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3
저는 가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답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답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이야기는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시지요? 극단에 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리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일이 없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 순수함으로 인해 얼굴에서 빛이 번쩍번쩍 나게 됩니다.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여성들 모두에게 베일을 강제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지도자들도, 양민학살에 주저함이 없었던
해방공간의 좌우익 지도자들도 아마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마음 아프게도 이런 분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됩니다.
이 분들의 확신이 구현되는 세상은 다른 쪽 극단에 선 사람에게는 바로 지옥인 까닭입니다. (중략)
자연법과 함께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해줄 '사제'가 사라진 시대에는 정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화' 또는 '절차'라고 하는 기준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