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C 10호]에 게재한 1편에 이은 2편입니다.
1편: http://blog.aladin.co.kr/literaturer/5901624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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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나는 제목 그대로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에 대해 논해왔다. 앞글에서 그 생산물로 지목한 것은, 일종의 착시와 착각이었다. 한정해 말한다면 그 생산물은 진짜 큰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는 일 바로 그것이다. 물론 강호순은 실재하며, 그가 벌인 범행 역시도 문제이다. 하지만 강호순이 용산참사와 같은 시기에 (BH의 의도에 의해) 미디어 속에서 활개를 치게 되는 바로 그 때, 용산참사를 만들어낸 그 누군가는 숨을 곳을 얻는다. 정치적인 상황을 더 명백히 밝히자면 살인청부업자 배태진이 연쇄살인마 권시우를 사람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며 비난하듯, 더 크고 많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강호순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숨기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이 앞선 글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핵심이었다.
그 핵심을 그대로 껴안고서 뒤이어지는 글을 시작하기 위해 ‘상상된’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상상되었다는 말은 그 자체로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재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그것이 구성되었고 그려졌음을 의미한다. ‘상상된(imagined)’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심상(心想), 묘사 등으로 번역되는 이미지(image)이다. 심상 이전의 물적 이미지는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그림으로 된 것이든 문자로 된 것이든, 어떤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그 묘사가 심상으로 화한 것이, 독자-대중의 상상(imaginary)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은 마치 실체인 것처럼 ‘착각’된다. 잘 알려진 우화대로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질 때, 그 장님의 머릿속에서 코끼리가 나무 등걸과 같은 것으로 착각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시에, 착각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 때 이미지는 단지 시선을 붙들어 맬 뿐이지만, 누구든 이 이미지를 계속해서 응시하게 되는 한 유사한 다른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며 따라서 다른 상상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앞을 가리고 있다. 마치 배태진이 권시우와 그의 살인 행위를 보느라 자기 자신의 살인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현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강호순에 대한 기사가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며 대중들이 그것에만 시선을 쏟게 될 때, 용산참사는 보이지 않고 공권력이 살인범일 수 있다는 상상 역시 불가능하다.
두 번째 글이 시도하는 것은, 이런 착시와 착각을 만들어내는 이미지, 즉 웹툰과 문화상품 속 ‘상상된 살인마’를 보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살인마를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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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보고 싶을 때면,
창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 조니 에크
(스테판 오드기, <괴물>에서 재인용)
문화상품 속 살인행위 및 살인마의 심미화야말로 착시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과정이다. 단, 문화상품 속에서 이것은 강호순 사건 관련 뉴스를 유포해 이러한 착시효과를 의도한 BH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들)의 유포에 의해 벌어지는 효과이다.
계속해서 응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문화상품의 존속과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문화상품은, 특히 상상된 살인마를 그려내는 문화상품은 매력적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매력은 살인마 캐릭터를 심미적 대상으로 그려내고 살인 과정을 심미화하는 데서 부여된다. 역설적이게도 살인마와 살인 과정이 심미화되면 될수록 독자의 혐오는 증폭되는데, 이는 그 아름다움이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행위의 잔인성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그림 1-1> ⓒ팀겟네임
<그림 1-2> ⓒ팀겟네임
한편으로는, 살인마의 일상과 그 소유물들이 심미화된 퍼즐 조각으로 제시되면서 독자는 그 퍼즐 조각들을 살인 행위에 맞추어 조립하는 역할을 떠안게 된다. 이를테면, 오재욱이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의 가죽 케이스도, 권시우가 잠을 자는 침대도 모두 살인마라는 그들의 정체성과 관계된 사물로 이해된다. 가죽 핸드폰 케이스는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피해자 여성의 살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소품이 일절 없는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권시우의 침대는 “기분 나쁜 새끼”라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그림 1>) 미적인 것을 구성하는 가정 중 하나인 통일성이 살인마의 일상을 살인 행위와 연결 짓는 규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을 바라보는 응시 자체는 관음증이라는 도착적 감성과도 닿아있다. 작품 전체가 살인마의 삶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 관음증적 응시이기도 하지만, 특히 살인 행위의 장면이 아닌 일상에 대한 응시는 살인마를 그의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삶까지도 바라보며 어떤 뒤틀린 이해를 도모한다는 면에서 더욱 도착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호순 검거 후 그의 삶 가운데 살인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단서와 풍경까지도 사진기사화 되고 일상이 낱낱이 밝혀졌던 것을 상기할 수도 있다. 많은 증언에 의하면 그는 성실한 젊은이였고, 담배를 피우지 말고 오래 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치밀하고 계획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과 개를 안고 있는 사진 등은 그의 범죄와 연결되며 완전히 다른 기이하고 괴이한 느낌과 이해(“기분 나쁜 새끼”)로 전환된다.)
<그림 2> ⓒ순끼
이렇게 심미화된 응시는, 그 대상에 대한 집중을 강화하고 시야를 제한하여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응시는 이러한 효과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마임이 밝혀진 인물이 괴물로 인지됨과 동시에 그의 일상이 그 괴물성을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괴물성을 잠시 배제해 볼 때, 그 응시가 드러내는 것은 ‘그도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명제이다. 이는 <치즈 인 더 트랩>(순끼, 2012)이 창조한 새로운 사이코패스 유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지적 지성과 유려한 외모에 재력과 원만한 성격까지 갖춘 완벽남 유정은, 홍설과 독자가 그에 대한 호감과 의심을 오가게 만드는 인물이다. 특히 <그림2>는 유정에 대한 호감을 자아내면서 의심을 무너뜨리는데, 이는 앞서 제시한 여러 엄친아적 요소와 달리 그의 평범함이 자아내는 효과다. 타인과 자신의 교감(사진)에 대한 응시에서 웃음을 머금는 그의 인간다운 평범함은 일차적으로 독자의 그에 대한 동일시를 형성하며 이후에 만들어낼 의심과 반전의 교두보가 된다.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반응은 <그림 1>의 배태진이 보여주는 반응과는 정반대이다. (이 작품은 이 글의 주제에 수렴되지 않는 독특한 면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논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유정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유년 시절의 스케치와 최근 연재분의 폭력적 응징 씬을 통해 괴물성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점, 그럼에도 독자와 홍설은 아직 그에 대한 인간적 호감을 거두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다른 지면을 기약한다.)
다른 웹툰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아도 유사한 지점이 포착된다. <교수인형>(팀겟네임, 2006), <살인자ㅇ난감>(꼬마비/노마비, 2011)의 주인공들은 살인마이지만 독자는 그에게서 공감을 철회하고 혐오로 태도를 전환하기가 쉽지 않다. (스포일러 有)
<그림 3> ⓒ팀겟네임
먼저 <교수인형>은 서스펜스 장르의 단골 아이템인 이중인격 및 형사=범인 공식과 영화 <올드보이>(박찬욱)의 최면요법 등을 서사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웹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4인방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물인 주태일을 통해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종반부에서 그가 냉혹한 어린 살인마 ‘붉은 KKK’(이하 KKK)였던 과거에 맞닥뜨리게 된다. 태일은 S대생으로 상당한 지적 수준을 소유했으면서도 동시에 털털하고 허술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를 서사 속에서 관찰해온 독자들은, 동일시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가 KKK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어지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과거 KKK 일당의 피해자였던 김민수가 그들을 죽이려 할 때, KKK와 태일을 분리하여 괴물 KKK가 아닌 인간 태일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태일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할 때 가장 극적으로 질문된다.(<그림 3>) 민수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태일이 자신을 괴물이라 승인하는 순간 그가 인간이라는 점이 강력하게 인식된다. 뉘우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괴물이자 인간인 존재, 혹은 한때 괴물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은 존재에게 죽음을 선고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답을 해야 하는 독자 그 자신이 인간이라는 동일성 안에 태일과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림 4> <살인자ㅇ난감>은 우리가 스스로를 ‘처단’할 수 있는가 하는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꼬마비,앙마비
<살인자ㅇ난감>(이하 <난감>)은 서사 전개의 순서와 설정이 <교수인형>과 정반대다. <난감>은 평범한 인물인 이탕이 미드 <덱스터>의 주인공처럼 살인마를 죽이는 살인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시간 순서를 따라 그려나간다.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는 편의점 알바생 이탕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죽인 자가 죽어 마땅한 살인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그는 자신이 잘 하는 것-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살인마를 감지해 내어 죽이는 일이라고 믿게 된다. 경찰 기록을 조회해서 자신이 죽여도 되는 살인마를 찾아내 죽이며 자신의 살인욕구를 해갈하는 덱스터와는 달리, 이탕은 누군가를 죽이고 보면 그 대상이 살인마임이 드러나며 개인적 욕구가 아닌 뒤틀린 사회적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 정의감과 사명감이 개인적 공명심(功名心)의 다른 이름임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탕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인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의 평범한 과거와 살인 대상의 특이성을 지속적으로 응시해온 독자로서는, 작가에 의해 배심원으로 초청받고서도 이탕을 심판하기가 쉽지 않다. 강호순에게 당연히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부르짖고, 아동 성추행범에게도 화학적 거세로는 부족하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독자라면 이탕을 숨은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인 마당에는 더더욱 그렇다. 다시 더더욱, 그런 독자일수록 살인마 이탕과 내면적으로 동일한 괴물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괴물만이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01=10 ?
잡담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잡담을 하고, 빈둥거리고 싶은 사람은 빈둥거렸지. 남의 시선만 끌지 않으면 되었으니까.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노래를 불렀어. 용기를 내기 위해 특별한 노래를 고를 필요는 없었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노래라든지, 투치 족을 욕하거나 조롱하는 노래 같은 건 안 불렀지. 굳이 용기를 북돋울 노래가 필요한 건 아니었거든.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전통 가요 같은 걸 불렀어. 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러다 늪지에 이르면 무작정 땅을 판 뒤에, 멈추라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사람을 죽였어.
- 투치족 민간인을 학살하고 복역 중인 후투 족 군인,
『칼의 계절』(장 하츠펠트, 2003.)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여러 유형의 ‘상상된 살인마’들을 만나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만나볼 유형은 바로 이런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가 살인마인 경우이다. <인터뷰>(루드비코, 2010)와 <멜로홀릭>(팀겟네임, 2011) 등의 작품들은 살인을 그리는 작가가 더 리얼한 묘사를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 과정과 피해자의 반응,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황을 그려내는 것을 그려낸다. 다시 말해 살인을 그리는 작가가 그 작가적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이 작품들 속에 내재된 살인마=작가의 논리이다. 살인마와 살인행위를 심미화 하는 양식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설정이야말로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두 가지 테제를 명징하게 뒷받침하는 예이다.
<그림 5> 우발적으로 첫 살인을 범한 평범한 이탕과 연쇄살인마가 된 이탕
ⓒ꼬마비,앙마비
먼저는 앞서의 많은 작품들 속 살인마들을 응시하며 포착한 바대로, 인간과 괴물은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괴물은 평범한 인간의 다른 모습이다.(테제1) 이러한 점은 설혹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괴물의 내면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판결 내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변한다. 괴물에 대한 교과서라 할 『괴물』(스테판 오드기, 시공사)의 마지막 챕터 <오늘날의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 사이코패스 살인범’과 ‘영화: 괴물은 우리 가운데 있다’를 소챕터로 하여 인간 안의 괴물을 고찰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드러내듯이, ‘상상된 살인마’가 생산해 우리에게 건네주는 또 다른 생산물은, 그것이 ‘우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더 중요한 다음 테제로 가는 다리를 놓는다.
『괴물』에서 <오늘날의 괴물>의 이어지는 소챕터인 ‘대량 학살: 인간의 비인간성’의 한 대목을 옮긴다. “크메르 정권의 킬링필드, 르완다 대학살, 소련의 굴락, 나치스의 대량 학살 강제수용소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정에서 국가공권력에 대항한 죄로 재판정에 선 문규현 신부도 최후진술에서 검찰과 경찰을 지목하며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나치 아우슈비츠 교도소장으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1급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자신은 죄가 없노라고 강변했습니다. 자신은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습니다. 자신을 구조와 체제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악의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다리를 통해 걸어가 만날 다음 테제는 바로 인간이 ‘악의 집행자’가 되는 원리이다. 이는 작가=살인마와 같이 “자신을 구조와 체제의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주체까지도 껴안는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가장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할 때, 누군가 죽어나가는 일이 일어난다.(테제2) 사람이자 직업인이어야 할 주체가, 사람이길 포기하고 직업인으로만 그 정체성을 분할해 활동할 때 괴물은 만들어지고 그 괴물은 본인을 포함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ideology)가 정체성(identity)이 되는 순간부터 이드(id)라는 이름의 괴물이 깨어나 살인이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이고 쾌락원칙에 속한 이드는 끝없는 충족을 요구한다. 이 때 이드를 깨어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민족, 국가 등 익히 알려진 신념 체계와 함께 기업의 이익, 직업적 성공, 예술적 성취, 단체의 존속 등을 모두 포괄한다. 달리 말해 이데올로기는 개인 안에서 작용하는 ‘전체’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활동 속에서 개인은 전체 속의 개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된 살인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응시에 의해 뚫어진 살인마 뒤편에 서 있는 것은 ‘전체’로서 ‘실재하는 살인마’들이다. 우리는 눈을 돌리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상된 살인마’를 통해서 이 ‘실재하는 살인마’들을 보는 데까지 도달했다. 지금 여기, 2012년의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지목하고 싶은 ‘실재하는 살인마’는 공권력과 자본이다. 앞선 글에서 나는 용산참사로 대표되는 살인현장의 공권력을 ‘상상된 살인마’와 더불어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이번 글에서는 본문을 통해 상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자본을 그렇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윤태호
<미생>(윤태호)의 한 장면과 함께 길었던 글을 마무리하자.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부제로 ‘未生’을 뜻풀이하는 이 만화에는 이 글의 제재인 ‘상상된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生’이 ‘死’의 대척점에 있는 글자인 까닭에 장그래로 대표되는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가 ‘이미 죽은 자’의 분향소에 찾아간 이 장면은 생과 사가, 또 그 경계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그러나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의 목표를 훌쩍 넘어서는 지점이기에, 좌상단의 문구에 주목하기로 하자. “해고는 살인이다” 이 말대로, 이 영정은 살해당한 자의 초상이다. 그렇다면 살인범은 누구인가?
*변명 혹은 앙망문 - ‘상상된 살인마’를 그린 작품들로 인해 독자들이 진짜 살인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효과를 밝히는 것이 앞선 글의 핵심이었다고 이번 글 서두에서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상상된 살인마’를 그린 웹툰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데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나쁘거나 무용한 작품’이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단, 문화상품 속에서 이것은 강호순 사건 관련 뉴스를 유포해 이러한 착시효과를 의도한 BH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들)의 유포에 의해 벌어지는 효과이다.”라고 밝혔듯 그 효과는 작가의 의도와도 상관없으며, 작품 자체의 가치와도 거리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룬 작품들은 예외 없이 극적 완성도가 뛰어나고 즐거운 형식 실험을 담은 이 장르의 보석 같은 작품들입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웹툰 작가들이 어떤 사회적 지향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재미있고도 의미 있는 작품을 추구했으면 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이 쪽이 더 어려운 요구이긴 합니다만.) 비평은 작품이 나온 사후에 그 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논할 수 있으되, 작가는 그것을 참고한다 하더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 글로 인해 작가적 상상력이 침해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독자 분들께는 조금 더 간곡하게, 작가님들이 힘들게 만든 작품을 조금 더 뚫어져라 응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다보면 어떤 작품이라 해도, 설혹 그것이 정말 쓰레기 같은 창작물이라 해도, 거기에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가 늘 포함되어 있으니,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만화 비평을 하며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것을’ ‘재미있게’ 그리고 읽고 나눌 수 있는 만화 세상입니다. 서투른 글이나마 쓰며 돕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찰진 독해를 앙망仰望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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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코, <인터뷰> 단행본이 출간되었는데 알라딘에는 없네요.
웹툰으로 꼭 보시길.
자본이라는 싸이코패스를 확인할 수 있는 쌍용자동차 문제와 관련한 책들
[SYNC 11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