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파서(혹은 게을러져서?) 포스팅이 너무 소홀한데 그럴 때 가장 반가운 게 과거에 써두고 올리는 걸 깜빡한 원고인듯 하다. 오늘 마침 박희정 작가님 존안을 뵈온 기념으로 당장 올려둔다.
<빅이슈> 54호에 기고한 글.
<미생> 다음엔 이 만화를!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 생활 하겠어? - 모두가 함께 읽는 성희롱 이야기>
박희정 지음 | 길찾기
크든 작든 세상에 실제로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만화가 가끔 출현한다. 최근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이 특히 그렇다. 바둑 붐이 다시 일어나는 변화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만화를 읽은 독자들 사이에서 직장인들의 문화와 시스템이, 그리고 노동과 노동자 자체가 새롭게 생각되고 있지 않은가.
위 만화들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이하 <당신, 그렇게> 는 그런 영향과 변화로 이어질 만한 잠재력을 갖춘 만화다. ‘성희롱’이라는 오염된 말을 다시 올바르게, 일상 속으로 이끌어온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사실 지난 20년간 성희롱이라는 말 자체가 희롱과 조롱의 대상이었다.(“성이 롱”이라던 옛 개그를 떠올려도 좋다.)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남성 중심의 시선은 ‘경직되고 까칠한 여성주의(페미니즘)’라는 편파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성희롱 개념과 실천 역시도 그런 식으로 재단해 왔다. <당신, 그렇게>는 이런 현 상황을 ‘리셋’하는 옹골찬 시도다.
제목부터가 그 시도를 담고 있다. 제목을 말풍선 속에 넣고 말하는 사람을 그려보자.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는 직장에서 남(타인 혹은 男)들이 성희롱 피해자의 반발 앞에서 던지는 말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이다. 그런 남들의 말에 대한 개념 찬 응답이자 대처비법서가 바로 이 만화다. 성희롱 대처법까지만 소개했더라면 흔한 자기계발서나 처세서가 되었겠지만, 이 책은 훨씬 더 진지하고 깊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성희롱의 역사와 그 풍부한 사례를 친근하면서도 날것 그대로의 감각을 주는 그림체로 알기 쉽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읽다보면 깨닫게 된다.
성희롱 처벌이 법제화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성희롱은 여전히 익숙한 차별이다. 익숙해서 사소한 것만 같고 차별조차 아닌 것만 같이 여겨지는 성희롱은, 그러나 한 사람의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을 망치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차이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불균형을 근본으로 하는 모든 사회적 추문의 대표적 증상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의 편집장이기도 한 박희정 작가는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짚어내며 ‘성희롱 없는 세상을 위하여’(3장 제목) 나아간다.
이 만화가 널리 읽히기만 한다면, 우리 직장 생활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 같다. 이 글만 읽어도 피해 경험이 떠오르는 여성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사서 읽고 가해자 남성에게 선물하자. 부드러운 응징이자 강력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다. 성희롱 같은 건 당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실제로는 성희롱의 피해자였거나 암묵적 동조자였을지도 모르므로. 이런 문제가 회자될 때마다 딸과 누나와 여동생을 떠올리며 피해여성의 가부장적 보호자로서 문제를 인식하는 남성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직장에서는 바로 당신이 늘상 가해자였을 공산이 높으니까. 모든 여성에게, 또한 남성에게 권한다. <미생> 다음엔 이 만화를!
- 조익상: 문er라는 필명으로 인문교양 만화잡지 에서 만화비평을 절찬리 시도하고 있다. 만화 추천이 취미이자 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