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day trip
어제 밤에 급히 미라와 스카이프로 대화를 하면서 잡은 일정대로 아침 10시 경에 Race Course에 도착했다. 그런데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미라가 없었다. 한참 기다리다가 옆에 무슨 관광안내소인지에 가서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 30분이다. 10시 20분까지만 기다리겠다고 한 거 같아서 그냥 거기서 생수 한 잔(여기 정수기도 온수, 냉수 꼭지가 다 있긴 하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을 들고 혼자서 터벅터벅 시장터로 발길을 옮기는데, 영국 와서 처음으로 정수된 물을 마시는 거라 어찌나 물 맛이 좋은지 감계무량해졌다. 일요일 오전마다 열린다는 이 시장터는 경주장 바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 꼭대기부터 내려가는 언덕으로 죽 펼쳐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부지도 넓고 장사치들도 북적거리고 사려는 사람도 꽤 많이들 와 있었다.

이런데 빠질 수 없는 핫도그 장사꾼들도 트럭마다 싣고 와서 군침 도는 냄새들을 풍기고 있었다. 시장을 좀 돌기 시작하니, 만나려는 사람은 없고 아까 버스에서 합승한 초등 선생 커플하고 또 지나쳤다. 그들은 시장구경을 한 뒤 Mother’s day라고 초대를 받은 다른 선생의 호스트 하우스에 가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들은 점심 초대도 받고 조금 부러운데다가 미라가 도대체 왔는지 안 왔는지 알 길도 없고, 벼룩시장이 정말 벼룩 시장처럼 보여서 슬슬 기분이 업셋되기 시작한데다가 풍겨오는 햄버거 냄새에 대충 어젯밤 남은 파스타(무슨 번데기 모양으로 생긴,여주인에 의하면 쉘 파스타란다)를 데펴서 먹은 위임에도 괜한 스트레스성 헝거가 느껴지기 시작해서 섹에 몇 달은 담겨 있던 비상 초콜렛을 연거푸 두 개나 헤치워 버리고 담아온 커피를 홀짝이며 그냥 건성으로 한 바퀴 도는데, 고물 값이나 받을만한 자전거들이 보였다. 트럭에 수리 도구까지 잔뜩 싣고 온 허연 턱수염의 아저씨가 팔고 있는데, 체인이 누렇게 다들 녹슨데다가 안장은 검은 전기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았다. 한국에서는 쳐박아놔도 누가 안 가져갈 것 같은 걸 얼마냐니까 100파운드라나? 기겁을 해서 체인 이즈 러스트 라고 했더니 아저씨 얼굴
색이 확 바뀌면서 자리를 떠 버린다.
참 친절하기도 하시지.. 좀 돌고 보니까 25파운드 짜리 철잔차가 훨 낫다. 그러고 보니 랭귀지 쎈터의 걸들은 전혀 이곳 삶에 도움이 안 된다. 자전거를 싸게 구하는 방법, 경찰 옥션 이용할 것, 이베이를 검색할 것, 그 누구도 벼룩 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해 준 바가 없다. 조금 기분이 나아져서 혼자라고 갈 요량으로 시장을 빠져나가는데 반가운 뒷 자태가 보인다. 미라가 시계장수 앞에서 물건을 보고 있는데, 이미 비닐 봉지가 꽉 차있다. 아무튼 누가 애 엄마 아니랄까 봐 애들 줄 물건은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그와 더불어 반가운 물건이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는데 손목시계였다. 한국에서 사오려다가 만 싸구려 디지털 시계, 형광색 벨트를 가진 장난감 같은 애들이었는데 기분 좋게 생긴 아저씨가 마누라 거라면서 50펜스에 팔았다. 이놈의 나라에는 좀체 공중 시계가 없어서 노와치人인 나로서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이건 완전 득템이다. 미라가 마침 그 곳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텐데, 마침 거기 있어서 기분좋게 시간까지 맞춰달라고 해서 사서 꼈는데 여간 생일선물이라도 받은 애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라가 나타나서 쇼핑의 여신처럼 시장을 다시 돌기 시작하는데, 그녀가 없을 땐 별로 의미없어 보이던 고물들이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여튼 그렇게 돌다가 미라는 딸애 준다고 인형을 더 사고, 나는 괜찮은 옷을 파는 여자를 만났다. 청 자켓인데 미디엄이라 좀 끼긴 했지만 살이 빠지면 무난하게 잘 입을 수 있을듯한 아이템이었는데, 안 산 것이 좀 아쉽기도 하다.
그렇게 한 바탕 쇼핑을 마치고, 프로미나드로 버스를 타러 가려는데 마침 스타벅스 쯤을 확 도는 시점에 프레드가 짠하고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의 본명은 기복..지금도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는 이름이다. 그의 캐릭터가 딱 그 이름 같다. 抵설탕 다여트 중이라는 못생기고 뚱뚱한 루스도 그만 보면 얼굴이 생글벙글해 진다. 강사고 학생이고 여자들로만 넘쳐나는 이곳에 한줄기 빛과 소금 같은 존재랄까? 그는 그런 행복을 느끼며 생활을 하는지가 궁금하다.
여하튼, 내가 한 오지랖을 발휘하여 안 그랬음 그냥 지 갈길 갔을 그를 한 패거리로 끼워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셋이 되어 스타라우드로 향했다. 가는 길의 풍광이 압권이라는 보니의 말대로 정말 이 투어의 정수는 46번 스테이지코치의 창유리 밖의 파노라마였다. 우리는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앞과 양 옆으로 펼쳐진 풍광을 맘껏 감상할 수 있었다. 이미 눈이 침침해지면서 다리가 쑤시는 것이 시장 구경만으로도 피곤해서 자리를 보전해야 할 지경이었겠지만, 이것저것 잡스런 수다를 떨면서 티를 안 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 이 저열한 체력이여! 46번 버스의 종착역에 내리니 그게 바로 스트라우드였다.

오는 길에 페인스윅이란 비슷한 동네를 스쳤는데, 프레드는 이미 어제 거길 갔다 왔다는데 에비가 좋았다고 한 것 같다. 여튼 미라가 정보 수집을 한 덕에 바로 뮤지엄으로 향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스페셜 엑스비션으로 그 지역 산과 들에 필만한 꽃이 화려하게 채색된 캔버스가 큼지막하게 전시된 홀 입구에는 공짜 비버리지가 주욱 차려져 있었다.

마셔도 되냐니까 예쁜 여자가 웃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권해서 레드 와인을 마시며 그림을 구경하는데 와인이 너무 맛있는게 아닌가? 너무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것이 완전 브렌드 네임을 알아왔어야 하는데 아쉬울 정도였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차려진 스넥 안주도 어찌나 맛있는지 거의 점심밥을 거기서 해결했다. 그림도 멋지고 와인도 맛있고 기분이 좋아져서 연신 그림 앞에서 셔터를 눌렀다.

뮤지엄 가는 길에 지나간 파크에는 청둥오리와 백조 한 쌍이 있어서 이것들과도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참으로 평화스러운 풍경이어서 왜 영국인들이 나이 들면 이곳에 돌아와서 살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된다. 그나저나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원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또 공간을 할애해서 공원을 만들고 사람들은 거기 나와서 노는 걸 보면 참 재밌다. 엄청난 산골짝임에도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더러운 백인 아기를 산책 시키거나 다양다종한 애완견들을 끌고 나온 것이 눈에 자주 띄었다.
특별 전시관을 지나서 상설 전시장으로 가니 스트라우드의 문화사들이 일목요연하게 잘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전거, 담뱃대,목욕탕, 빨래, 바느질, 퍼머하기, 펍pub의 역사 등 그냥 시시콜콜한 생활모습들을 꽤 재밌고 소박하게 잘 전시해 놓아서 하루 종일 구경해도 재밌을 만한 곳이었다.

무슨 구석기 청동기 해 가면서 왕관이나 의관 같은 소위 주류의 역사만을 홍보해 놓는 한국의 군립박물관하고 비교해도 더 교육적이고, 더 살아 숨쉬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게다가 특별 전시가 있으면 음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완전 무료인 곳이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더 있으면서 안내판을 꼼꼼히 읽으면 좋았을텐데 막차 시간이 4시 10분이라 그거에 맞추느라 대충 보다가 나갔다. 뮤지엄 건물 자체도 상당히 고풍스러웠고, 울타리랑 기둥에 사람 얼굴을 탈처럼 환조한 것을 붙여놓은 것이,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어서 재밌다. 뮤지엄을 나가니 버스시간이 한 이십분 정도 남아있어서 그 동네에 다운 타운에 딱 하나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costa커피숍에서 카페 라테를 젤 작은 걸로 시켜서 미라랑 쉐어를 하며 마시는데 확실히 여기 집에서 내가 매일 타먹는 커피 맛보다도 못한데, 이걸 2.4파운드에 사서 마신 것이다. 괜히 기분 망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커피 맛에 대해 코멘트를 하려다가 말았다. 알고 보니 프레드는 커피를 안 마신단다. 그가 또 나에게 결혼했냐고 물으니까 미라가 괜한 소리를 해서, 기분이 순간 화기애애해진 것도 같은데, 또 다음 날 만나니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서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여튼 이들 둘은 나하고 취향이 잘 맞아서 같이 돌아 다니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좋다. 게다가 둘 다 수준이 보통 이상은 되어서 말 상대도 되고 최소한 짜증나거나 지루하진 않다.
늦지 않게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놈의 엘리펀트 소굴에서 뭉기적거리며 일요일을 보내지 않았다는데 큰 의의를 두고 싶다. 그러다 보니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간을 멈추고만 싶다. 돌아가서의 휴유증을 생각하니 지금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