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온이 또 떨어지고 을씨년스럽다. 하루에도 해가 쨍쨍하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먹구름이 끼었다가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비는 계속 안 오고 있다

 어제 밤에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일찌감치 침상에 들었지만 전전반측, 어제 하루 고된 데이 투어를 마쳤음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자정에 다시 불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 또 방 광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 짓도 점점 염증이 날 지경이다. 토요일 이 집 전화기를 이용해 연락이 닿은 아줌마는 아직도 답변이 없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었는데아줌마도 친절하고 호의적이라 잘 될 거 같았는데 정말 실망이다. 문제는 소스가 점점 줄어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격이 좀 낮은 곳은 질이 형편없다. 또 대여섯 개의 이메일을 날린 뒤에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별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 그나마 수업이 9시 반이니 8시 넘어서 일어나도 되는 게 좋긴 하다. 이것도 학교 방문이 시작되기 전까지만이지만.. 씨리얼을 대충 좀 말아먹고, 또 완숙이 되지 않은 계란을 싱크대에 서서 까느라 손을 다 데이고 아침을 해결하고는 어젯밤에 레프트 오버한 치킨 커리 라이스를 마이크로 웨이브에 덥힌다. 양이 엄청 많다. 두 끼는 족히 먹을 만한 양이다. 그나마 양이라도 많으니 가지고 가서 나눠 먹을 만하다.

  점심시간에 커리를 먹으려고 하니 나이든 여자샘(엄지 손톱이 마귀할멈처럼 무좀에 걸려서 죽어버린)이 러펙토리 바에 전자레인지가 무료로 사용가능하단다는 말에 한 번 시도를 해 봤는데 이거 정말 괜찮다. 언제 엘리펀트에 의하면 영국식 라면이라는 그 봉지라면 가져와서 끓여먹어 봐야겠다. 좀 짜긴 하지만 양도 적고 면이 얇아서 대충 물만 먹고 렌지에 돌려도 될 듯하다..ㅋㅋ 점심 메뉴가 점점 진화되는 중..

 참 점심을 먹기전에 수업 시간 사이 쉬는 시간에 사무실의 샬롯이 다시 우리 교실에 와서 편지를 전해줬다..난 이게 뭥미? 멍을 때리며 봉지를 뜯는데 아니 이게 어제까지 연락을 주겠다던 그 집주인 여자의 편지가 아닌가? 세상에,,, 지메일로 메일이 전송되지 않는다고 편지를 썼다며, 전화를 달라는 메시지였다. 알고보니 t를 잘 못 듣고 적었던 것이었다. 이래서 전화로는 중요한 정보는 전할 수 없다니까..

 그 편지가 내 기분을 180도 바꿔놨다. 그 전엔 상당히 꿀꿀했는데, 그 편지를 받자 무슨 축복이라도 받은 양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면서 참 기분이 좋았다. 그냥 한 통의 전화를 생까지 않고 신경 써주는 배려가 고마운 것이었다. 영국인에게 다시 호감을 갖게 해주는 중요한 일대 계기라고나 할까?

 게다가 운좋게도 커리를 깨끗하게 먹어치운 직후 찾아간 인터네셔널 센터에서도 편지까지 증빙자료로 내미니 지체없이 전화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또 더욱 기분좋게도 모바일도 아닌 집전화를 질이 잘 받아주어서 기분좋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이로써 오늘도 할 일을 한 건 했다는 성취감을 안고 길을 떠날 수 있었는데, 이런 알고 보니 여기 로완필드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때 있는 바이런 로드를 세상에 몇 십분이나 길에서 헤맨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계시로 느껴진다.

 구글 맵만 간략하게 수첩에다 적어 온 거에 의지해서 가다보니 너무 오줌이 마려워서 주유소에 가니 화장실이 없단다..여기는 주유소에 화장실이 없는 모양, 주유원이 별 희한한 질문을 한다는 표정이다. 바로 옆에 TGIF식당이 있어 헐레벌떡 가보니 문이 잠겨 있고, 또 뒤 쪽에 프리미엄 INN이란 건물이 있어서 가보니, 여긴 정말 술집이 아닌 여관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모던한 미국식 여관.. 유니폼을 갖춰 입은 이쁜 여자애가 프론트에서 전화를 받고 있어서 끝나기를 기다리자마자 바이런 로드를 물으니 컴퓨터로 검색까지 하며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근처에 사는 애들도 길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계획대로 화장실을 써도 되냐니까 친절하게 문앞까지 안내를 해준다. 여자에가 신호등에서 길건너서 좌회전 하라고 하는 말을 알아듣겠는데, 당쵀 기억이 안 된다. 여튼 그리고 나서도 한 대여섯번은 더 물어 봐서 바이런 로드에 들어서긴 했는데 이 동네는 확실히 주택가인데다가 중학생 즈음이나 그 보다 어려보이는 애들이 정말 많이 밖에 나와서 놀고 있어, 살기 안전한 동네라는 느낌이 팍 들었다.

  정말 어렵사리 동네를 찾기는 했는데, 이 동네는 다 길이름이 작가이름을 따와서 더 인상적이고 정이 간다. 셰익스피어, 키플링, 바이런 등등..그런데 어찌나 길 이름이 꾸불 꾸불 얽히며 설키며 바뀌는지 헷갈려 죽겠다. 이번엔 집 번호가 문제다. 63번까지 찾아는 갔는데 바로 65번으로 이어져 버린다..이게 또 뭥미냐?? 또 바로 코앞에서 마침 주차를 하는 여자에 물어보니, 무슨 프랑스 출신인지 희한한 억양으로 맞은 편 주택가 끝으로 가보란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그 말대로 하니 한 귀퉁이에 대분에 종을 단 그 질의 집이 있었다. 전화로 들은 목소리완 다르게 생긴 건 무슨 남자같다. 코 밑에 아주 연한 털이 아주 길게 자라 있는 것이 무슨 수염같아 보일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안쓰는 아주 독특한 여자인데, 레즈비언 같기도 한데 남편은 이스라엘에 있단다. 자유롭게 사는 스타일인 거 같다. 중학생 딸애도 이쁘긴 한데 무슨 머리 기른 남자애처럼 생겼다. 그래도 엄마 말에 의하면 요즘 틴에이저들 같지 않게 속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단다. 이 아줌마는 다른 집주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들어 가자 마자 자스민 차를 권하고 쿠키까지 갖다 준다. 아무튼 느낌이 다르다. 집도 정말 괜찮다. 이 가격에 얻기 힘든 집이다. 전체적으로 집이 좁긴 하지만, 엄마랑 딸만 단 둘이 사는 거니까,,게다가 방은 세 개인데 욕실은 두개, 변기만 또 하나가 더 있어서 화장실로 불편할 일은 없을 거 같고, 아줌마가 까탈스럽지 않을 거 같아 더 맘에 든다. 특별히 무슨 인터넷이니 세탁기 쓰는 거에 따로 돈을 받지도 않고, 자전거도 싸이클을 타고 다니는 게 취향도 나랑 딱 맞는다. 이 아줌마가 자전거에 대해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잘 못 알아듣겠다. 자기 자전거를 빌려주겠다는 건지 뭔지 정말 중요한 말은 항상 헷갈린다.

 여튼 아줌마와 기분 좋은 대화를 하고 왔더니, 엘리펀트 아줌마도 스프링 클린을 했다면서 침대 시트랑 이불보를 갈아놨다. 새 침대에 눕는 기분으로 격일에 한 번씩 하는 샤워를 오늘은 덤으로 한 번 더 해준데다가 눕기 전에 사진도 한 컷 ㅋ

 참 한 달여 만에 엘리펀트 아저씨도 인터넷 허브를 이층으로 옮기는 대대적인 공사(?)를 해 주어서 그나마 커넥션이 많이 양호해졌다.그래도 이놈의 인터넷 회사가 문제인지, 계속 끊기는 건 여전하지만..

 써비스로 감기에 몽창 걸린 엘리펀트아줌마에게 레몬티를 타주었다.
전체적으로 기분이 아주 좋은 하루였고 내일 질에게서 확답만 받으면 나는 더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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