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를 외톨이로 만들어.”
이 말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나는 비교적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엄마는 집에 오면 나랑 안 놀아 주잖아.”
아이는 내가 집에 들어오면 자기만 봐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자기 이외의 것에 몰두하는 게 싫다고 했다.
외동아이를 외톨이로 만들려는 엄마가 있을까?
하지만 본의 아니게 나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의 취미를 아이와 공유하려는 작업이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아이만을 위한 프로그램-학원 기타 등등-에 매이기 싫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을 아이와 함께 즐기고 싶다.
억지로 하는 일은 누가 꼭 해야 한다고 충동질 쳐서 하는 일은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내게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종종 내가 좋아하는 글을 아이에게 소리 내어 읽어준다.
수준과 내용을 따져가며 읽어 주지는 않는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소리 내어 읽어 준다.
엄마 때문에 외톨이가 되었다고 투덜거리는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레고 쌓기도 아니고 조립식 만들기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었다.
나는 평소처럼 소리 내어 글을 읽었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세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밟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이 시를 듣던 아이는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폴짝폴짝, 살금살금과 같은 의태어가 나왔을 때뿐만 아니라, 핥다, 앞발로 툭 건드려, 쏘다니가, 쫓다, 내딛다,의 동사도 몸으로 적절하게 표현했다.
움직임에 관한 표현이 많은 글을 읽어 주고 몸으로 표현하게 하는 방법-나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은 아이의 외로움 해소에 약간은 도움이 된 듯했다.
요즘, 아이의 몸에 흥이 돋는다.
늦은 봄, 트는 싹처럼 아이의 몸에서는 흥이 절로 나와 움직인다.
노래가 나올 때, 걸어갈 때, 그리고 엄마가 읽는 글을 들을 때.
어쨌든 나는,
아이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아이만을 위한 일에 매달려 나 자신을 외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난 역시 너무 이기적인 엄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