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미 - 누군가를 만날 줄 몰랐던 여름, 베를린
이동미 지음 / 모비딕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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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미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염색도 안한 머리를 대충 묶는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이 좋아하는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무거운 걸 번쩍 들어올리곤 했던 ‘말괄량이 삐삐’ 쪽이 가깝다. 놀고먹는 매체의 편집장을 두루 거쳤지만 그녀에게 가식이나 허영처럼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몸짓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씩 ‘어머, 정말?’ 하며 코로 웃을 때면 살짝 들창코로 공기가 급격히 말려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애써 누군가보다 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고, 분투하여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없다. 착실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흐흠, 하고 한숨 한 번 쉬고는 자신을 닦달하거나 마음을 졸이는 데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다. 특별히 현명하달 것도 없고, 남들보다 뛰어나 보이는 영민함도 없다.


동미는 참, 보통사람이다.


그런 그가 베를린에서 남자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가 보다, 했다. 근데 잠깐, 그녀가 연애를 한 게 언제였지? 그녀는 원래부터 솔로였던 것처럼 늘 혼자인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를 만나고, 안병장(동미의 베프이자 베를린에서 치맥집 ‘꼬끼오’를 운영하는 여사장)의 등쌀에 밀려 ‘몸이라도 굴리라’는 말에 덜컥 틴더를 깔고, 그러다 운 좋게 멀쩡한(?)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슬며시 미소가 났다. 반백을 두 해 앞둔 여자에게 찾아온 달달한 로맨스라니. 다 늦게, 갑자기, 베를린에서 사랑의 불꽃을 태우는 여자가 바로 동미라니!


부러웠다.


결혼 12년 차, 든든한 동지를 얻었지만 가끔씩 심장이 쿵쾅거리는 느낌이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에게 밤새 입 맞추고, 오전 내내 커들링(침대에서 뒹구는 것)하고, 눈만 마주치면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게. 그는 잘생겼을까, 돈이 많을까, 뭐 하는 사람일까. 한국 사람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일 테다. 하지만 동미는 그에게 17년 동안 함께 살다가 헤어진 아내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살진 않지만 주말마다 함께하는 두 아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감기처럼 자주 찾아오는 불안장애가 있다는 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같이 산다는 건, 그의 불안을 통해 나의 불안을 확인하고, 서로의 불안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일지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서로의 불안을 확인하고 나누는 일이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드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큰 위로와 힘을 얻는다는 것도 배웠다.”(<동미> 중에서)

사랑, 연애, 결혼에 정답은 없다. 사랑이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좀 식상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진 부부나 가족의 행복이 과연 건강한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혼자 살거나, 같이 살거나 혹은 여럿이 살거나 사랑과 연애의 문법을 각자가 써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누군가 정해놓은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이라는 규범 앞에서 맞지 않는 옷을 입어보려고 한껏 애쓴다. 그러다 누구나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지나고 나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잃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결혼했다고 달라지나? 그렇지도 않다.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다음부터 연애감정은 사치스럽다. 연애는 가고, 생활이 남은 부부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같이 보낼 것인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숙제처럼 무겁고 막중하다.


동미는 아침저녁으로 남자친구 스벤이 가르쳐 준 7초간의 키스를 나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로를 느끼는 7초간의 시간. 온열동물 포유류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극상의 행복감이 아닐까. 아침마다 남편을 부둥켜안거나 두 사람 사이로 들어온 덩치 큰 래브라도를 꼭 껴안고 체온을 느껴야 하루를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는 나는 동미와 스벤의 7초간의 키스를 좀 더 시들해지면(?) 반드시 해야 할 투두 리스트에 넣어놨다.


동미는 역시, 이제 막 1년 남짓 함께한 남자와 거창한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인생의 대부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서 혼자 지낸 시간이 거의 없는 남자와, 15년 전에 마지막 연애를 하고 인생의 대부분을 혼자 산 여자가 만나서 잘 지낼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고 담담히 묻는다. 그녀는 함부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과도한 기대를 품지 않으며, 가만히 사랑이 흘러가는 걸 지켜볼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동미를 응원하고, 동미의 사랑을 지지하게 되는지도. 그녀의 연애담은 간이 딱 맞는 떡볶이처럼 찰지고 입에 붙지만 자극적인 화학양념이나 요란 떠는 생색이 없어 좋다.


딱, 동미처럼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동미는 스벤에게 말했다. “스벤, 내 인생에 와줘서 고마워.” 

동미에게 말하고 싶다. “동미,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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