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 남자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갈 길을 위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실 수 있나요.
처음에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구상할 때 저의 의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제목에 그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서 아련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는 소설을 쓰자, 달빛으로 이상한 힘을 받는 사람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의 사건을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기에 대해서는 다음 질문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원래는 이 두 가지 아이디어를 각각 발전시켜서 서로 다른 소설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두 구상을 합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는데, 조금 써보니 괜찮아 보였습니다. 주인공 남자가 사는 방식이나, 고등학교 동창인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그런 뒤에 덧붙이게 됐습니다.
그것도 사랑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믐…》의 사랑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익숙한 연애 서사의 변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환자가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에게는 불치병(아주머니)이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죽음을 맞으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남게 될 연인의 아픔을 생각하면 미리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지요. 그래서 연인을 대할 때 늘 죄책감이 듭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연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오해해도 연인은 진실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최후의 순간은 보는 사람에게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연인이 없는 곳에서 자살합니다. 그러면서 작은 선물들을 남기지요.
다만 《그믐…》에서는 남자가 앓고 있는 병이 특이한 종류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 여자가 그 병의 존재를 쉽게 믿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요.
네, 저는 그런 남자의 마음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청하지 않은 배려와 거짓말들이 그 표면에 안쓰럽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리고 불치병 환자의 사랑 이야기가 그토록 인기가 많은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함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결국엔 다, 죽어서 헤어지거나 죽기 전에 헤어지잖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20년도 살지 못할 강아지를 입양하지요. 이런저런 거짓말들―‘영원한 사랑’이라든가 ‘우리 마음 변치 말자’든가―로 서로 속고 속이면서.
● 이 글을 쓴 계기가 있으신가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말씀하시는 거지요?
위에 쓴 대로 두 가지 구상이 합쳐져서 쓰게 되었는데요, ‘그믐’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는 소설을 쓰자는 생각은 언제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달리 기억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그믐…》에 들어 있는 한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구상하게 되었어요. 아내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놀다 왔는데, 그 중 A라는 친구에게 B가 “네가 옛날에 C를 왕따시켰던 거 기억 나?”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A는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면서 정말 놀라더랍니다. 저한테는 그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앞뒤로 사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에피소드에 살을 붙이다가 《그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알바생 자르기〉 짧은데 여운이 오래 남았던 작품입니다. 사실 그렇게 경력증명서를 당당히 요구하고 퇴직금 정산이나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해보이게끔? 하는 알바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어떤 의미로 그런 알바생이란 인물을 구현했는지―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 궁금해요
중간관리자인 은영이 알바생 혜미를 타자화(他者化)하면서 적대시하게 되는 과정을 독자들이 따라가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알바생 혜미를 일부러 별로 정이 가지 않게 묘사했습니다. 혜미는 이런 소재를 다루는 픽션에 흔히 나오는, ‘착한 약자’라는 스테레오타입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착하건 착하지 않건 간에, 퇴직금과 4대 보험금은 알바생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겁니다. 알바생이 그걸 요구할 때 회사나 중간관리자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습니다. 최저임금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게으르고 사교성 없는 알바생이었다 해도 혜미의 요구는 전부 백퍼센트 정당합니다.
이것은 회사가 반드시, 그것도 즉시 들어줘야 하는 요구입니다(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현실과는 별개로요). 그런 요구를 한다고 해서 건방지다거나 은혜를 모른다고 알바생을 비난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오히려 알바생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은영의 회사는 그러지 않고, 은영 역시 점점 혜미를 경멸하면서 미워하게 되지요. 저는 그게 은영의 도덕적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가가 소설에서 부릴 수 있는 몇 가지 트릭을 이용해 독자를 은영 옆자리에 앉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은영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어, 은영 씨, 이건 아니잖아요’ 하고 불편한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악인도 아닌 보통 사람이 얼마나 은영 같은 태도를 갖게 되기 쉬운지, 역으로 혜미 같은 알바생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리한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은 독자들 일부는 ‘저 알바생 너무하는 거 아냐?’라며 끝까지 은영에게 동조하는 듯해서 좀 당혹스럽네요. 이런 수위를 조절하는 문제에 제가 아직 미숙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기법을 쓸 때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피드백을 받아보려 합니다.
● 작가님의 소설을 몇 권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최근에 몇 권 더 주문했고요. 그런데 정말 정말 궁금해서 여기에서 여쭈어봅니다. 《댓글부대》에 나오는 ‘맥플리커 증후군’에 대해 추가 정보를 알고 싶은데 검색해도 나오지 않네요. 혹시 영어 철자라든지, 다른 힌트가 될만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없을까요? 제가 누군가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인 것 같다는 소릴 들었는데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최근에 나름 심각하게 생각하던 중이었거든요. 작가님은 이런 정보는 어떻게 얻으시나요?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귀한 정보를…) 혹시 저처럼 계속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던 문제를 책 속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적이 있나요?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실은 맥플리커 증후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병입니다. 제가 지어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과 흡사하게 지어냈습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이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 먼저 검색하다가 맥플리커 증후군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저한테는 이런 가상의 병이 꼭 필요했습니다. 작중에서 아래처럼 묘사되는 증상 때문입니다. ‘관계 맺기를 거부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대인관계를 갖고 무리에 소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말의 뉘앙스를 못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맺기 어렵다, 다만 말이 아닌 글의 뉘앙스는 쉽게 파악한다.’
1차적으로는 저 증상 자체가 인터넷 중독에 대한 풍자였습니다. 그런 한편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터넷에 빠지는 게 아니라,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서 인터넷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도 인터넷 중독자들의 상당수가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아이러니이지요. 비극적이기도 하고요.
혼자 고민하던 문제를 책 속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는 일은 저한테도 자주 일어나고, 그때마다 기분 좋은 놀라움을 맛봅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융은 싱크로나이시티라는 좀 이상한 용어까지 만들어냈는데, 저는 그보다는 그냥 ‘도서관의 천사’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 한 편의 책을 집필하기까지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행복한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 소설은 대체로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제가 글을 쓸 때에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편입니다. 그런 스타일 때문인지 보통 절정 부분을 앞두고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발단이나 전개 과정에서는 흥미로운 설정이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 결말에서는 내부 논리에 따라 인물과 사건들을 수습하다 보면 이야기가 반쯤은 자동적으로 정리되는 면이 있습니다.
반면 절정에서는 고민해야 할 점들이 많아집니다. 폭탄을 하나 터뜨려야 하는데, 그게 앞에서 발전시킨 이야기나 인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하고, 소설 전체의 중심을 잡아줄 만한 폭발력이나 무게감도 있어야 합니다.
분량이 긴 소설을 쓸 때 더 그런 고민이 심해지는데요, 아무래도 분량이 길어지다 보면 주연급인 인물이 둘 이상 나오게 됩니다. 그들 각자에게 걸맞은 절정과 결말을 줘야 한다는 게 스토리텔러로서 제 지론인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 절정들끼리도 서로 상호작용을 해야 하고 배치도 적당해야 합니다.
여태껏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던 제 소설들은 일반적인 장편소설보다는 다소 길이가 짧은 편이었는데, 덕분에 그런 난점을 상당히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경장편소설이라는 새 트렌드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초고를 마쳤을 때입니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울트라 마라톤의 골인 지점에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때쯤이면 보통 쓰던 원고에 질려서 토할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낍니다. 다른 작가 분들 중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과 헤어지기 싫었다,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저는 정반대죠. 아, 드디어 끝났다! 다 썼다, 다 썼어! 아오 신발! 이런 기분이에요.
● 《댓글부대》를 읽으면서 이것이 픽션인 줄 알면서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작업하실 때, 취재를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대강 구상해 놓은 다음,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제가 쓰려는 이야기의 세부사항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인터뷰를 합니다. 그 반대로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료조사라는 핑계로 실제로 글은 쓰지 않으면서 에너지와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 방식대로 하면 어느 단계까지 구상해놓은 이야기는 있는데 꼭 필요한 세부사항을 취재하지 못해 마무리를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겠지요. 저도 실제로 그런 원고들이 있습니다. 아깝긴 합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야기의 뼈대를 먼저 잡고 취재는 그 다음에 하는 방식이 옳은 것 같습니다.
처음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하셨을 때 팬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실지…….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취재, 자료 조사, 묘사, 인물 만들기 등. 그 이후로 몇 작품을 더 읽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글을 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 먼저 개인적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꿈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작가님의 소설 혹은 작가님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는지, 궁금해요. 너무 추상적인가요? 그래도 궁금해서요.
정말 실무적인 차원에서 답을 드리자면, 제가 소설을 쓸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항은 ‘내가 지금 이걸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욕심이 듭니다. 그런 욕심이 많은 편입니다. 강한 문제제기로 토론을 일으키고 싶다든가, 의외의 소재나 전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다든가, 읽는 사람들의 가슴에 아주 깊은 상처를 남기고 싶다든가, 그런 것들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그걸 뭉뚱그려서 ‘권력의지’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그런 강렬한 문학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이 지나쳐서 제 발목을 잡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욕심은 있는데, 제 능력이 그에 따라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 취재를 못할 때도 있고, 묘사하고 싶은 심리나 분위기를 제 글쓰기 실력이 못 따라가는 경우도 잦고, 인물에 독특하고 그럴싸한 질감이나 깊이를 부여하는 작업에는 여전히 서툴기만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쓰지 못하거나 어정쩡하게 타협해서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을 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원고들은 지금 제 하드디스크들에 고이 보관되어 있죠.
어차피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쓸 것이기 때문에, 유비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심정으로 인내하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년이고 30년이고 꾸준히 노력해서, 예순이나 일흔에 엄청난 걸작을 남길 수 있다면 작가로서 아주 수지맞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작가로서 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했던 얘기를 답습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계속 몰아 부치되, 현재 실력으로 도저히 넘지 못할 고개를 당면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겠지요.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봐야겠다, 초고를 두 달 만에 써봐야겠다, 스릴러 기법을 연구해봐야겠다, 그런 과제들을 저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이 정도 이야기가 지금 내게 적당한가, 내가 잘 쓸 수 있을까’를 매번 따집니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 앞으로 기대하는 신진 작가들의 모습과 문학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저런 작가들이 나오면 한국소설판이 재미있어지겠다, 저와 비슷한 태도나 지향을 지닌 동료들이 생기면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간혹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은 거의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는 분들은 엄청난 바보이거나, 아니면 굉장히 맹렬한 분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이든 문학관이나 문학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장르소설과 순수소설, 그리고 현실비판적 경향이 강한 소설 등 여러 장르의 소설을 집필하시는데, 가장 작가로서 매력을 느끼는 분야와 앞으로 집필하기를 원하는 방향은 어떤 분야인가요?
●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제가 욕심이 아주 많아서, 예술성이 강한 소설, 장르적 재미를 주는 소설, 사회성이 강한 소설을 가리지 않고 다 잘 써보고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임스 엘로이, 제임스 M. 케인, 로스 맥도널드,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들을 제 롤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 작가님 소설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이 권할 수 있을 정도로 흡인력있는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문체에 영향을 미친 작가가 있다면 누군지 알고 싶어요.
문장에 대해서는 특정 작가한테서보다는 동아일보 데스크들한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신문사 데스크들은 긴 문장, 복문, 뜻이 명확하지 않은 표현을 극도로 싫어하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 성격이나 성향과도 잘 맞습니다. 신문기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제 문장은 결국에는 쉽고 간결한 형태가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문체는 성격의 반영이라고 보거든요. 하지만 그런 단순함을 추구하는 자세는 신문사 생활을 겪었기 때문에 분명 더 가차없어졌으리라 믿습니다.
신문기사체가 언제나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사체로 써서 얻을 수 있는 여러 효과가 있긴 합니다. 짧고 담백하니까 가독성과 흡인력이 높아진다든가. 반대로 기사체로는 건질 수 없는 문학적 가능성도 많다고 봅니다. 신선하고 풍요로운 언어 같은 것들이요.
사실 신문기사체는 실용적인 용도로도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신문기자들은 짧은 분량 안에 가급적 많은 정보를 넣는 훈련을 오래 받습니다. 지면이 한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밀도가 높은 문장은 읽으면 독자가 금방 피곤해집니다. 단행본이나 요즘처럼 웹이나 모바일 기반으로 텍스트를 소비하는 환경에 썩 적절한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런 밀도를 유지하려면 신문에서만 쓰는 독특한 문어적 표현에도 많이 의존하게 되지요. 이것은 영어권 국가의 신문기사체 역시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신문사 편집국에서 배운 그대로 문장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거창하지만, 제가 쫓는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저만의 문체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물론 신문기사체가 깔려 있고요.
● 기자 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지금 글을 쓰는데 어떤 도움이 되셨는지 궁금하군요.
● 《한국이 싫어서》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직 기자였다고 하시던데 그래서인지 한국이 싫어서도 마치 르포 기사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역시 기자의 경험이 책 쓰는데 많이 영향을 끼친 것 인가요?
기자 경험은 제가 소설을 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아주 많이 미쳤습니다. 소설을 쓰는 매 단계별로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제일 첫 단계부터 다른 소설가들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로 문학적인 단어는 아닙니다만, 제가 비교적 기획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그날의 트렌드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어떤 뉴스를 원하는가를 쫓는 훈련을 오래 받았고, 자연히 시의성 있는 소재를 구하는 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료조사와 취재 단계에서도 기자 시절 경험이 큰 도움이 됩니다. 해오던 일이니까요.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겠다, 이건 어차피 제대로 답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상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건 취재가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 걸 미리 어림짐작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감각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취재 능률이 크게 달라집니다.
셋째로, 몸이 찌뿌듯하다거나 좋은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핑계로 원고를 미루지 않는 직업인의 글쓰기 자세입니다. 이런 강박이 나중에는 어떤 문학적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만, 아직은 부지런히 더 써야 할 때죠.
마지막으로, 퇴고와 교정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편 아닐까 하는 짐작합니다. 기사 초고가 정말이지 난도질이 되어서 최종 지면에 실리는 게 신문기자에게는 흔한 일이거든요. 지적에 익숙합니다.
● 시리즈물을 출간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있습니다. 007이나 잭 리처 시리즈처럼 한 주인공을 계속 다루고 싶은 쪽은 아니고요, 특정 장소를 배경으로 느슨하게 연관이 있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합니다.
연작소설집 《뤼미에르 피플》에서 ‘쥐 인간’이니 노래로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무당이니 하는 기괴한 상상들을 소설로 써봤는데, 꽤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그 단편들의 다음 이야기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록작 중의 한 편인 〈삶어녀 죽이기〉의 속편을 쓴 것이 《댓글부대》이고요.
《뤼미에르 피플》의 마지막 단편은 〈되살아나는 섬〉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의 속편도 장편소설로 쓸 계획입니다. 그 장편소설은 이미 출판사와 계약을 마쳤습니다. 또 다른 수록작인 〈쥐들의 지하왕국〉의 속편도 머리 속으로 구상은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속편들은 《뤼미에르 피플》을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도록, 그 자체로 독립적인 소설이 되도록 쓸 생각입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도 〈되살아나는 섬〉과 혈연관계에 있습니다. 마포구 현수동이라는 가상의 동네에 얽힌 설화와, 시간과 예언에 관한 아이러니를 공유하고 있지요. 마포구 현수동이라는 동네나 뤼미에르 빌딩이라는 건물은 저의 다른 소설에도 종종 나옵니다.
● 요즘 관심 가는 사회문제가 있으신가요? 그런 사회적 이슈를 녹아내는 글을 쓰실 때 어떤 점에 흥미를 느꼈고, 또 어떤 점에 중점을 두시는지 궁금해요.
●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현대 사회(한국 사회)의 모습이 또렷이 보입니다. 작가님께서 작품을 통해 사회에 던지고픈 메시지들을 작품별로 이야기해주셔도 재밌을 것 같아요.
● 《열광금지, 에바로드》에서 오타쿠라는 소재를 사용하셨는데, 최근 작가님이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북한, 아이돌그룹, 컴퓨터게임 등에 관심이 갑니다. 꼭 ‘소설로 써야지’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고요, 소설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흥미를 느낍니다. 사실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네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그 현상들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 아닌가 합니다. 저 문제들이 저의 윤리 감각―남다르다면 남다른―을 자극하는 데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있는 서울에서 두 시간만 차를 타면 닿는 장소에서, 수천만 명이 기본적인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정치범수용소에 수십 만 명이 갇혀 있고 거기서 상당수가 굶어죽거나 고문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별로 안 합니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그룹에서 이 문제가 가장 인기 없는 주제인 광경도 종종 봅니다. 저는 그런 침묵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뭔가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돌그룹을 볼 때도 저는 ‘잔인하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이 먼저 듭니다. 여러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거대한 열정페이 산업이라는 생각도 하고, 기획사와 팬들이 공모해서 인간을 기계나 사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하고, 또 다른 각도에서 삼촌팬이나 이모팬들의 모습도 결코 순수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불편한 심정을 트랜지스터처럼 소설 속에서 증폭시키고, 때로는 그걸 서사의 동력으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제 책을 읽고 나서 ‘심란하다, 불편하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소설에서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읽는 분들이 그런 심란함을 더 강하게 느끼시는 듯합니다. 제가 쓴 소설들의 주제는 대개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주장보다는 ‘이 모습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것 맞나’라는 질문 쪽에 가까웠습니다. 우리 세대의 과업은 뭔가. 한국에서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인터넷 여론이라는 게 과연 믿을 만 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도 답을 모릅니다. 제가 만약 답을 알았더라면 그걸 소설이 아닌 형태로 직접 썼겠죠.
그런데 저 자신은 계속 이렇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이고 싶습니다. 이런 소설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소설의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라고도 생각해요. 소재주의라는 비판도 감수하려 합니다.
● 작가님의 아래 댓글 다신 것을 보고, 알라딘서재를 들어가 보았는데 2001년과 2013년에 몇몇의 리뷰를 남기셨더군요. 그 사이에는 다른 곳에 남기셨겠지요. 거기에는 제가 읽은 책이 두 권 정도 있어서 조금 반갑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정말 오랜만에 제가 쓴 글을 봤습니다. 알라딘서재에 제가 글을 남긴 줄도 몰랐습니다. 음…… 쑥스럽네요. 그 사이에는 일기에 틈틈이 적었고, 요즘은 책을 읽고 나면 페이스북이랑 트위터에 짧게 한두 줄 정도 감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불 끈 방에서 혼자 히죽히죽 웃으면서 맥주를 마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좋아하는데 비싸서 평소에는 못 마시는 제품으로……. 그런데 세계적인 작가가 되더라도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그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니라 서서히 단계적으로 명성을 얻는 것 아닐까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금부터는 월드 클래스다’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걸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 전 개인적으로 글쓰기는 고통스럽지만 자기 성찰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기본적으로는 허무에 맞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만사 의미 없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히는데, 글을 쓸 때 그런 허무함에서 겨우 벗어납니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시 제가 원래 속해 있는 무의미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의미들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에 도취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 의미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저는 그 과정에 단지 타자기나 프린터 같은 도구로서 역할을 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고…… 분명한 점은 제가 영혼이 충만한 인간이었다면 글쓰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리라는 겁니다. 그냥 그 충만함을 만끽하며 감사히 살았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딘가 결핍된 면, 정신의 검은 구멍 같은 게 제 안에 있고 그걸 필사적으로 글로 메우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의미 있는 세계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듯한 감정을 맛보려 합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그 검은 구멍에서 비롯된 저의 이런저런 다른 단점들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쓰고 싶은 글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글 중에 한 가지만 쓸 수 있다면 어떤 걸 선택하실지 궁금합니다.
‘써야겠다’는 글일 듯합니다. 실은 바로 그 고민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 강박증이 있어서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기록해 둡니다. 그런 글을 쓰는 걸 좋아합니다. 신변잡기 유의 짧은 에세이도 좋아하고요. 평상시에는 그런 욕구를 늘 참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길고 복잡한 글, 소설이나 논픽션 원고 쪽으로 자세를 잡고 앉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 기자 출신 작가들의 글을 상당히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들도 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장강명 작가님의 쩌는 필력을 극찬한 적이 여러 번 있었을 정도입니다.
김훈 작가님의 작품들도 같은 이유로 역시 좋아하는데요. 두 분 다 기자 출신이신데 장강명 작가님이 김훈 작가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좀 궁금하긴 하네요. 같은 기자 출신으로서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긴 하거든요. 물론 전 장강명 작가님의 스타일을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요. ^.^ 작가님의 친필 사인본이 탐이 나서 억지로 만들어 낸 질문은 아닙니다. 정말로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거든요. 아무튼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대박나세요.
고맙습니다. 김훈 선생님 책은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소설도 좋아하고 에세이도 좋아합니다. ‘기자 출신 소설가’로 함께 언급될 때가 종종 있는데, 저에게는 큰 영광이지요. 그러나 사실 김훈 선생님과 저는 글의 목표나 스타일은 퍽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연배도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솔직히 ‘선생님도 나도 같은 신문기자 출신’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 출신 소설가가 의외로 꽤 많습니다. 지금 중앙일간지에 재직 중인, 자기 이름으로 된 단행본을 낸 현직 신문기자 겸 소설가만 해도 제가 아는 분만 네 분이 계셔요. 전직 기자나 잡지기자로 범위를 넓히면 수가 상당합니다. 그 중에는 착점이나 작가적 전략이 저와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는 분도 있습니다.
● 작가님의 작품엔 공무원시험과 얽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더라고요. 시대를 반영한 인물이겠죠. 현 대한민국의 공무원시험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사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고시가 아닌 일반 공무원시험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공무원시험 열풍은 저에게는 웹툰이나 팬덤 문화, 스마트폰만큼이나 새롭고, 2010년대의 상징 같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제 소설에서는 다소 도구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소설가로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네요.
공무원시험 열풍에 대해 과도한 사회적 비용이 어쩌고 인력 자원의 블랙홀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응시자들의 책임은 아니겠죠. 요즘 같은 상황에서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응시자 개개인에게 합리적 선택인 것도 분명합니다.
다만 그 생애소득을 구성하는 몇몇 요소―정년보장이라든가 연금이라든가―가 과연 지금 제시된 수준대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합니다. 약관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보험계약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 지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궁금합니다.
● 작가님이 가장 즐겨 읽는 작품은 무엇인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입니다. 저는 이 책을 한글 번역본 외에 원서와 오디오북으로도 갖고 있습니다. 읽기도 여러 번 읽었어요. 이 소설과 작가에 대해 제가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요, 알라딘에서 펴낸 《끝내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소설 쓰기에 있어 개인적인 루틴이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 소설의 다양한 소재는 어디서 얻으시나요?
● 어디선가 읽은 내용 중 카페에 앉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 들으며 소설을 구상한다고 되어 있던데, 소설의 글감들은 보통 어디서 가져오시는지.
지금 저한테는 크게 두 가지 루틴이 있는 듯합니다. 대개는 그 두 가지 루틴 사이의 절충 형태로 소설을 씁니다.
첫 번째는 상향식 쓰기입니다. 흥미로워 보이는 작은 조각에 계속 살을 붙이는 형태입니다. 그 작은 부분은 이야기의 트릭이나 반전 요소였던 경우도 있고, SF적인 사고실험이었던 때도 있고, 어떤 두 인물이 대치하는 구도였던 적도 있습니다. 꿈에서 본 한 장면의 앞부분을 상상하며 소설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쓰는 과정이나 퇴고 과정에서 그 처음의 단초가 빠지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향식 쓰기입니다. 주제나 소재를 정해놓고, 인물과 사건, 줄거리를 그에 맞춰 배열하는 것입니다. 작위적인 느낌이 남는다는 게 단점이지만 글을 빨리 쓸 수 있고 소설의 모든 부분이 핵심과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있습니다.
● 즉흥적으로 소설을 쓰시는 편인지, 아니면 일정 시간을 정해두고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가님들 중에는 하루에 글을 쓰는 시간과 분량을 정해 놓고 글을 쓰시는 작가님이 계시기도 하고 글을 쓰고 싶을 때나 영감이 떠오를 때 쓰시는 분이 계신 거 같은데 작가님은 어떤 쪽에 속하는지 궁금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쓰는 편입니다. 한때는 오전에는 장편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다른 글을 쓰자는 식으로 시간을 배분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그냥 하루에 8시간 정도씩 쓰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저는 저녁을 먹고 나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웬만하면 오전과 낮에 많이 써놓으려고 해요.
영감의 존재와 효과는 믿습니다. 그런데 영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뇌에 일정 시간 이상 압박을 줘야 밥을 먹거나 샤워를 할 때 영감의 형태로 뜻하지 않았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이 싫어서》라는 작품이 너무 재미있어서 눈 깜짝하고 읽어버렸는데요. 후속편은 나오지 않을까요? 또 다른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신동아 지난해 11월호에 〈‘한국이 싫어’ 떠난 계나, 2045년 한국에 오다〉라는 제목으로 우다영 소설가님이 《한국이 싫어서》의 속편을 쓰셨답니다! 재미있어요. ^^ 여기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최근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과 이별하고 나니 마음도 뜻대로 안되고 세상도 다르게 보이네요. 요즘 젊은이들의 각박한 현실과 사랑에 대해서 다룬 책이나 혹은 헤어짐을 겪은 청년들에게 권하고픈 책은 없을까요?
요즘 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남녀 간의 사랑이나 이별에 관한 소설도 아니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 〈어느 ‘고쿠라 일기’전〉을 추천해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종종 이 글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합니다. 28회 아쿠타카와 수상작인데, 한국에는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에 실려 번역되었습니다. 내용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 기자에서 전업 작가가 된 이유? (차이점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하루만 지나면 가치가 없어지는 짧은 글을 쓰는데 대한 불만도 있었고, 보다 제 생각이나 가치관을 많이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또 기자 생활을 만 10년 넘게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고되어서 그 즈음에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갑자기 건강을 잃은 선배나 후배들을 보고 겁도 났고요.
저는 2, 3년 안에 데스크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데스크가 되면 현장에 나가서 취재를 하거나 직접 기사를 쓰지는 않기에, 사실상 기자가 아닌 셈입니다. 어차피 기자 일을 더 하지 못할 바에야 제2의 인생을 시작해서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도 있었죠. 그러던 중 어느 날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아서 그냥 즉흥적으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번아웃 신드롬에 빠졌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나중에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참 위험한 도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갑작스럽게 사표를 내면서 함께 일하던 팀 동료들에게 민폐도 많이 끼쳤죠. 지금도 아찔하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쓰는 글의 성격이라든가 글쓰기의 방식, 세상을 보는 태도에서 기자와 전업 작가의 다른 점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회사원과 생계를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영업자라는 차이가 압도적으로 가장 큽니다. 한 줄로 정리한다면, 자유로워진 꼭 그만큼 불안정해졌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더라고요.
●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가기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되길 희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도 해주심 좋겠어요.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한국 사회라는 객관적 현실은 달라지지 않겠죠. 동시에 작가로 살겠다는 제 결심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생각하건 여건도 바뀌지 않고 결론도 바뀌지 않는 셈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긍정적인 면을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소설이 위기라는 생각을 너도 나도 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 출판사, 서점, 평론가가 기왕이면 한국소설을 다뤄주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비판도 가능하면 삼가죠(그런 태도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하도 시장이 침체되어 있다 보니 어느 신인 작가가 자력으로 책을 1만 부만 팔면 집중 조명을 받게 됩니다. 영화감독이나 아이돌 가수는 그런 지원을 누리지 못합니다. 1만이라는 숫자가 엄청나게 커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고작 1만입니다. ‘동네 맛집’ 정도의 식당에서 몇 달 동안 받는 손님 수만큼도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작가들이 처했던 환경에 대해 읽으며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옛날에도 책을 안 읽었고, 다른 나라 작가들도 대체로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놓고 새삼스럽게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로도, 치킨집이나 커피점을 차리는 것에 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저한테는 그런 생각들이 좀 괴상하게 위안이 되더군요. 작가를 꿈꾸는 다른 분들께도 그럴 수 있을까요? 책장과 노트북을 뒤적여, 저한테 도움이 되었던 몇몇 구절을 찾아 밑에 옮겼습니다.
주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결단을 내리는 일은 말리고 싶습니다만, 공포에 압도되어 꿈을 버리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다행히 작가는 남들 몰래 부업으로 할 수도 있고, 리듬체조 선수나 펀드매니저처럼 젊을 때 승부를 봐야 하는 직업도 아닙니다.
“자네는 작가가 되겠다고 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헛소리야. 글을 써서 돈을 벌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네. 출판사 사장의 딸과 결혼하는 것뿐이지.”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젊은 작가들을 많이 알고 지내게 된 나는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안다. …… 다른 이들은 번역과 잡지 일, 평론 등으로 생계를 꾸린다. 하지만 잡지 일은 과중한 업무를 요구하기에 많은 이들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평론의 경우는 큰 잡지가 아닌 한 보수가 형편없다. 어쨌거나, 연금이건 잡일이건 보잘것없는 수입을 제공할 따름이다. 이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합법적 부부건 아니건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 세 쌍의 경우 모두 부인이 일을 한다. 한 사람은 드러그 스토어 종업원이고, 또 한 사람은 백화점 판매원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교사다. 음식과 의복은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갖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나 외출은 매우 드물며, 여행은 더더욱 희귀하다. 1년 내내 도시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기 십상이라 아마 내가 이 친구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미국 경치를 더 잘 알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미국여행기》)
“1850년,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리가 1842년에 《죽은 혼》을 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시대》를,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뭘까요, 이 사람들은. 어이가 없지요.”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작가들도 절반 이상이 최저임금도 채 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인터넷판 ‘레 미제라블: 프랑스 작가들 수입 급감으로 위기 직면’(Les Miserables: gloomy French writers face crisis as incomes plummet)이라는 기사에서 프랑스 작가들의 수입현황을 전하며 이같이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픽션과 논픽션 분야 프랑스 작가 10만 명(번역가 등 포함)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프랑스 작가들의 절반 이상이 프랑스의 연간 최저임금(올해 기준 2732만원)을 벌지 못했다. 수년간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유명 작가들조차 연 수입이 2300여 만 원에 불과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작품을 출판한 경력이 있는 10명 중 6명이 1년에 196만원의 수입도 거두지 못한 사실이었다.
…… 하지만 프랑스 상황은 영국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꽤 알려진 유명 영국 작가들마저도 연 1820만원, 즉 영국 평균임금의 반도 벌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가출판이나 전자책 붐 역시 작가의 수입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고 영국저작권협회(ALCS)는 밝히고 있다. 지난해 세계최대 전자책 콘퍼런스인 미국 디지털북월드가 실시한 온라인여론조사에 따르면 책을 출간한 적이 있는 저자들의 3분의 1이 자신의 책으로 연 500달러(약 58만원)도 벌지 못했다.”
(2016년 3월 27일자 뉴스1 기사, 〈‘문화의 나라’ 프랑스 작가도 먹고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