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 14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어두운 만화들 - 『우리집』과 『검둥이 이야기』
1.
어린이 장기밀매를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 『어둠의 아이들』의 작가 양석일이 독자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어둠에 사는 사람은 빛의 세계가 대단히 잘 보입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어둠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사이바라 리에코의 만화 『우리집』은 독자를 어둠의 세계로 데려간다. 작품 속 우리집을 중심으로 한 어둠의 세계에서는 온갖 어두운 일들이 벌어진다. 살인, 인신매매, 강간, 매매춘, 사기, 마약, 도박... 짧은 단어로 표현하면 너무나 무서운 행위들이다. 그런데 『우리집』의 어른들이 이런 무서운 행위들을 ‘저지르면서도’ 누군가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인간적 면모를 보여줄 때, 이 무서운 행위들도 어딘가 사람의 보편성과 닿아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말하자면, 인간은 정말 선하고 악하다. 마치 룸살롱에서 일하는 누나가 섹스를 하고서 사온, 그래서 니타와 잇타에게 “정말 맛있고 정말 맛없는” 케이크처럼 말이다.
한 사람 안에도 착한 인간과 나쁜 인간이 공존한다. 고이치 형은 톨루엔(본드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주성분)을 팔지만 마약은 팔지 않는다. 이 약팔이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일회용휴지를 나누어주지만 여성과 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악을 행할 때에도 선을 지키는 원칙이다. 주인공 니타의 형 잇타는 누나와 동생을 위해 돈을 벌려고 집을 나가 고이치 형과 함께 활동한다. 구역을 관리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 차에 일부러 부딪히고 칼로 사람을 찌른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잘해주기만 한다.
마찬가지로 인류라는 존재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생명을 잉태하는 자와 생명을 죽이는 자가, 환경을 지키려는 자와 환경을 이용해 이윤을 만들어 내려는 자가, 어둠의 세계를 그려서 빛의 세계에만 있는 독자들이 못보던 것을 보게 하려는 작가와 어둠의 세계를 왜곡하고 선정적으로 묘사해서 빛의 세계의 독자들이 그 어둠을 이야기 속에서까지 착취하게 만들려는 작가가 모두 존재한다. 앞서 얘기했듯 심지어 그 둘은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잉태하는 자와 죽이는 자가 같은 한 사람일 때, 잉태의 값은 지워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는 살인자로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우리집』의 미추(美醜)가 엮어내는 감동의 힘이다. 쓰레기로만 바라보던 공간에 꽃도 피어 있고, 지상 최악의 악한으로만 생각했던 이에게도 선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독자가 인지하는 순간,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의 공간적 거리가 짧아진다. 두 세계에 사는 이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것이, 그냥 타인이 아니라 동일자인 타인임이 드러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 타인의 지옥이라는 점에서 나와 타인은 같다. 우리는 지옥으로 만나 서로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니타처럼, 슬플 때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웃을 수 있다. 어둠을 인정하며.
3.
(『검둥이 이야기』 관련 스포일러 있음)
최근 완결된 웹툰 『검둥이 이야기』(이하 『검둥이』)는 제목처럼 어둡다. 윤필 작가의 전작 『흰둥이』, 『야옹이와 흰둥이』의 세계도 밝지만은 않았건만, 『검둥이』는 확실히 더 어둡다. 그 세계 속에서 독자들은 돈의 추악함을 본다. 물론 돈은 인류만의 문화다. 아니, 그러고 보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돈의 추악함이 아니다. 투견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며 “이건 모두 돈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던 검둥이는 싸움 막바지에 이르러 철창 밖 사람들을 보며 깨닫는다. “돈이 나쁜 게 아니라, 저 돈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손이 나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손은 돈을 쥐게 되는 그 순간 악으로 물드는 것일까?
『검둥이』의 세계는 『흰둥이』의 세계와 닿아있다. 『검둥이』는 『흰둥이』의 사이드스토리로서, 흰둥이가 크게 아팠을 때 치료비를 대준 수수께끼의 누군가가 바로 검둥이였다는 점에서 『흰둥이』 이야기와 이어진다. 독자 입장에서 정말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순한 연결점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치료비는 두 세계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검둥이』의 주제의식을 선명히 살리며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도 『흰둥이』의 독자가 검둥이의 세계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치료비는 돈이다. 돈의 용처에 따라 그것은 도박의 판돈이 되기도 하며 치료비가 되기도 한다. 다시 또 돈은 출처에 따라 도박에서 딴 돈이기도 하고 뺏은 돈이기도 하며 노동으로 번 돈이기도 하다. 『검둥이』의 이 장면에서 그것은 사채업자가 벌어들인 검은 돈이며, 검둥이가 자신의 몸을 담보삼아 빌린 돈이며, 흰둥이의 생명을 살리고 미래의 눈물을 그치게 한 착한 돈이다. 그 치료비의 출처와 용처가 극과 극이기에, “돈을 쥐고 있는 손”의 악덕이 다시 한 번 폭로된다.
‘쥐고 있는’ 것은 출처와 용처와 상관없는 소유욕의 실천이다. 특히 투견 도박에서 그 손은 돈을 더 많이 쥐기 위해서만 쥐는 행위를 잠시 그만둔다. 돈에 대한 소유의 열망, 그것이 “돈을 쥐고 있는 손”의 악덕이다. 그것은 돈을 더 많이 불리기 위한 용도 외에 다른 용처를 찾지 않는다. 그것은 출처를 상관하지 않는다. 불법성도 비인간성도 동물의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만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가하다. 누군가가 죽어가도 그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놓지 않는 것이 그 손이다. 그런데 검둥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바로 그런 손을 가진 것만 같은 인물, 사채업자를 따라간다. 이 만화가 정말로 어두운 만화라는 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검둥이가 착하기 위해 악할 수밖에 없는 이 마지막 상황은, “흰둥이가 있는 곳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검둥이의 세계를 아스라이 그려내며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검둥이가 흰둥이의 하모니카를 들으며 방긋 웃을 때 가슴 뭉클했던 독자들은, 검둥이가 바로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서, 사냥꾼의 일을 돕고 투견을 하며 주인의 돈을 벌게 해주듯 사채업자의 일을 돕게 될 것을 가슴 아파한다. 비록 미래처럼 ‘검둥이’라고 불러주는 남자이건만,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몸을 팔았던 검둥이가 다시금 흰둥이를 위해 몸을 파는 이 상황은 좀처럼 견디기 어렵다. 이렇게 만화가 끝이 나면서, 검둥이의 어두운 세계는 흰둥이의 조금 더 밝은 세계, 독자가 살고 있는 어둡고도 밝은 세계를 드러내며 이어진다. 어두운 만화로서 그 존재의의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어둠까지도 환히 보이게 하며.
4.
사실 서두에 인용한 양석일 작가의 말에는 한 구절이 더 있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어둠에 사는 사람은 빛의 세계가 대단히 잘 보입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어둠의 세계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빛의 세계에 살면서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며 그것을 보려 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양석일 작가는 『어둠의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사이바라 리에코는 『우리집』을 윤필은 『검둥이』를 보여주었다. 그 세계에는 가난이 가득하고, 사람이 사람과 생명에게 저지르는 폭력이 가득하다. 그 어둠의 기원을 미묘하게 드러내며, 어둠 그 자체로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든다. 물론 빛의 세계에 사는 독자들이 이 작품들에서 ‘이야기’만을 보고 그 속에 담긴 어둠을 외면하지는 않았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장치는 외면하는 독자들마저 직면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로 어둠을 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비평은 그저 조금 거들 수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