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어머님은 몸이 몹시 쇠약했다. 매년 가을로 접어들 때마다
한 번씩 졸도했는데, 산후에 조리를 잘못해서 생긴
일종의 현기증이었다. 이 병이 발작하면
어머니는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넣지 못하고
꼬박 2주일간 생사의 고비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이 병은 파초 꽃망울이 단방약(單方藥)이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들은 어머니가 몸져 누우면
파초꽃을 구하러 다녔다.
한 번은 형제가 파초꽃이 촘촘히 피어 있는 어느 회관의 뒷담을 넘었다.
그들은 꽃망울을 꺾어 소매에 숨기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형제들에게 이 꽃망울을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안 어머니는 당장 무릎을 꿇으라고 하곤
혹독하게 꾸짖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아버지는
대청마루에서 아들 형제에게 매를 들었다.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신간 ‘한 움큼 황허 물’에 실려 있는
중국 작가 꿔모러(郭沫若·1892∼1978)의 ‘파초의 꽃’에 나오는 이야기다.
‘꿔라오(郭老)’로 불리며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는
대가의 내면은 다음의 문장에서 광휘로움을 자랑한다.
“어머님, 당신의 아들도 멀리 해외를 떠돌며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았고, 어릴 적 파초꽃을 꺾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그 까닭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안 뒤로
파초꽃을 우지끈 꺾었던 그 자신감과 용기를 잃었습니다”
얼마나 깊은 한 마디인가.
진실은 한 가지의 측면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그 한 가지를 향해
‘우지끈’ 자신을 던지는 신념과 용기를 버리고
더 원만하며 다양한 심지(心志)를 확보하는 것.
그것은 세상만사에 대한 융숭깊은 배려가 아닐까.
작은 근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세상 여러 일에 대한 작은 배려와 근심보다도
더욱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이자 명수필가인 린위탕(林語堂)은
“인생 최고의 낙은 다리를 오므리고 침대에 웅크린 채 잠이 드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밖의 일을 팽개치고 방안으로 후퇴하여
가장 편안한 여건에서 명상할 수 있는 자세가 눕는 것이고,
눕는 자세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자세는
전신을 똑바로 누이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구부려 눕는 자세라는 말이다.
거의 ㄷ자로 구부려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이가
가장 자연스럽게 선택한 몸짓,
거기에 연약함에서 오는 서글픔과 평화스러움이
함께 존재하지 않았던가.
혹은, 미명 속에서 벽을 향하여 모로 누울 때
가물가물하게 밀려오는 평온함을 느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자세는 생명의 고향인 어머니의 태 속을 꿈꾸는 것이요,
정적과 작은 근심의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된 모습일 것이다.
평소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 남미의 한 작가가
모처럼 가진 서방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누설하지 않아야 할 비밀은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힘”이라고
대답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의 마음속에 펼쳐져 있는 만리장성을 보았다.
사람들의 손짓을 받으며 살다가 떠나간
어떤 여자의 삶일지라도 내부에서 펄럭였던
고달픈 삶에 대한 온기,
이를 테면 그녀가 떠나간 방에 걸려 있던 달력 한 장이라든지
때묻은 수건 한 장 같은 물건들을 만났을 때,
비루하게 살다가 방금 이곳을 떠나간
어떤 삶에 대한 저릿한 슬픔이 밀려오지 않았겠는가.
여러 개의 눈을 가지고 남을 돌아봐주는 생활은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울림을 가져다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비교적 평온한 날들이 전개되고 있어
퍽 다행이다. 이런저런 갈등과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추세라면 대통령선거를 놓고
전국민이 겪어야 하는 몸살은 없을 것 같다.
두쪽으로 완연하게 갈라서는
편가르기와 갈등으로 인해 개인과 개인의 대화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와는 참으로 다른 요즘이다.
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거의 맨 마지막이긴 하지만
드디어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치 발전의 한 신호.
부모형제의 속만 썩이던 막내가
예쁜 색시를 얻어 살림을 차림으로써
집안이 비로소 한시름 놓는,
그런 마지막 골칫거리의 변화를 기대해도 좋을까.
임순만 (국민일보 편집부국장 soon@kmib.co.kr)
200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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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내면을 상대방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람.
어떠한 것이 배려인지 온종일 고민할 수 있는 우리라는 모임.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