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쟁호투 - [할인행사]
로버트 클로즈 감독, 이소룡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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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은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 만으로도 영화가 반이상 만들어지는, '영화의 반'인 캐릭터다. 처음등장부터 넘사벽인 절대강자의 대명사다. '홍콩무술(영화)'을 평정한 절대고수 이소룡이 메이저자본을 만나 세상에 내놓은 용쟁호투는 서양인의 육체에 대한 이소룡식 비웃기의 결정판이고 무술영화와 액션느와르의 기억될만한 조우였다. 

  
용쟁호투 이전부터 이소룡은 대부분의 주,조연급 액션상대로서 사적인 원한이 없는 서양용병을 자주 등장시켰다. 그들은 영화내의 갈등구조와는 별다른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 무술상의 주적이었다. 이소룡이 그들을 격파해야할 이유는 영화 외적인 정서적 인과율에 의한 것이었다. 단순히 동양인이 서양인을 이긴다는 설정만으로도 모티브는 충분했다. 서양인은 강했고, 동양인이 그 강함을 꺾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맹룡과강에서의 척노리스와 정무문에서의 러시아 고수는 사투를 벌일만한 상대였다. 서양인에 대한 육체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테마였다.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자신이 추구하던 서양인의 육체에 대한 극복이 더 이상 진지한 주제가 아님을 선언했다. 이소룡이 오하라에게 할말이라곤 '와다-' 혹은 ‘꺼져‘밖에 없었고 대련상대로 나선 그를 마치 벌레처럼 밟아죽인다. 격투가 아니라 구타였다. 그리고 영화가 내세운 용과 호, 두 개의 기운은 모두 동양인의 것임을 보여준다. 

이소룡이 주의해야할 한가지는, 결코 서양인을 절대병신이나 절대악당으로 그려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이소룡은 글로벌한 스타가 되어야했고 서양인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관객들이 단순히 ‘동양인이 서양인을 이긴다’는 것에 정서적으로 감응할 이유 또한 없었다. 오히려 '농담'이 지나치면 '정색'을 하고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소룡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그에게 가장 크고도 적절한 복수심을 불러일으킨 서양인으로 탄생한 오하라는 리의 여동생을 죽인 것도 아니고, 겁탈한 것도 아니고 겁탈하려다 자살하는 것을 지켜보는 선에서 그의 악행을 멈춘다.  

이소룡의 발 끝에 응징당할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좋은’서양무술가들 역시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헐리웃 느와르 액션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배우가 아닌 총이었다. 배우의 손에 총이 없다면 여자라도 더듬거나, 여자도 없다면 돈다발이라도 세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이소룡은 소름돋는 괴성을 지르며 서양배우들의 밋밋한 빈손액션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 굼뜸, 흐느적거림, 당황한 눈빛은 워너브라더스가 내민 거룩한 돈에 대한 마셜아티스트의 답변이자, 작고 까무잡잡한 광대의 눈에 비친 서양인의 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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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브 브라더스 디지팩 박스세트 (6disc)
데이비드 프랭클 외 감독, 데미안 루이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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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오면 난 광땡을 쥔 노름꾼처럼 득의만만해진다. 작품이 어떻든간에 자리에 모인 그누구보다 그 작품은 나와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바로 506보병연대 출신인 것이다. 

군시절에 대한 나의 입장은 민방위도 다 끝나갈 무렵인 지금까지도 두가지 팽팽한 딜레마위를 달리고 있다. 군에 다녀온 사람이 대개 느낄법한, 가장 꽃다운 시절을 가장 개같은 조직에서 보냈다는 비극이 가져온 경멸과 추억의 혼재가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 대한 대의적 증오와 체험적 동경이다. (나는 군생활을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보냈다) 

한국에 주둔했던 506보병연대 1대대는 미 2사단 소속으로 주한미군부대중 가장 최전방인 서부전선 민통선 안에 캠프를 차리고 있었다. (조지부시가 일으킨 아프가니스탄전 이후 한국에서 이라크로 주둔지를 옮긴 것으로 알고있다.) 밴오브에서 묘사되었듯 506은 컬히 혹은 스탠드 얼론이라는 구호명으로 대변되는 생존형 공수부대로 출발해서 내가 복무할 당시엔 헬기레펠(에어 어썰트,공중강습) 부대로 재편되었는데 여전히 사단내 최강의 보병부대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환상의 땡보직 탱자탱자 군생활을 꿈꾸며 자대배치를 기다리는 카투사 신병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태클이 바로 506 혹은 판문점 연합사 배속이었다)   

밴오브는 카투사라는 단어가 거의 6방이나 군면제 수준의 오명으로 취급받던 지인들간의 군경험담 패러다임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나는 뭇전역자들의 시시껄렁한 뺑뺑이 뻥튀기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컨텐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온 보병연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가능케한 공습작전을 '완수'했고 서방연합군으로서 베를린에 입성한 최초의 정예선봉부대로서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부대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었으니 

밴오브에 나온 부대는 506보병 2대대였고 나는 1대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1대대에 이지중대 같은것도 없었고 1대대가 2차대전당시 어디서 뭘했는지도 잘 모른다.  아침피티때 한달에 한번꼴로 뛰던 7.2마일 코스에 '맨츄마일'이란 이름이 붙은걸 보면 만주쪽에서 얼쩡댔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아쉽다. 여기까지가 내 꼽사리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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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 감독, 샘 워싱턴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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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개봉 당시 난 심형래가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다. 하고싶은 말과 해야할말도 구분 못하고 자기최면과 현실인식도 분별 못하는 미스테이크, 그 자체로 보였다. 아바타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보고, 다시 거기 섞인 심형래의 볼멘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제는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뭐냐 도대체. 진짜로 세상은 심형래라서 무시했던건가? 

영화는 착취 판타지의 틀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천연자원을 강탈하는 19세기 산업혁명적 식민지 이야기, 다른 하나는 다른 인종의 존재마저 빼앗으려는 21세기 유전공학적 욕망이다. 역사속 제국주의의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편한 공분을 이끌며 영화 속 갈등을 무리없이 헤쳐나간다. 오락영화의 캐주얼함에 대한 정답이라 할만하다. 다만 우리가 영화를 즐기면서 지불한 댓가가 만 사천원 남짓의 표값이 아니라 영화가 드러내는 진짜 욕망의 역겨움에 대해서 묵묵히 입다물게 되는 것이라는 점도 점점 선명해진다.  

그 역겨움은 디워에 버금간다. 누가봐도 흑인의 골격과 이모션을 가진 나비족이 뒤집어쓴 파란 물감의 노골적인 가면은 미국시장에의 흠모와 미국배우에의 필요성을 오락가락하는 심형래의 분별없음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 디워가 그랬듯 이것도 시작에 불과하다. 성형부작용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런 몰골을한 백인 아바타들이 나비족의 우월한 육체를 흉내내기 시작하더니 나비족 역사에 길이 남을 선택된 영웅이 되는가 하면 급기야 죽어가는 백인의 생명을 아바타에게로 완전히 이식하는 영생의 첨단시술은 심지어 나비족 들러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의 신성한 나무아래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유전공학은 신성한 존재와의 결합을 통해 그 생명윤리적 죄의식을 사함받고 그 테크놀로지는 이제 프랑켄슈타인으로 요약되는 브레이크를 상실한 위험한 욕망에서, 예수의 부활을 연상케하는 신성한 승리로 거듭났다. 

여기서 역겨운 포인트. 

1. 신성한 나무의 생명이식술은 마치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찬가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이 아바타를 조립해 나타나기전까진 나비족조차 몰랐던 기적이다. 나비족은 이식받을 여분의 육체가 없었기 때문에 죽으면 그냥 구덩이에 묻혀 버리지 않던가. 도대체 신성한 나무는 누구좋으라고 거기 줄창 늘어져서 잠들어 있었던 것인가? 결국 신성한 나무는 백인을 위해 준비된 자연의 db, 선택받은 인종인 백인의 키스를 받고 깨어난 파란 공주에 불과한가?   

2. 21세기 식민주의자의 후예는 무한한 자원이 빚어주는 싱싱한 육체를 끝도 없이소비하며 그저 오래살고 싶은 것인가?  cg가 아무리 환상적이어도 이토록 저질스런 욕망까지 상쇄할 수 있을까.

3. 감독은 이러한 투트랩 착취구조를 노골적으로 활용한것이 분명해보인다. 표면적인 자원착취는 물론 페이크다. 표면적인 착취와 갈등이 해소될무렵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맛보며 심리적 안정에 접어들어 이제 막 시작하려는 진짜 착취적 욕망에 직면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이 해피엔딩이라고 믿어버린다. 어쨌든 등장인물들은 화해하고 있고, cg폭죽도 바닥을 드러내는 가운데 영화는 바야흐로 끝나가니 말이다. 

cg테크놀로지가 부족했을때 제임스 카메론은 그 표현의 부족함을 이야기의 힘으로 채우고도 넘치게 하는 능력있는 작가였다. 터미네이터가 아드레날린만 분출케하는 액션수작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위대한 이야기로 기억된 것은  근육질과 금속질의 충격적인 화음이 아니라 새라코너가 카일을 생각할때 찍힌, 서사를 마감함과 동시에 그 순환의 시작을 깨닫게 하는 한장의 폴라로이드 덕분이다. cg가 그의 영화에서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수록 이야기는 점점 벼랑으로 몰리다 못해 아바타에 이르러서는 제임스 카메론의 머릿속은 이제 기계들의 군림을 방불케하는 cg 스펙타클과 서사간 최후의 전장이 된 모양이다.  

대한늬우스의 애국가에 버금갈 수준의 심형래표 아리랑 애국심과 제임스 카메론의 추한 제국주의적 심층욕구가 영화계를 강타한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할것만 같던 심형래의 근황과 오스카의 판결에 의하면 애국심 마케팅의 헤프닝과 그저 잘만든 특수효과/미술영화라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참으로 접하기 힘든 적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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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걸작! 아바타
    from Sleepy Tiger 2010-04-21 11:27 
    근래 감상한 최고의 걸작 ! 이 영화가 놀라운 면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으뜸은 판도라라는 배경이다. 지금껏 어떤 영화에서도 가 보여주는 것 만큼 광대하고 환상적인 외계의 문명 세계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중 옥토씨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였지만 이 마저도 바뀌었다.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옥토씨로 하여금 18년간 지켜왔던 순결, 아니 지조를...
  2.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from Sleepy Tiger 2010-04-21 11:32 
    이 글은 neoscrum님의 ', 지긋지긋한 오리엔탈리즘의 향연'이라는 글(이하 글1)에 옥토씨가 달았던 댓글에 대해, 1월 6일 답변으로 올라온 '영화 읽기'(이하 글2)를 읽고 난 소감이다. 글2와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고서 이 분이 왜 아바타를 '오리엔탈리즘의 교과서'로 해석했는지 조금은 더 알겠다. 그 해석의 근거에 대해 옥토씨는 대부분 동의할 수 없지만, 다소의 논쟁을 지켜본 결과 결국 해석은...
 
 
okto 2010-04-2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류 이데올로기 따위 가볍게 무시해왔던 카메론 감독의 전적(?)을 감안했을 때 저는 약간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더군요. 이 영화에 나오는 설정들이 판타지적이긴 하지만, 이를 빌어 백인 우월주의 등의 의도로 사용하기 보다는 만화적 요소에까지 리얼리티를 부여(예전부터 리얼리티에 광적인 집착을 보여왔죠)하고자 했던 개인적인 성취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디어의 우수함이 CG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느낌이 있더군요. 관련 글을 작성해둔게 있어 트랙백 걸고 갑니다.

일년열두달 2010-05-12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을 너무 깊이 하셔서, 확대해석을 한 부분이 없잖은 것 같은데요...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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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링 주의. 

 

몇해전 멜깁슨이 주연한 '싸인'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홍보자료들은 외계인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물로 오해하기 딱 좋은 구라범벅이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장편신앙간증이었다. 뒤통수를 맞은데 이어 나는 영화를 욕할수 없다는 좌절감에 급기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영화는 정말 잘 만든 간증영화였고 이를 암시하는 징후들이 도처에 있었음에도 자극만을 좇아 오해한건 나였기 때문이다. 

이책을 다 읽고 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프로이트가 필요하다는건 어떤 의미일까. 살인의 동기는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지. 그럼 이 살인사건의 설득력은 대부분 프로이트 학설의 흥미진진함에 그 성패가 달려있음이 당연하다. 

프로이트의 학설이,,,지금도 흥미로운가? 

책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었던것 같다. 반면에 독자로서 이런 의문을 먼저 떠올렸다면 나는 이책을 (적어도 탐정소설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읽지는 않았을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학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프로이트를 흥미진진한 인물로 리젠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려 접근성을 쉽게 하였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궁극의 주체로서의  살인'을 해부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이 유용함을 보여줘야 마땅하나 오히려 프로이트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애매한 살인을 끼워맞췄다-아니, 이가 맞지 않아 그냥 옆에 두었다는 표현이 더 낫겟다-는 얘기다. 

그러니 사건과, 덩달아 등장인물까지도 흐리멍덩하지. 

프로이트의 '컴플렉스'가 살인을 불러오기엔 함량 미달이란 걸 작가도 느꼈던것 같다. 이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안습적 몸부림을 친 것으로 보인다.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햄릿을 자꾸 인용하는것이 그 첫째. 그 텍스트가 프로이트를 설명하는데 적격이라는 이유 외에도 살인동기에 대한 부족분을 변명하기 위한 계산이라고 생각된다. 불멸의 희곡 속에서 햄릿은 오이디푸스적 망상에 시달려 자타를 막론하고 죽여버리니까. 셰익스피어를 우군으로 둔 셈이다. 

두번째는,,결국 살인은 없었다는데 있다. 실제로 책에선 세명이 죽긴 한다. 한명은 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죽어있었고, 또 한명은 증거물 투기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죽고(이책에서 유일하게 설득력있는 살인-그 동기의 간결함은 안타깝게도 프로이트와 아무관련이 없다), 마지막은 그야말로 프로이트적 컴플렉스를 증명하고자 그 한몸 희생한다. 하지만 이 세가지 죽음은 미스터리가 시작되고 결국 그 비밀이 풀림으로서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탐정소설에서 일컬어지는 진정한 살인이 아니다. 앞의 두가지는 있지도 않은 미스터리를 미스터리인척 보이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 마지막 죽음은 프로이트에게 등떠밀린듯한 어설픈 연기력의 범인이 살인미수를 자초하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작가가 제손으로 직접 응징하는,,, 소설이 다 끝나갈 시점에서야 비로소 시도된 사건의 시작이라는 말도 안되는 반전이다.

작가는 근친컴플렉스외에도 여아도착, 사디즘, 수석검시관의 왜곡된 정의감등을 뒤죽박죽시켜 작품의 구심점인 '살인(처럼 보이는)사건'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다. 하지만 그 생명은 프로이트만 나타나면 코마에 빠져들었다. (아니, 한쪽은 잠든척 했을뿐이고 프로이트에겐 굳이 깨울 이유가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더군다나 배후세력처럼 암시되던 삼두회와 살인사건의 아무관련 없음이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면 차라리 프로이트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은 지경에 이른다. 제게 해리성 기억상실을 일으켜주세요. 엉?! 

살인사건은 잊자. 프로이트만 읽자. 프론트맨으로서 고뇌하는 프로이트가 따로있고, 시점을 제공하며 덤으로 여자까지 챙긴 실속파 영거박사가 따로있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민완형사가 또 따로있는 극도의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덩달아라고 아쉬움을 상술했듯 등장인물 각각의 성격이 비교적 잘 살아있는것도 괜찮은 점이다. 당신은 프로이트의 용어를 한 열가지 정도 써낼수 있는 평범한 지식중산층인가? 그럼 나름 재미있을 거다. 그것이 별이 두개씩이나 되는 이유다. 

ps: 프로이트와 탐정소설의 완벽한 만남에 대한 결론은 다음 두가지 중 입맛에 맞는걸 고를 수 있도록 마련해 보았다. 첫째, 프로이트도 값싼 살인망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진 못했다. 둘째, 프로이트를 갖다 붙이면 뭐든지 이렇게 저질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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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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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를 소재로 했을것이라는 오해로 책을 펼쳤고 

책의 유명세에 비해 매우 쉽다는 안도감으로 책을 덮었다. 쉬워서 더 유명해진 걸까.

'재미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글쎄,,, 

자극적 제목에 혹했다가 너무나 담백한 맛에 실망한 나로서는 그다지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고 보면 진즈부르그의 책들은 유별나게 제목이 자극적이다.) 

이 책의 내용은 수긍이 가는데 

다만 이 책 자체에 대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메노키오는 중세적 탄압을 받는 근세적 인간임에 틀림없다.  

메노키오가 대단한건 알겠다. 

근데  이책은 왜 대단한걸까.

메노키오에 주목한 것 때문에 이책이 유명해진 것일까? 

메노키오에 주목해서 그것을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대한 신호탄으로 읽어낸것이 

그렇게 고난도의 작업이었을까? 

메노키오 평전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것이  

메노키오의 증언만 추려 읽어도 이견이 있을수 없다.

이사람의 정신은 고대와 근세를 잇는 기적적인 교량이었고 

체득적 상상력을 발휘할줄 아는 타고난 예술가였으며 

더욱 놀랍게는 그 스스로가 그것을 분명히 인식-메노키오는  

'표현'하고픈 욕망의 포로였다.-하고 있었다는 감탄을 하지 않을수 없다. 

메노키오는 이미 거인이고 거인은 이미 거시적 존재가 아닌가. 

 

대체 무엇이 메노키오라는 인물을 재발견하는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책 자체에 문제적 가치를 부여하도록 한 것일까. 

'방앗간 주인에 불과'하다는 위선적 직함이 

왜 미시사라는 찬란한 찬사를 이책에게 가져다 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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