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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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코의 나라 이탈리아. 

국민성인가보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읽어야되는데,,,' 빚진 느낌을 주던 이책이 철학서가 아닌 소설인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마침 예쁘장한 양장버전이 출간된 김에 질렀다. 그리고 읽었다. 2권을 채 읽다말고 책을 덮었다. 이때 만약 리뷰를 썼더라면 '이책이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냐'는 류의 격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을것이다. 한동안 숨을 고른 뒤 역자후기까지 다 읽고, 빚진 느낌을 벗어던졌다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에코가 어렵게 꼬아쓴 내용이 결코 가볍다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풀어놓은 지식을 스스로 부정했다가, 보편적 성찰로 마무리하려는 변덕을 궤변이라고 얘기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에코가 쓴 이것이 소설이 맞다면, 나는 마르케스나 로맹가리의 사례를 들고 싶어질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에코의 이야기보다 가볍지도, 환상을 다루는 밀도가 떨어진다고도, 무엇보다도 '지식의 진실성'에서 모자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에코가 아무리 백과사전적지식을 퍼부어도 결코 성취하지 못해낸 것, 바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좋은)소설은 그런것이다.

예술이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에코는 소수를 위한 예술가다. 예술의 첨병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 편집증을 지켜보는것 또한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첨병의 정보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고도의 전문가들은 아무래도 따로 있는 것이다.  

에코의 유명세가 너무도 강력하니 '장미의 이름'같은 다른 책을 좀 더 읽어보려 한다. 부디 '옛날 어느곳의 머저리가 어떤 헛소리를 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여겨진다'는 식으로 베풀어지는 언어유희론자의 지식잔치가 아니길 바란다. 그러고보니 그런 지식잔치는 청년기에 열광할만한 것이긴 하다. 역시 공부는 다 때가 있는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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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 Clash of the Tita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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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스신화에서 이야기되는 신계전쟁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가 티타노마키아, 다른하나는 기간토마키아다. 

두가지 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권좌를 걸고 벌인 최대의 세계대전이었는데 티타노마키아를 통해 티탄들은 올림푸스 신들에게 자신들의 권좌를 물려주게 되고 기간토마키아를 통해 올림푸스 신들은 불안했던 자신들의 권좌를 확고히 하게된다. 즉 티탄들은 그냥 불량괴물들이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가진 신들이었다 이 말이다.  

따라서 헬라스에선 족보도 없는 크라켄을 굳이 헬라스신화에 구겨넣고 싶다면 티탄이 아니라 차라리 기간테스로 분류하는 것이 어울렸을 것이다. 설사 크라켄이 티탄이라는데 이의가 없다해도 영화에서의 크라켄은 자신의 의지대로 전쟁을 하는 주체가 아니라 풀어놓은 미친개에 불과하지 않은가. '마지막 하나남은 티탄의 최후'씬은 스펙터클하긴 하지만 타이틀이 될만한 자격은 없다.(크라켄이 데미갓이었는지 티탄이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안난다. 데미갓 크라켄이 티탄을 향한 하데스의 최종병기였던가?)  

그건 그렇다치고,,,

샘 워싱턴은 본작에 이르기까지 세가지의 존재론적 캐릭터를 연속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기계와 인간사이, 외계인과 인간사이, 신과 인간사이, 세가지 배리에이션은 나름 다양한 가치관을 투영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본작에서 신성을 거부하는 당위는 두번 반복되는 페르세우스의 의미심장한 대사에서 설득력을 찾을수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여기 다 있어요.'  

두명의 아빠에게 다른 의미의 같은 대답을 하기 위해서 페르세우스는 그토록 신성의 손길을 거부했었다. 첫번째 아빠의 귀에 들린 진짜 의미는 '저는 아빠만 있으면 충분해요' 였다. 파파보이 페르세우스는 아빠를 상실하고 나서 더 거대해진 세상에서 더 위대한 두번째 아빠를 만난다.  

두번째 아빠에게 페르세우스의 진의는 '저는 아빠가 필요없어요'였다. 파파보이가 남자로 거듭나는 고색창연한 성장 스토리- 본작의 가치관이다. 터미네이터와 아바타가 비교적 트랜디한 존재론적 고뇌를 담고 있다면 본작은 잘난아들 컴플렉스와 파파컴플렉스로 똘똘뭉친 헬라스신화 본연의 논점을 고스란히 유지한다. 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엔딩인데, 어른들을 위한 신화는 비극을 미화하지만(아빠나 아들 둘중 하나는 꼭 죽어야 화해한다) 12세들을 위한 본작은 희극을 미화한다.(안웃긴 희극은 미화할 필요가 있다.) 

ps: 도대체 왜 제목은 타이탄족의 멸망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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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 평전 - 대참사의 해부 역사 인물 찾기 26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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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학살, 인종청소사의 콜드케이스 캄보디아. 캄보디아 비극의 전반전은 상식적인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었다. 식민지배의 끝물, 국내외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패권국가 미국의 기록적인 폭격으로 인해 기록적인 대량살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베트남에 깨진 깡패국가의 분풀이가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이미 2차대전을 종식시킨 두개의 폭탄으로 미국백인들이 유색인종-특히 동양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명백해졌으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킬링필드의 희생자 수 200만 명 중 3분의 1이상은 이때 희생된 것이라 한다.

헌데 후반전은 봉건군주제와 식민치하, 자본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가 한꺼번에 뒤엉키면서 생긴 캄보디아의 발작, 자해극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이런게 가능했을까? 경악을 불러오는 내성적인 난도질이 시작된다. 캄보디아는 결벽증에 걸린 공산군벌-크메르루주을 중심으로 끝없는 자기의심과 자아비판의 나락으로 치달았다. 처음엔 자신의 불결한 손가락을 모두 끊어내고, 자신의 오염된 손발을 자르고 자신의 병든 내장을 적출해내며, 내 양분을 빨아먹는 태아를 끄집어내고, 자신의 벌레먹은 치아를 모두 뜯어낸뒤 자신의 썩은 눈알을 도려내고 자신의 마비된 심장을 파낸 뒤 마침내 자신의 멍청한 뇌를 갈라냈다. 순수한 자신, 공상적 자아, 궁극의 앙카르를 향해 캄보디아는 자신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갔다.  

캄보디아는 글로벌한 외면속에 마치 덥고 습한 여름날의 불쾌한 악몽인 양 서서히 휘발되어가고 있다. 이념의 도마위에 칼날처럼 휘둘러지다가는 그 도마가 치워진 지금, 밑도 끝도 없는 정신착란의 판타지로 회자되고 있다. 차도로 뛰어든 야만스런 짐승의 운명처럼, 끔찍하게 방치된 채 사망의 경계를 향해 무한수렴하고 있다. 세계 최빈국 캄보디아- 비극끝에 다다른 느닷없는 무소유의 진짜이름-는 차고도 넘치는 풍요의 시대에 신의 부재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지옥의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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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 - Parallel Lif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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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였던가?  

어쨌거나 감독이 하고 싶었던 단 한마디, 이게 아닐까. 지금껏 무결점의 판결을 고수해온 성공적인 법치주의자라는 명예는 그 판결을 받아들여야할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분통을 불쏘시개 삼아 빛나고 있다는 거. 입장만 살짝 바꿔도 얼마나 많은 피결자들의 분노와 원망이 보이는지 말이다. 손만 뻗었으면 쥘 수 있었는데. 발 뒤꿈치만 살짝 들어올렸어도 닿을수 있었는데. 요지부동이다. 법치의 엄밀함이란 얼마나 분통터지는 것인가.  

운명은 내게 달렸다,,,라는 좋은 대사도 있었지만, 감독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맹물같은 메시지를 위해 돈들여 영화씩이나 찍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가치있는 통찰이 퍼즐에 담겨 나왔다는 것이다. 이부분에서 좀 아쉬워진다.  

평행이론은 완성된 그림이 꽤 무시무시한 퍼즐이다. 그 무서움은 그정도면 됐다. 퍼즐의 미덕은 그림의 가치에 있는게 아니라 조각이 서로 잘 들어맞는가에 있다는 기본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대략 꼽아봐도 두세개 정도? 불량 섹터가 발견된다. 부디 다음 퍼즐은 평행이론과 평행하지 않은 운명의, 어거지로 구겨넣지 않아도 되는, 이가 잘 들어맞는 무결점의 퍼즐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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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엽위신 감독, 견자단 외 출연 / CJ엔터테인먼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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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의 미우라 장군은 이연걸의 정무문을 떠오르게 했다. 정무문에는 살인적인 실전무예를 구사하는 일본 장군 후지테라오카가 있었다.  

하지만 두 캐릭터는 좀 다르다. 후지장군의 근처에는 흑룡회가 있어 후지장군은 무술인으로서의 미덕은 흑룡회에 맡겨두고 자신은 무자비한 살인기계가 될수있었다. 미우라장군의 곁에는 자신이 침략군임을 잊지않는 부관이 있다. 덕분에 미우라장군은 정정당당함과 명예를 아는 무인인 척 점잖을 떨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미우라와 엽문의 대결은, 뭔가 모자랐다. 미우라는 엽문에게 호의를 품었고, 결투는 대련의 형식이었으며, 이겼다 하더라도 엽문을 죽일 의사는 없었다. 절박한 상황이 아닌것이다. 그가 엽문에게 쓰러진 뒤, 엽문을 향해 총격을 가한 것은 미우라의 부관이었다. 아무리 무서운척 눈깔을 부라려봤자 미우라는 악당이 못되었다. 기둥에 기대 쓰러진 미우라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진짜 악당은 군부속으로, 일본속으로,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극의 클라이막스는 엽문이 제발로 찾아가 벌인 10대 1 대련이다. 물론 금사부와의 두 번에 걸친 대련과 결투도 굉장했다. 하지만 하얀 매트위에 분노를 꽉 채워놓은 미장센, 25년전 10명의 양아치에게 둘러싸여 삥뜯긴 기억까지도 끄집어내는 후련한 액션, 고막이 아니라 심장을 바로 두드려대는 비지엠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비장함 그 자체의 명품씬이었다.   

미우라와의 일전이 아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미우라는 최후의 악당이 지녀야할 악함과 강함, 그중 하나가 결여된 반쪽자리 보스였다. 좀더 전형적인 악당으로 그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파랑등 전작들의 결점이었던 애매한 드라마를 과감히 덜어내니 영화가 한결 매끄러운 느낌이다. 견자단은 오로지 액션에 최적화된 간결하고 평면적인 배우다. 현대물보다는 역사물에 잘 맞는다. 입을 꼭 다물고 표정을 자제하자. 발끝에서 털리는 분가루가 더 많은 것을 전해준다. 박력만점의 견자단표 액션, 이소룡을 닮은 절대강자의 후계자. 엽문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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