것보다주먹으로 칼로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폭력을 가하는 그 순간의 표정이튀는 피가단말마의 비명이빠져나가는 생명이 지각된다온 몸으로 행할 때 폭력은 힘겹다가까운 대상과 주고받는 폭력은 어렵다. ‘이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며 속으로 하는 생각들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지키고픈 대상을 구하기 위한 길에서 다른 대상을 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을 짓누른다보통 아버지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베트남전에서, 5.18에 방아쇠를 당겼던 기억과 닿아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이 폭력적 묘사이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억을 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더 큰 폭력은 더 큰 사랑이라는 듯이 그려지는 비극이 이 장면에 새겨져 있다덜 잔인하게 묘사되었더라면덜 생생하게 느꼈을 고통의 감각이 여기 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3> ⓒ김성민

 

따라서, ‘나이트런의 폭력적 장면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러일으킨다폭력으로 잃게 될 것과 폭력이 낳는 잔혹한 경과를 눈으로 확인하며 그 폭력적 상황 자체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한다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핵을 맞아 죽어간 히로시마 사람들에 대한고문당한 민주 열사에 대한내가 지키지 않으면 폭력 상황 속에 놓일지도 모를 내 친구에 대한 사랑의 작용이다. ‘잔인하다는 즉물적 감상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는 독자도 있을 것이나이는 오히려 잔인한 것을 잔인하다는 이유 하나로 배격하는 어르신들의 빗나간 사랑의 교육 때문이다서사와 그림 속에서 잘 표현된 폭력이라면 독자는 그 가상의 폭력에서 의미를 충분히 포착해 낼 수 있다특히 나이트런은 폭력을 통해 비폭력을 꿈꾸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이렇게 볼 때 모방하기에 너무 잔혹한도저히 모방할 수도 없으며 모방하고 싶지도 않은 폭력은 방심위의 우려와 달리 폭력적으로 무해하며폭력적으로 유의미하다.

 

방심위의 조치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앗아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폭력이다이 의미를 그릴 수 없게 될지 모르는 웹툰 작가들에게도 그것은 폭력이다그런 사랑을 거부함으로써만 만날 수 있는 의미가 있으므로그들은 지금싸우고 있는 것이다.

 


 

4.


처음 나열했던 여러 폭력들과 나이트런의 생생한 폭력은 명확한 차이를 지닌다. ‘나이트런이 폭력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폭력을 가하는 자의 고뇌와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한미 FTA와 해군기지의 폭력에서는 폭력을 당한 자들의 아픔만이 표현된다여기에 가해자는 은폐되어 있다방심위 역시도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했고 웹툰 작가들은 그 가해자 없는 폭력에 아프다그러나 나이트런의 인물들특히 은 폭력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폭력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깊이 자각하고 스스로를 정의와는 거리가 먼 나쁜 놈으로 인식한다그것이 사랑과 닿아있는 것일지라도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하지만 지금 사회의 많은 폭력들특히 국가적 폭력은 국익을 위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자녀들을 보호한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때리는 자는 스스로 때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맞는 자들만 울부짖고 있다이런 문제적 상황 속에서 나는웹툰을 통해 청소년들이 접하게 될 폭력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걱정되는 것은 사랑을 내세운 어른들의 폭력이다우리 청소년들이 배울까봐 두려운 그들의 허울 좋은 사랑에나는 지금도 괴롭다.

 

- 제주도 강정에서

 











싱크 8호에 기고한 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미 2012-12-2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골든타임 글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만화평론이 이런거군요!

toon_er 2012-12-28 16:28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
이런 게 만화평론의 일종이긴 합니다. 허허허...
 
[전자책] 젊은 날, 거기 분노가 있었다
김인수 외 지음 / 초록호미 / 2012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전자책 1000원짜리 치고는, 또 대선후보가 되지 못한 걸 생각하면 쓸고퀄. 하지만 손학규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 보는 동안 이미 돌아간 조영래와 김근태를, 그리고 박정희(의 딸)를 다시금 짚어보게 되어 뜻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레이먼드 월리엄스 지음, 박만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장바구니담기


작품 제작에 있어 재주 없는 것을,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 암시로 벌충하는 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의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 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 엥겔스, MEL. 1851년.-??쪽

......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 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엥겔스, MEL. 1881년.-??쪽

만약 문학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다. 내가 말하는 '참여'는 바로 이것이다. 문학이 순수나 노래로 환원된다면 그것은 시들어 버린다. 씌어진 문장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메아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문학이 시대를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다면 한 시대의 문학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 사르트르,『글 쓰기의 목적』, 1960.-??쪽

참여는 (중략) 선전으로 격하되지 않는 한 정치적으로 다 가치적이 된다. - 아도르노, '참여', 뉴레프트 리뷰, 1974.-??쪽

순수예술은 진지한 경우 언제나 사회참여의 형태(아무리 은폐되었을지라도)이며, 하찮은 것일 때 단순한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쪽

실제 사회관계는 글쓰기가 읽혀지는 관계 속에서 뿐 아니라 글쓰기의 실천 자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다른 방식으로 글쓴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흔히 상이한 사람들에 의해서 상이한 방식으로 상이한 관계 속에서 읽혀지게 마련이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물방울>로 보내는 편지


선배!

 

지난번 와인 잘 마셨어요. 맛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눴던 대화만큼은 또렷하네요. 선배도 기억나시죠? 평사원 때와 대리 때가 다르고, 팀장급이 되니 또 다르더라며 승진 후 새로이 탐닉하고 있는 취미에 대해 흥겹게 얘기했었잖아요. 바로 그 취미 덕에 우린 평소 자주 가던 단골 호프가 아닌 와인 바에 갔고요. 제가 와인을 잘 몰라서 맞장구를 쳐드리진 못했고 그래서 대화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선배의 와인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진국은 역시 와인 만화 이야기였죠. 둘 다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고, 마침 저도 <신의 물방울>을 <목욕의 신>과 대비한 글을 쓰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도 그 대화의 연장입니다. 그때 <신의 물방울>을 10권 정도밖에 읽지 않은 채로 아이디어만 거칠게 늘어놓았다가 형에게 몇 가지 비판과 질문을 받고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게 영 찝찝했거든요. 이제는 지금껏 나온 30권을 다 읽었고, 그만큼 생각도 많이 진행되었으니 그 찝찝함을 좀 덜어내고 싶네요. 아, 이것저것 해명하고 설명하기 전에 미리 고맙단 말씀 드릴게요. 선배의 비판과 질문 덕에 ‘신의 물방울’을 더 촘촘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배가 아니었다면 처음 그렸던 성긴 구도로 읽었을 거예요.

 

선배 말대로 <신의 물방울>은 만만치 않은 만화가 분명해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목욕의 신>의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겠어요. 지금 와서야 말이지만 비교는 해볼 수 있어도 굳이 승부를 낼 것까진 없으니 누가 이겼다 졌다는 말하지 않으려 해요. 둘 다 완결도 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나온 분량만 가지고 심판을 하기도 어렵겠고요. 지금도 여전히 저는 <목욕의 신>에 더 큰 애착을 느끼지만, 그렇다곤 해도 <신의 물방울>을 폄하하고 <목욕의 신>을 드높이는 방식으로 제 애착을 표현할 필요는 없겠지요. 양자의 비교를 통해, 또 <신의 물방울>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얘기는 그 주제를 고찰하기 위함이지 <목욕의 신>을 상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따라서 선배의 비판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제가 두 만화를 통해 얘기하고픈 두어 가지 주제에 대한 고찰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자의 이유로 <신의 물방울>에 집중하게 될 것 같지만요.

 

처음 제가 <신의 물방울>은 상품에 만화적 이미지를 덧입히는 만화적 PPL이지만 <목욕의 신>은 무시당하던 노동 형태에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해 노동 자체의 의의를 제고한다고 했을 때 선배는 지적했지요. 상품과 노동이라는 구분부터가 이상하다고. 맞아요. 정말 전적으로 선배 덕에 거칠었던 생각을 수정하고 정돈할 수 있었습니다. 상품과 노동은 바른 구분이 아닙니다. 와인이라는 상품도 노동생산물이고, 목욕관리(때밀이)라는 노동 형태도 달리 말하면 서비스라는 상품이지요. 헌데, 그렇다 해도 <신의 물방울>과 <목욕의 신>이 만화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대상과 방식, 그리고 그 효과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아요. 이건 양자를 대비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야 할 문제라, 오늘은 “만만치 않은” 신의 물방울에 집중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면 상품/노동이라는 추상적 구분에서 와인과 와인 생산 및 소비로 더 구체적인 구분 하에서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신의 물방울>은 30권이 넘어가는 장편인 만큼 그 양상이 단일하거나 균질하지 않습니다. 권별로, 에피소드 별로 차이가 있고 어찌 보면 뒤로 갈수록 진화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신의 물방울>의 와인에 대한 철학과 그 철학을 관철하는 논리를 단순명료하게 규정한다면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것 역시도 <신의 물방울>이 천박하지만은 않다는 선배의 힌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우위이고 후자는 사용가치=맛의 심미화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1) 샤토 A(15만원)보다 샤토 B(2만원)가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2) 샤토 A를 맛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보다 샤토 B의 맛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과 논리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에 의미를 입히는 일반적 방식에 비해 진일보한 형태입니다. 가격이라는 교환가치를 최상이자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보며 높은 가격의 제품이 낮은 가격의 제품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의 물신화가 천박하단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문제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이 신화를 넘어선 신화를 <신의 물방울>이 제공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의의를 인정해 줄 수 있냐는 거예요. 달리 말해, 몇 가지 에피소드에서 벌이고 있는 <신의 물방울>의 싸움은 너무 이기기 쉬운 대상과의 싸움이란 말입니다. 그 싸움이 담고 있는 것은 반자본주의도 아닐뿐더러,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천박한 것 한 가지에 일정한 수정을 가하는 것일 뿐이에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만만치 않음”은 사실 이런 것이라 저는 생각해요.

 

와인의 명품인 5대 샤토만을 선호하는 다키스키ⓒ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그러나 저렴하지만 정성들여 만든 와인을 맛본 다키스키는 페가수스를 타고 어린시절의 행복감을 경험하게 된다. 만화 '신의 물방울'은 이처럼 와인의 미적 경험을 만화적 심상풍경으로 표현해 내며, 와인을 예술로 고양시킨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또 비싼 샤토 A의 맛을 넘어서는 싼 샤토 B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변하는 <신의 물방울>은 거기서 멈출 뿐 더 나아가지 않아요. 위의 예는 사실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옮기면, 애초에 교환가치로 사물의 가치를 규정하는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의 물방울>은 비싼 와인과 싼 와인이 존재하는 상황, 즉 교환가치와 가치가 등가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회적 통념을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수정하는 거죠. 통념에 대한 반례는 제공하지만, 통념에 기댄 채로 수정할 뿐입니다. 따라서 반례가 되는 샤토 B는 사실 샤토 A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니기에 마땅한 것이 됩니다. 곧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하죠.

 

그래도 이런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싸지만 좋은(맛있는) 와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합리적인 와인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돌파구를 제안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와인을 만화 속에 등장시키는 <신의 물방울>의 장점으로 인해, 독자는 싸고 맛있는 와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고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1권에 등장했던 샤토 몽-페라(Chareau Mont-Perat) 2001년산은 코스트 퍼포먼스가 뛰어난 와인으로 현실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가격 상승이었어요. 싸고 맛있는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 찾아내지만, 그로 인해 싸고 맛있는 와인은 곧 비싸고 맛있는 와인이 되더란 말이죠. 돌파구는 사실 돌파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란 말이에요. 결국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최선의 돌파구는 싸고 맛있는 와인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신의 물방울>의 방식이 아니라, 싸든 비싸든 맛있는 와인을 사서 마실 수 있는 금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가격(교환가치)과 관련해 생산과 유통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의 문제에 더 치중하는 면에서, 즉 가격이 결정되는 과정보다 이미 결정된 가격 체계 안에서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에 치중하는 면에서 <신의 물방울>은 분명히 아쉽습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사용가치와 관련해서는 생산과정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 맛있는 와인이 탄생하는가를 “천•지•인”이라는 논리 속에서 구현하고 있으니까요. 선배가 말한 바, <신의 물방울>의 와인 철학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부여받아요. 天(빈티지: 시간(수확연도), 농작을 위한 기후환경)과 地(테루아르: 토양과 토질, + 포도나무)을 결정하는 자연의 힘 아래서 결국 와인을 만들어내는 마지막 힘인 人(도멘: 와인 생산자, 장인)이 포도와 최종 생산물인 와인의 가치를 매개하고 결정하게 되니까요. 세 요소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좋은 와인이 탄생하지 않지만, 풍년이 아닌 빈티지와 척박한 테루아르에도 불구하고 좋은 와인이 탄생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란 걸 제1사도와 제2사도에 얽힌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결국 <신의 물방울>이 담고 있는 것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것은 성실한 노력과 번득이는 감각과 아이디어이고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행위는 그렇게 탄생한 와인 고유의 맛으로 열매 맺습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으로 수렴하지는 않지만, 최종 생산물인 한 병의 와인을 통해 그 생산자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면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이 소외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화라는 매개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독자)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는 면은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일정한 한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와인 소비자의 자리에 있어요. 제목 속에 ‘신’이라는 이상화된 타자를 담고 있는 것처럼, <신의 물방울>은 이데아를 전제한 가운데 펼쳐지는 인간의 '신적 고양'의 이야기입니다. 생산자의 이야기에서 그것은 자연과의 변증법적 합일로 완성되지만, 소비자의 이야기에서는 다른 방식이 됩니다. 소비자는 와인을 향유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일한 정체성과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요. 두 주인공만 해도 그렇습니다.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가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높을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지니고 있는 반면 와인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평사원 칸자키 시즈쿠는 잇세가 지닌 것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와인을 소비하는 데 드는 ‘돈’과 오랜 세월 동안 와인을 접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시즈쿠는 희대의 평론가 칸자키 유타카의 적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술의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와인을 경험하는 훈련을 받아 후각과 미각이 잇세보다도 뛰어납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과 미술에 대한 조예도 남다르죠. 그래서 두 주인공의 와인 향유는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듭니다. 시즈쿠와 잇세의 조력자들도 만만치 않은 향유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죠. 이들 모두의 동경과 승부의 대상은 칸자키 유타카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세계 와인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완성된 평론가로 만화 속에서 와인 향유자의 이데아로 재현됩니다. 만화 속의 소비자들은 유타카(이데아)의 위치에 이를 때에야 신적 생산물인 와인의 참맛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생산자도 소비자도 소외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일반적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상품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신의 물방울>의 수정된 정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보편 세계의 변화로 이끄는 것은 ‘유타카에 근접한 소비자’와 ‘유타카의 와인 미학’입니다. 그런 소비자일 때에야 가격과 상관없이 와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향유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구도에서 저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쉴러는 이 편지들에서 혁명(프랑스 혁명)으로도 완수하지 못했던 인간 총체성의 완성은 예술을 통한 감성의 고양을 수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상적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이고, 그런 인간은 예술의 교육을 통해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의 2차 모방물이라는 평가를 받던 예술은 쉴러에게서 진리와 본질을 담은 이데아로의 통로로 제고됩니다.

 


와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신의 물방울'의 여정이 잘 표현된 장면.

하지만 이러한 화해적 가상은 개인의 의식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 세계의 자체의 문제는 외면한다.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만화 <신의 물방울> 속에서 신의 물방울, 즉 와인도 바로 그런 예술 중 하나가 됩니다. 그 예술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세계는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물방울>의 세계는 부족하지만 바로 그런 곳처럼 그려집니다. 시즈쿠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여정은 세계에 존재하는 문제를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해결하는 과정이니까요. 직장인의 무료한 일상에서부터 부녀갈등, 이혼, 정리해고, 적대적 기업합병, 시한부인생,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까지 여러 고통의 문제들이 시즈쿠 일행이 찾아낸 와인을 통해 해결됩니다. 일상적 문제 상황 가운데 화해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와인인 셈이지요. 또한 그 과정의 세부는 모두 인간적 유대감을 주축으로 보답 없는 증여(재능기부)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를 찾아야 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이 아름다운 미션을 완수하고 나면, 사도에 대한 힌트가 서사적 보답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신의 물방울>의 서사의 주축은 이처럼 예술적 인간이 와인이라는 예술을 통해 타자에게 선사하는 화해, 그리고 그 예술적 인간 그 자신의 문제 해결과 발전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사뭇 아름다운 이 소비자의 서사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적 가상입니다. 와인 소비로 인해 맛보는 행복감과 문제의 해결은, 만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손쉽지 않다는 걸 선배도 아실 겁니다. 이런 해결은 아도르노의 표현에 따르면 “거짓된 축복”입니다.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화해적 태도와 거짓된 위안을 매개하는 예술은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작품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 말은 <신의 물방울> 속에서 인간적 문제를 해결해내는 와인의 힘에 낭만적 기대를 품지 말자는 것도, 와인 따위 마시지 말자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화해적 가상을 재현하는 만화와 그것으로 재현되는 와인이라는 두 개의 신의 물방울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선배를 만족케 한 <신의 물방울>이 제게는 불만족스런 것이었다면, 뒤집어 보면 선배에게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게 될 여지가, 제게도 이것이 만족스러워질 여지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와인이라는 ‘신의 물방울’과 와인을 그려낸 만화 <신의 물방울> 모두가 제게는 부르주아를 위한 예술 형태로 이해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르주아 미학을 만족시키고 있어요. 와인은 풍성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으며 교양을 담고 있습니다. 만화도 와인의 매력을 풍성한 스토리와 섬세한 표현과 구성으로 잘 담아내고 있어요. 개인 능력의 자원이 되는 지성과 교양과 풍요가 현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라면, 바로 그것이 <신의 물방울>의 주된 질료라 할 만 합니다. 특히 시즈쿠와 잇세라는 중심인물들의 계급적 위치는 부르주아를 주인공으로 한 세계를 구성해내고 있습니다. 잇세는 몰라도 어떻게 시즈쿠가 부르주아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28권부터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왓킨스라는 인물을 비교항으로 놓고 볼 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시즈쿠와 잇세가 그토록 힘겹게 찾아왔던 8병의 사도들을 단 몇시간만에 모두 찾아내는 왓킨스는, 부르주아 혁명 이전의 귀족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현재 부르주아의 전유물인 지성과 교양과 풍요는, 사실 귀족들의 것이었어요. 부르주아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노력을 통해 귀족들의 전유물을 잠식해 그것들을 획득해 낸 것이지요. 결국 귀족과 왕족의 시대를 무너뜨린 것이 부르주아들의 시민 혁명이었음을 떠올려 볼 때, 귀족 왓킨스에 비해 평범한 시즈쿠와 잇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칸자키라는 신흥 부르주아의 재능을 이어받은 부르주아로, 각각의 결점을 지니고 있지만 완성을 향해가는 자들인 것이지요. 칸자키의 12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부족한 면으로 인해 가치가 있는 와인들입니다. 그 부족함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만들어낸 노력 그것으로 채워질 수 있으며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제가 되는 무엇이니까요.

 

이런 저의 독해가 선배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시점에서 바라볼 때 나오는 다른 독해일 테니까요. 선배의 눈에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제게는 이미 함락된 귀족의 성채와 천박한 자본주의를 부수는 포즈를 담아 부르주아에게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손쉬운 이야기라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설명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어요. <신의 물방울>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과 삶을 더 잘 설명했어야 했는데,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추후에 다른 작품을 통해서 더 잘 해보도록 할게요. 아마도 <목욕의 신>이 완결되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원래 쓰려고 했던 두 작품의 대비도, 두 작품 모두가 완결한 후로 미룰게요. 와인이라는 서구 부르주아의 예술상품이 아닌 한국 서민의 대중적 목욕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제 눈길을 끈 <목욕의 신>이지만, 선배 말대로 아직은 소재의 매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은 그것이 화해적 가상이 아닌, 비화해적 가상으로서의 현대예술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지켜보려 합니다. 다음을 기약해요.

 

 

<목욕의 신> 전반부에 제시된 문제 상황.

아직 이야기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일 수 있으나, <목욕의 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하일권

 

 

 

마지막으로 <신의 물방울>이 제게 던져준 화두를 선배에게 말씀드리고 편지를 맺으려 합니다. 이건 지금껏 논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일 텐데요, 바로 예술에 대해 말하는 형식, 즉 평론입니다. 와인을 향유하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잇세와 시즈쿠의 사도 찾기의 여정은, 만화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는 만화 평론가의 길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더 많은 만화를 경험하고, 정말로 좋은 만화를 소개하고 표현하는 길을 계속 걸어 나가려는 저에게 이들의 와인 여정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더군요. 언젠가는 선배를 만족시킨 잇세와 시즈쿠보다 더 만족스러운 글을 써 볼게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방식일 테고, 또 그들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표현될 테지만, 비화해적 가상을 예술의 본령으로 믿는 제게 만화는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예술입니다. 개별 작품 가운데 그 가능성을 성취하고 있는 작품은 아직 많지 않다 해도 말이죠. 한 번 제대로 걸어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또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세계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한, 선배의 말씀은 제게 지배적인 세계와 그 세계를 사는 사람의 텍스트 향유를 더 명확히 파악하게 도와줄 테니까요.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요. 감사해요 선배.

 

 

P.S. 조만간 같이 목욕하러 갑시다. <목욕의 신> 얘기를 조금이나마 준비해 둘게요. 바나나우유는 제가 쏩니다!^^

 

 




- 싱크 7호에 기고한 만화칼럼. 

이 때는 아직 <목욕의 신>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과 금>, 미완의 성장기

 

1.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라 할 당신에게 청부 살인에 가담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병으로 죽어가는 대기업 회장의 죽음을 몰래조금 앞당기는 일이다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게다가 무죄가 보장되어 있다이 부담 없는 살인의 대가로 당신이 받게 될 돈은 7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발을 들일 것인가뺄 것인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은 이처럼 돈과 사람을 저울질하게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은왕 긴지와 청년백수 모리타다긴지는 탁월한 지략을 지닌 사채업자로그가 지원하는 정치인이 일본 정계의 정점에 앉으면 자신은 경제계의 정점에서 거대기업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모리타는 긴지가 선택한 파트너이자 후계자로은왕과 함께 활동하며 수련을 쌓아 장래에는 은왕을 넘어서는 금왕이 되려 한다은왕이라 불리는 인물과 금왕이 되려는 인물이 힘을 합쳐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벌이는 돈의 투쟁이 <은과 금>에는 담겨있다. <은과 금>이 담은 투쟁이 돈의 투쟁인 이유는그것이 돈으로 돈을 제압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으로라는 조사에 주목하기 바란다조사가 강변하듯그들에게 돈은 수단이다그리고 목적은 자아실현이다금권(金權)의 최고봉이라는.

 

이처럼 돈을 수단으로 하여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만화적 가정은우리가 현실 속에서 듣는 말들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돈은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등등은 그 현격한 예다돈의 목적 불합치성이 강조되고 있으며행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그렇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서는 돈이 수단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돈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들을 우리는 목도해 왔다절도와 사기착취와 해고불법 상속과 분식회계 등등개인 간에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그리고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적 죄와 도덕적 악은 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바로 <은과 금>의 긴지와 모리타도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로 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돈을 수단으로 한다는 그들은악으로 돈을 추구한다다시 으로그들에게는 악 역시 수단이다따라서 그들의 쟁투는 돈의 쟁투이자 악의 쟁투이다그들은 악으로 돈을 벌고돈으로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이 글의 목표는 바로 이 만화적 도정의 서사를 검토하는 데에 있다.

 

 

2.


서두로 다시 돌아가 당신의 선택을 상기해 보자돈이었나사람이었나발을 들였는가뺐는가모리타는 동일한 제안 앞에서 돈을 선택하지 않았지만발은 들였다이는 사실 긴지의 시험으로모리타가 돈을 사람을 넘어서는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랬기에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 모리타는 긴지의 시험에 합격했다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국 돈에 의해 움직이며 돈을 위해 자기편을 배반할 수 있다반면 모리타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돈보다 사람을 위에 놓고 보는옳은 인간이다.(<그림 1>) 긴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였고모리타야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이렇게 모리타는 긴지에게 이끌려 돈과 악의 투쟁에 발을 들였다돈을 수단으로 볼 수 있는 두 인물 긴지와 모리타 듀오는 그렇게 함께 쟁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의 적은 주로 돈을 쥐고 있는 악한 자들이다.

 

 

<그림1> ⓒ후쿠모토 노부유키

 

이런 면에서 긴지와 모리타는 의적을 연상시킨다홍길동과 로빈훗 등의 의적 캐릭터의 방식은 강자에게 강자의 방식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그 현대적 변용으로서 만화 <은과 금>이 채택한 것은 돈의 활용이라는 강자의 방식으로 재벌이라는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다하지만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의적과 달리 긴지와 모리타는 약자를 위해 베풀거나 기존 사회의 타자를 위한 이상세계 건립을 꿈꾸지 않는다적어도 드러나게 서술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 금권의 최고봉에 오르는 것이다게다가 이들의 방식은 강자들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한 악이다살인만이 제외되었을 뿐강자들의 등을 치는 모습은 통쾌할 만큼 악랄하다이런 면에서 볼 때 이들은 현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악한 주인공의 형상과도 유사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거탑>의 장준혁으로 대표되는 악한 주인공들처럼 파국을 맞이하지는 않는다오히려 긴지와 모리타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끊임없이 승리한다한때 청년백수였던 모리타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돈과 더 치밀한 악을 활용하는 자로 성장한다.

 

이런 만화의 캐릭터 형상화와 서사 속에서선과 악의 대립구도도 수정된다. <은과 금>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악과 악의 대립이다구체적으로는 인간적 악과 동물적 악의 구도에 가깝다돈과 악을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인간들이 돈과 악을 체화한 동물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은과 금>의 인간과 동물은 같은 자리에 있다긴지와 모리타가 벌이는 투쟁은 만화 속에서 포커마작내기격투 등으로 이루어지는데이 때 주인공과 적대자는 같은 장같은 게임의 룰 안에 있다이 게임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나뉘는 결과를 향해 치닫는다이 게임들은 돈을 걸고 이루어지며돈을 목표로 한다치밀한 악이 돈을 거머쥐기 위해 동원된다적어도 게임의 순간만큼은수단으로서의 돈이라는 인간적 개념은 정신의 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따라서 긴지와 모리타의 인간적 여정의 순간순간은 동물적이다특히 이 게임의 장에 새로이 진입한 인간’ 모리타는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적인 면에서 성장한다.

 

 

3.


 11권으로 구성된 <은과 금>의 서사가 막바지에 치닫는 10권에 이르러모리타는 은퇴한다그의 은퇴 사유는 악당들과 함께 있다 보면내 인격까지 변해버릴” 것이 두려워서였다그는 금왕이 되려던 자아실현의 꿈을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버려야 했다. <베가본드>(타케히코 이노우에)의 미야모토 무사시가 내려오지 못한 그 죽고 죽이는 나선을 내려온 것이다모리타는 긴지와 그 게임의 세계에서 발을 뺐다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이런 모리타의 발 들여놓음과 발 뺌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만화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성장소설은주요 인물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갱신을 그 요체로 한다. <은과 금>에서의 모리타의 경우도 발 들여놓음이 금왕이 되어보려는 자아실현의 꿈의 소산이었다면 발 뺌은 인간으로 남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면에서 역시 자아에 대한 고민과 닿아있다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자아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이처럼 <은과 금>을 성장소설의 서사로 이해할 때모리타의 성장은 악운의 레벨 업이 아니라 그가 꿈꾼 자아실현이 인간됨의 포기로 이어진다는 모순을 깨닫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성장이 성장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 성장인 셈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에서 같은 기표가 다른 기의를 지시하듯이앞뒤의 두 성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이들은 돈과 악의 체계 안에서의 성장과 그 체계 밖으로 나가면서 시작되는 성장을 각각 지시한다따라서 시점의 차이에 따라 전후의 기표는 성장과 퇴행으로괴물화와 성장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그러나 모리타를 바라보는 시점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리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점이 어느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내가 걷고 있는 과정은 어떤 성장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장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됨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순간을 우리는 꽤나 자주 경험하거나 목도한다긴지와 모리타가 살인만큼은 피하면서 지키려 했던 인간됨이지만그것은 생명을 방어할 뿐 사람 그 자체를 지켜내지는 못하는 것이다그들의 승부는 결국 패자를 만들고 말았다폐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패자와 그 참혹한 모습에 놀라는 모리타가 한 컷에 담긴 <그림2>는 승부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패자=폐인을 만들며 승자가 되거나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자=폐인이 되거나결국 모리타는 승자가 되는 과정을 거듭하며 금왕으로 상징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다가가는 여정을 중단하고인간이라는 약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그의 선택은 김예슬 선언에 상응하는 것이다그 선택 이후에 대한 의문이 김예슬의 삶에나 그의 삶에나 여전히 맴돌지만.

 

  

<그림 2> ⓒ후쿠모토 노부유키

 

은퇴 후 모리타의 삶에 대해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그것이 성장하면 할수록 비인간적이 되어가는 어두운 세계의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과연 어두운 세계에 바깥이란 게 있는가또 설혹 가 완전히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내 밖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두운 세계와 그 안에서 자아를 획득하며 잃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래서 긴지는 모리타에게 말한다. “만약 악을 꺾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즉그 이상의 악새로운 악당세대교체다그러니까 자네가 누군가를 구한다거나지켜주고 싶다면차라리 뛰어올라거악(巨惡)으로!” 그리고 그는 그의 길을 계속 간다. “재가 될 때까지.”

 

 

사족당연하게도 선한 자아와 선한 세계를 모두 얻을 길은 요원하다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다하지만 자아를 악에 젖게 만들면서라도 그가 추구하는 세계를 얻으려 하는 긴지의 선택과악한 세계를 그대로 두고 최대한 멀리서 선한 자아를 되찾으려는 모리타의 선택 역시도 미완의 프로젝트이다결국 가장 쉬운 길그리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은 악한 세계에 맞는 악한 자아를 계발해 나가는 길이 되고 만다.이런 상황 속에서가장 쉬운 길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흑과 백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나는 얼마나 더 백에 가까운 회색이 될 것인가’ 그리고 검은 세계를 얼마나 더 하얗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 되고 말지 모른다하지만 결국 자아와 세계를 모두 잃지 않을 길은 그 길 뿐이다.

 

 

 

 

 

 

 

 

 

 

 

 

 

 

 

<싱크> 6호에 기고한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