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2disc)
강우석 감독, 박해일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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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스포일러입니다.)

리뷰어는 원작을 마저 다 못 보고 영화를 본 중도부류임을 밝힌다.   

그리고, 자극적 리뷰제목과 전혀 다른 본문이 펼쳐질것임도 밝혀둔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두부분인데,,,사실 이끼라는 컨텐츠보다는 강우석에 관한 부분이다. 

이끼원작의 후광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그 첫번째인데, 

유해국이 왜 조용한 마을을 침입해서 어긋난 돼지발톱처럼 구는지에 대한 설명, 유해국과 검사의 앙금에 대한 설명, 두가지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감독은 '관객들이 원작을 보고 극장에 왔다'라는 가정하에 극을 구성한 것 같다. 이 두가지는 스토리에 몰입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다. 영화에서 부족한 정보는 원작에서 제공받고, 영화는 원작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라는 스탠스인 것이다. 

따라서 강우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우석이 이끼를 망쳤다는 비난에는 공감할수 없다는 입장이다. 강우석은 그저 원작의 설정과 큰 흐름을 샀을뿐 원작에 대한 오마주를 만든게 아니다.

두번째는 공공의 적, 투캅스등등을 통해 강우석이 지속적으로 노출시켰던 근묵자흑의 지경, 즉 악을 자행하는 자든 혹은 악을 소탕하는 자든 악에 가까이 있음으로 인해 결국 '경계에 모여든 이웃'으로서 서로를 닮게 된다는 점이다. 이끼에서도 역시 사법체계의 최전선에서 공권력을 휘두르다 이를 바탕으로 진화된 범법의 경계에서 그 막대한 단물을 빨아먹고는 결국 괴물처럼 군림하는 설정이다.  

이것은 분명 전작들에 비해 능란해진 부분이 있다. 이끼가 자신의 영화경력에 큰 지표가 될것임을 호언하던 배경의 하나로는 깡패보다 더 폭력적인 경찰, 갈취범보다 더 악랄한 경찰이라는 상투적인 시각에서 보다 복잡한 층위를 지닌 묘사로의 진전을 들수 있지 않을런지.(아님말고)

 

의 주체를 전면에 내세우고 극을 끌어가지만 그 틈새에 숨겨진-그러나 완전히 숨겨졌다기엔 충분히 노출된- 제삼의 주체가 폭로되고 마는 본격 반전영화다. 

첫번째 주체인 천용덕이장과 그 꼬붕들. 그들은 초지일관 주어진 자원을 자신들의 욕망에 던져넣는 타락한 세력들이다. 

두번째는 유해국.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과거를 밝히기 위해 주어진 자원을 재구성한다. 

세번째는 수퍼여주인. 그녀는 윤간과 영아유기의 악몽에서 구원받고,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가한뒤 그 댓가로 주어진 자원을 받아들이는듯 하나 구원자는 패배감에 젖고 복수를 해준 천용덕이 증오의 대상이 되자 그 둘을 철저히 소비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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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disc)
이준익 감독, 백성현 외 출연 / 프리지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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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은 술자리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간의 가볍고 반가운 자리다. 농담이 던져지고 농담이 다시 날아온다. 화기애애, 유쾌하다. 술자리의 취지가 뭐였든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갔고 그런 분위기를 다들 기대하고 있는 판이다. 

여기에 딱 세놈이, 정확히 말하면 두놈과 한년이, 중간중간 인터셉트에 들어간다. 그들은 스스로 즐겁지도 않고, 상대를 즐겁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날아가는 농담을 가로채 그 진위를 파악하고 그 실없음을 준엄하게 꾸짖은뒤 농담을 날린자에게로 반사-한다. 분위기 지대로 쌰해진다.

농담에 정색을 하고 받아치는 경우처럼 어이없는 것도 없다. 어이만 없을까? 무섭기까지 하다. 입이 다물어진다. 결국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도망간 왕의 집 앞마당처럼 넓어진 술자리를 그들 셋이 장악한다. 셋은 서로 꽥꽥 거리고, 허탈해하고, 눈을 부릅뜨다 서로를 애닳다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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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시민 - Law Abiding Citiz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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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영화가 얼마나 치밀한지, 영화적인 가치가 얼마나 있는지를 따지기 앞서 캐릭터의 분노와 몰락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목격한 남자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우선 두가지 선택지를 놓고 기로에 서게될 것이다. 더 살것이냐 그만 살것이냐.  

더 살것을 선택한 자들은 사실,,,죽을 용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일 것이다. 이제 좀 더 쉬운 기로에 선다. 복수로 남은 인생을 망칠것이냐 술병을 껴안고 맨땅을 뒹굴며 망칠것이냐. (물론 신이주신 재능과 자기애를 지닌 자들은 조금 다른 선택지를 할당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모범시민일리는 없다)

영화는 철저히 복수의 판타지를 펼쳐보인다. 남은 인생을 복수에 투자하든 술에 헌납하든 주체의 내면은 이미 성치 못한상태다. 끝장을 볼때까지 그것 밖에는 할게 없는 것이다. 

절대절망을 보여줄 수 없는 상업영화기에 애초부터 엔딩은 정해져 있었다. 남자는 제발 이 비참한 생을, 용기없는 나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마감해주기만을 바랄 것이다. 우리는 결국 복종하고 내맡기는데 익숙한 모범시민일 뿐이다. 모범시민으로 돌아와, 득될것 하나 없는 복수극을 한시바삐 그만두고, 내 사랑하는 이들이 지나야만 했던 길이 얼마나 무서운 길이었는지를, 비록 떠밀려갈지라도 확인해보는것. 그것이 그나마 최선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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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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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로만폴란스키는 왜 여아성관계를 가졌을까? 십년전 벌어진 전부인 살해사건이 그의 정신을 병들게 한걸까 아니면 원래 그냥 로리콘의 자질?이 있었던 걸까. 원인이야 어찌됐든 차이나타운의 반전이나 나스타샤 킨스키와의 연애사를 보면 그가 그 방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폴란스키는 가석방중 '도주'를 했다. 그냥 겁이 더럭 나서 그런걸까. 붙잡히고 나서 징역을 살게 될 생각을 하니 그 십년전 비극의 기억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서운함을 느꼈던건지도 모를일이다. 헐리웃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내가, 더군다나 이나라에서 끔찍한 경험까지 해야했던 사람인데, 외로운 차에 개나소나 다하는 약물 좀 쓰고, 어리기는 하지만 합의하에 관계를 했다는데 이렇게까지 무도한 취급을 당해야하나 싶었던걸까. 아니면 최근의 에블린 솔트에 이르기까지 반복누적된, 오명을 벗기위해선 일단 튀고 보자는 식의 지극히 미국(영화)식 사고방식이 작동한 것일까. 

수배자라기엔 너무나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알찬 30년을 보내고 결국 다시 미국의 품에 돌아온 폴란스키는 오명을 벗기는 커녕 그냥 붙잡혀왔다고 한다. 과거 빨갱이로 낙인찍힌 채플린도 세월이 흘러 평생공로상의 영예와 함께 오스카 시상식장에서 그 굴레를 벗었던 바 있는데 말년의 폴란스키는 그런 운도 없나보다. 피아니스트로 오스카를 수상했을때 들어왔더라면 상황이 나았을까? 

어쨌든 미국가권력이 선빵을 날렸고 이제 영화권력이 반격을 할 차례. 1차로는 유수한 영화인들의 무죄서명 쓰나미가 지나갔다. 2차로는 영화의 소비주체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이 개시된다. 즉 가택연금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폴란스키가 그의 수족이기를 자처한 영미권의 유명 영화인들과 함께 영/미사법권을 무너뜨리기(적어도 흠집을 내기) 위한 영화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령작가. 

폴란스키는 지난 30년동안 자신이 범죄자임을 늘 일깨워주었던 두 국가- 영국과 미국에 리모콘을 향하고는 원격조종 크로스펀치를 날린다. 국제형사재판소를 들먹이며 팍스아메리카나의 오래된 치부를 건드리고, 영미를 제외한 세상의 대부분은 자신을 범죄자로 대하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는것이다. 진실을 알아내고는 작지만 통쾌한 쪽지질을 한뒤 득의만만하게 잔을 들어올리는 순간의 맥그리거는 유령작가가 아닌 유령배우가 된다. 하지만 꿈을 꾸는걸까. 펀치는 시간을 거스르느니만 못하게 느리고 그 위력은 바짝 긴장했던 상대에게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과거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젠 더이상 극도로 단순화 된 미장센에서 본질을 집어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닌것 같다. 물론 배우와 스텝은 거장에 대한 경의와 예술에의 신념을 담아 최선의 영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생각된다. 연극적 운치와 거장의 '격'은 충분히 느낄수 있으니 말이다. 으리으리한 의장용 칼집에서 뽑아든 과도처럼, 영화가 다소 허무한 소품이 된 것이 색깔이라면 색깔이고 아쉽다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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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1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제임스 카메론 감독,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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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봉인>과 <웨스트월드>. 내가 이해하는 터미네이터는 이 두 작품으로부터 기원한다. <...봉인>으로부터는 떨쳐버릴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웨스트월드>에서는 적대적인 기계-인간을 닮은-의 섬뜩함을 가져왔다. <...봉인>에 담겨있는 근원적인 공포는 <웨스트월드>의 사이버펑크적 시각으로 해석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인간과 미래간에 이루어진 유일한 약속이며 인간들은 그 약속의 땅을 묘사한 구체적인 상상도로서 지옥도를 그려냈다. 관념으로서의 죽음은 망각이라는 삶의 그늘에 늘 가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특별한 단면, 즉 지인의 죽음과 가족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터미네이터는 이러한 인식의 입체적 변화를 병리적 형태로 꼬아서 교묘하게 제시했다. '인류가 맞게될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누구나 두려워하는 저승의 지옥도'와 뒤섞어놓고는, 새라의 죽음과 그 지옥의 실제라는 상관도를 활용하여 게임을 벌인다. 새라가 죽으면 그 지옥은 현실이 되며 새라가 죽지 않으면 그 지옥은 상상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반신반기계인 지옥의 군주들은 이제 새라를 잡기 위해 교활하게도 '육체파' 저승사자를 보내온다. 새라는 죽음과 조우할때마다 죽음의 우람한 육체에 홀린다. 카메론은 포르노그라피적 암시를 피하기 위해 새라의 시선과 터미네이터의 육체를 한 화면에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던 것은 분명한 성적환락이었다. 오나니즘의 금기, 죽음의 리허설인 성에 대한 은유다. 새라는 항상 무릎이 풀려 주저앉거나, 약에 취한 노리개처럼 눈을 반쯤 뜬채로 마지못해 카일의 손에 이끌린다.

새라가 죽음에 맞서, 카일을 독려하는 여전사로 거듭나는 분기점은 터미네이터의 육체가 다 불타버리고 그의 메카니즘-실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환상은 걷히고 악마는 본성을 드러냈다. 이제 그녀가 해야할 일이란 자신의 생존, 그리고 섹스가 아닌 번식이다. 조금 더 오바한다면 수태고지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 지옥에서 온 카일은 수태를 알리는 메신저 가브리엘이며 새라는 동정녀로서 임신을 하고 구세주를 잉태한다. 육체파 저승사자의 유혹은 끝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핵공포, 연쇄살인등의 인륜적 죄악에 대한 지속적인 묘사와 문란한 육욕지향과 성폭력에의 경고, 반결정론적 웅변이 더해져 사이버펑크 도그마는 완전한 현대판 묵시록이 된다. 묵시록은 유혹과 폭압을 이겨내고 권능을 증거하는 새로운 여성영웅의 신화를 낳는다. 그리고 13년 후 전세계를 향해 '나는 세상의 신이다'라고 외치는 남자가 나타난다.  

 

'저것봐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아직 끝난게 아니예요)'  

-멕시코 소년의 대사중에서 생각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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