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의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어떤 사회 역사적인 그늘에 몸을 담그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가히 황정은 스타일이라고 부를 만한 경지다." (문학평론가 신수정) '황정은 스타일'이라는 설명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소설가 황정은이 알라딘 독자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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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160622
서울국제작가축제였는지, ‘나는 왜’ 대학로 행사였는지, 그냥 팟캐스트 방송이었는지(아마 팟캐스트 방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다가 소설로 전향하는 게 비교적 진입장벽도 낮고 그런데, 반대로 소설의 경우는 그게 어렵다고, 뭔가 불공평하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황정은 작가님은 다른 장르의 글쓰기에 도전하고 싶은 계획, 마음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꿀성대’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데 목 관리 비법이 있다면??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했다면 푸념+ 농담이었을 텐데, 농담이었더라도 부끄럽고요……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다가 시를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작업을 기준으로 두었을 때의 생각이며, 시는 제가 욕심낼 수 없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시와 산문, 양쪽 모두를 감당하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질투심 때문에, 세상 어딘가에 그들이 있다……는 정도도 모르고 싶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라면……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인 듯합니다.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하고 한없이 얌전한 사람인 것 같다가도 어떤 작품에서 보면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러신가요? 저는 그게 소라와 나나의 모습에 조금씩 담겨 있다고 보는데요. 실제로는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우신지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같은 이유로, 소라의 어떤 면이 제게도 있고, 나나의 어떤 면도 있고요. 소라를 쓸 때는 부끄러웠고 나나를 쓸 때는 즐거웠습니다. 어느 쪽이 더 가까웠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님 말투나 글에서 ‘하였으므로, 으므로’라는 표현이 유독 많이 들립니다. 본인도 인지하고 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한번 단정하게 접히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이미지화할 때는 글쓴이가 떠억 오버랩됩니다. 황정은 작가 책 속의 인물은 더욱 그런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고요. 저는 그런 이유로 일상 속 짧은 메모를 남길 때에도 글 속에 나를 들키게 될까봐 주저하다가 생각만 하고는 놓아버리고 말거든요. 작가님 개인적으로 ‘본인을 가장 많이 투사한 작품 속 인물’은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독자로서의 저는 글쓴 사람을 드러내는 글에 더 매혹되고는 합니다. 저는 그것을 저자의 성질머리…… 성깔이 잘 느껴지는 글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제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글 속에 자신의 성질머리가…… 자신이 반영되는 것을 주저했다면 저는 그 글들에서 매력을 못 느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많이 반영된 인물은…… 최근의 소설들 중에선 ‘누가’일 수도 있겠네요.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읽고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큰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이 점점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혼자 생각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괜찮다면,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궁금해요. 글을 쓰실 때 음악이 있어야 하는지 궁금해요.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만 요즘은 로이킴이 재작업한 김광석의 ‘너에게’를 반복해 듣고 있습니다. ‘일어나’도 듣습니다.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도 듣습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All the things you are도 듣고 f(x)의 ‘NU 예삐오’도 듣습니다. 최근엔 이렇게 다섯 곡만 번갈아 듣고 있습니다. 소설 쓸 때는 음악 듣지 않습니다.
작가님의 데뷔작부터 거의 빠짐없이 읽어온 독자입니다. 초기작에서는 가까이 있는 듯한 혹은, 쓰는 자신에게서 시작한 듯한 인물이 중심이었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멀리 있는 또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듯한 인물을 그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현재 눈길이 가는 ‘인물들’, 조금 돌려 말해주신다면, 그 인물들이 살고 있을 법한 ‘어떠한 세계’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다음 작품은 왠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을 향해 있으실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다음 작품을 재촉하는 질문이 되어버렸네요.
하찮음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최근 자주 경험하고 있는 하찮음에 관해. 그 경험에 관해. 그 심정에 관해. 자신과 남을 자꾸 하찮다고 여기게 만드는 우리의 구조에 관해.
소설을 쓴 초기엔 발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해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했고,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를 뒤흔드는 상황과 인물에 관해 씁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타인과의 이야기로 필연적으로 이동해왔지만, 최근의 이 인물들은 제 초기작 인물들보다 저와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리뷰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마주본 이후,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책을 읽어야 살아 있는 것만 같던 제게 책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묵묵히 넘기던 책장은 공허함으로 저를 누르고 살아 있지 말라, 이야기합니다. 제게 책으로 돌아갈 길을 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디 그 무엇도 아닌 책으로, 그 속에서 느꼈던 위로와 희망과 벅찬 설렘을 느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로서 더 읽고 더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제 경우엔, 무지라는 양상으로 이 사태에 상당한 몫을 보탠 바가 있기 때문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했고, 그것을 알려면 우선 젠더 구조를 공부해야 했으므로, 일단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부터 모아서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읽은 우에노 지즈코의 말 그대로, 일단은 자신의 혐오를 맞닥뜨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요즘은 전보다 즐겁게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경험되고 있지만, 저는 이 변화가 꽤 즐겁습니다. 게다가 피해생존자들과 연대자들의 용기와 언어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전 얼떨결에 층간소음 가해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쫓아올라온 사람이 ‘아래층이야 씨발년아’ 같은 욕까지는 안 했지만 큰 당혹과 수모를 뒤집어쓴 느낌이었습니다... 단편 <누가>라는 작품을 쓰시게 된 배경, 자세히 듣고 싶고 또 궁금합니다.
<누가>의 배경은 820-17번지입니다.
이 단편을 쓰게 된 계기는 계간 문학동네 봄호에 이미 짧게 언급했습니다만 이 단편을 쓸 때, 사회 구조가 견고하고 교묘해지면서 구조적 문제를 투명하게 보기가 어렵고, 보았다 해도 그 구조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듯하다는 무력감이 지배적인 사회적 정서일 때, 분노가 인접한 타인들에게, 예컨대 고만고만한 ‘이웃’에게 향하는 경향에 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계급 안에서 피해와 가해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혐오해 못 견디는 경향들에 관해서요.
그동안 쓰신 작품 중에서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나 이렇게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百의 그림자와 야만적인 앨리스씨와 계속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서너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단편들입니다.
작가님 sns같은 거 하실 생각은(당연히 없을 것 같지만 미련이 생겨서 물어보아요...) 없으신지... (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인데 소식 듣기가 가뭄에 단비 나는 듯하여 넘나 슬프고... 하지만 그게 작가님의 매력이기도 한 것이지...) 아 그리고 앉으면 척추가 펴진다는 의자 어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도 요즘 허리가 넘 안 좋아져서... 이러나저러나 건강이 최고인 것입니다... 작가님 늘 건강하세요.
SNS로 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니스툴의 등받이 없는 닐링체어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