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 매일성경 2010.3.4 (큰글본문)
매일성경 편집부 엮음 / 성서유니온(잡지)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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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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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6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습관은 예수님에게 배웠나 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순간에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유대 지방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눅9:28)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산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는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다볼 산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도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났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간절히 기도했더니 반듯하게 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도 오늘날의 산도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이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된 외면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원래의 모습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하시자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이 빛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얼굴도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옷도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옥시크린으로 빨래를 한 것보다 더 희었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눅9:30) 여러분,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했는데 그 선지자는 메시야입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고 그 메시야는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묻어 주셨으나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신34:6)/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그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또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승천한 인물이지만 이들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과 함께 대화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중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눅9:31) 여기서 ‘별세하다.’는 ‘떠난다.’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했지만 예수님은 열방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깊이 졸다가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안했습니다.(눅9:33)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장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했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고 합니다. 밥상은 차리려 하지 않고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헌신은 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부실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고난이 있는 영광은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튼튼해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성장 통입니다. 과정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고난을 이기면 나중에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9:35)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던 모세와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한 엘리야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조연이라면 예수님은 주연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전령이라면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3장 22절을 통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신분만 알려주셨는데 9장 35절을 통해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고 신분도 알려주시고 순종도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하십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들었고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의 말을 들었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도 성공하고 인생도 성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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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비밀 - 영적 전쟁 100전 100승을 위한 시크릿
정성민 지음 / 푸른초장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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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을 졸였다. 내가 사탄의 조종을 받아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거짓의 사람은 아닌지 비춰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의 사람처럼 겉으로는 점잖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욕심을 가졌다. 나는 거짓의 사람처럼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힌 적도 있다. 주로 옳지 않은 일이라고 정죄를 했다. 아이들이 서로 티격태격 싸울 때마다 나의 쓴 뿌리가 유전됐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옛말에 자식이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나는 거짓의 사람처럼 큰 아이를 억압하고 통제했다. 목사의 자녀들이 버릇없다는 교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내 아이는 버릇 있게 키우려고 완벽한 아이를 지향했다. 사춘기인 아이는 그 때를 서운해 한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책임을 통감하는 것을 보니 신경증적인 사람이다. 그나마 쉽게 치료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며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하나님은 관대하시지만 사람은 엄격했기에 눈치를 봤다. 나는 아내가 원하는 일보다는 내가 우선이었다. 산상수훈을 좋아하면서 내 가정에는 황금률을 적용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사랑이 결핍했기 때문에 이런 질환이 생겼나 생각해봤다. 어린 시절 무척 사랑을 받았는데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아쉬웠다. 나는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는 아니고 일처리를 분명하게 하고 정리정돈을 잘 하는 것으로 보아 강박성 성격장애자 같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믿음직스럽고 일 잘한다고 칭찬하지만 깨끗한 물에 고기가 살 수 없듯이 빈틈이 없으면 매력도 없기 마련이다. 정사각형을 그리기보다 최대공약수를 찾아야겠다. 나는 거짓의 사람의 대명사인 요나답처럼 간사하지는 않다. 나는 정도를 걸어가려고 노력한다. 모략과 권모술수는 내가 싫어하는 방식이다. 나는 내 사람을 키우지도 않는다. 내가 힘닿는 대로 도우려고 하지 아쉬울 때 쓰고 필요 없으면 내치지도 않는다. 나는 거짓의 사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의 사람과 일정부분 동일하다고 하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는 저자가 말한 5가지 인간 유형 중에서 독서치료와 영적치료를 통해 용기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발전중이다, 저자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마귀는 잘 알지만 세상과 자신은 잘 모른다고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전쟁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려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이 책은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혜를 담고 있다. 나는 정성민 교수의 ‘신앙 3부작’ 을 모두 읽고 모두 설교로 사용하였다. 그는 신학자의 차가운 머리와 목회자의 뜨거운 가슴을 지닌 Theo-pastor(Theologian+Pastor, 내가 만든 신조어)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사탄이 우리의 상처를 거름으로 삼아 공동체를 파괴시키려고 독초를 재배중이라고 고발한다. 사탄의 목표는 당신의 교회와 가정이다. 이 책으로 완전무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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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11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는 4명의 성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석가모니, 공자, 예수, 마호메트를 4대 성인이라고 말하고,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를 4대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4대 성인은 동양에서 먼저 정했는데 서양에서 마호메트를 빼고 소크라테스를 넣고 이것이 맞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마호메트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아무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른 성인들과 동격으로 이해합니다. 오늘날은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모든 종교는 똑같은 종교지 우월한 종교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여겼다.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 마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마을을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와는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날은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으면서 시작됐습니다.(눅4:38) 그 당시는 말라리아에 감염돼 열병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열병이라는 단어는 불이라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말라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흔한 질환으로 열병이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버나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해열제를 처방하신 게 아니라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났습니다.(눅4:39) 베드로의 장모는 곧바로 원기를 회복하고 예수님에게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35절을 통해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4장 39절을 통해 말씀 한 마디로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장모님의 열병이 낫는 기적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분을 파악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으면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면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오늘은 허탕을 쳤지만 내일을 위해 그물을 손질했습니다. 그물에 묻은 수초를 떼어 주고 돌에 찢긴 그물을 기웠습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몰려왔고 예수님은 해안가로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고 아침에는 그물을 손질하느라 피곤했지만 예수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었습니다. 그 당시 어선은 길이가 4-6미터 정도 됐고 어부 4명이 탔는데 중앙에는 돛이 있어 바람이 불면 돛으로 움직였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육지에서 배를 떼라고 했는가 하면 갈릴리 호수는 지표면 보다 200미터가 낮았고 주변에 언덕이 병풍처럼 쳐져있어 말씀을 전하면 멀리서도 잘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눈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는지 꼬박꼬박 졸면서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지시하셨습니다.(눅5:4)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밤새 고기를 잡고 온 어부에게 배를 빌려 달라고 하시더니 이제 집에 가서 아침 먹고 눈 좀 붙이려 했는데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베드로는 기분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은 탁자를 만드는데 전문가였고 베드로는 고기를 잡는데 전문가였습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니 주제가 넘어도 보통 넘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코칭도 엉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고기는 밤이 되면 물가로 나와 신나게 놀았습니다. 어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저인망 그물을 던졌습니다. 저인망 그물은 한쪽에는 추가 달려 있어 아래로 가라앉았고 다른 한쪽에는 코르크가 달려 있어 물위에 떴습니다. 어부들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그물을 던져서 원을 그리며 그물을 모아 아래쪽과 위쪽의 끈을 잡아당겼습니다. 고기들은 그물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고기들이 쉬려고 강 아래로 깊이 숨었습니다. 지금 그물을 던져봐야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게 뻔했습니다. 베드로의 동료들은 인상을 찌푸렸고 베드로도 잠깐 망설였습니다. 베드로는 어차피 자는 시간도 놓쳤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결심했습니다.(눅5:5)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 이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존경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예수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전후좌우를 재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따르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게 어디 이성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나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존 웨슬리도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신도회에 나갔는데 윌리엄 홀랜드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베드로와 동료들도 힘겹게 노를 저어가 길이가 90미터 정도 되는 그물을 던지기가 무섭게 고기들이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보통 때라면 고기들이 수면 아래에서 쉬고 있어야 하는데 이날따라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보통 때라면 그물을 피하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데 이날따라 그물에 걸리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베드로와 동료들이 끌어당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육지에서 구경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힘차게 그물을 끌어당겼고 고기는 두 배가 잠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은 이래 이렇게 많이 잡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동료들은 기뻐했지만 베드로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다시 주목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도저히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고 저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환상 중에 부르시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중세시대 때 성당을 크게 짓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위엄 앞에 인간을 굴복종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베드로는 장모님의 열병이 낫는 기적을 목격하고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한낮에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체험하고는 고꾸라졌습니다. 인간은 버티어봤자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는데 더 고집을 피운다면 채찍을 맞게 됩니다. 베드로는 맞기 전에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안심시키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눅5:10)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조금 전에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데 이제부터는 엄청난 사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잡은 고기는 베드로가 구원할 사람들을 암시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기를 많이 잡아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는 게 인생의 목표였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그 많은 고기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적 가치는 작아지고 신앙적 가치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어린아이가 젖을 먹듯이 보살핌을 받지만 어린이로 커가면서 밥을 먹듯이 스스로 신앙 생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신앙이 자라면 어른이 되듯이 교회를 처음 나온 교인들을 보살펴주게 됩니다. 사람이 자라듯이 신앙도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성숙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했다고 베드로처럼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부르십니다. 그것보다도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르게 산다면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 품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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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 생활풍습 이야기 하(下) - 성경의 비밀을 푸는 생활풍습 이야기
류모세 지음, 최명덕 감수 / 두란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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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시리즈 제6권은 성(城)과 장례(葬禮)로 시작됩니다. 성경시대의 도시와 시골은 성벽 안쪽이냐 바깥쪽이냐에 따라 갈렸다고 합니다. 성벽 안의 도시에는 전체 주민의 10% 정도인 엘리트 계층이 살았고 성벽 주변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시골 마을에는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네요. 성벽은 두 줄로 늘어섰는데 두 성벽 사이의 공간을 평상시에는 집으로 사용했고 전시에는 흙으로 메워 성벽을 튼튼히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도 사울도 성벽을 타고 탈출할 수 있었나 봅니다. 성문은 외문과 내문과 망대로 이루어졌는데 외문에 방이 있어 장로들이 민사 재판을 했다고 하네요. 장로들이 외압에 굴복할 때 선지자들의 목청도 커졌습니다. 내문은 외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돌아야 했다고 합니다. 적군이 왼손에 방패를 오른손엔 창을 들고 있어 오른쪽으로 도는 순간 허점이 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고 합니다.(나는 여기가 이해되지 않아 일러스트를 자꾸 봤지만 내문이 왼쪽에 있기 때문에 적군이 외문을 무너뜨리고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면서 왼손에 든 방패로 방어를 하고 오른손에 든 창으로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문은 공격의 일차 목표이자 방어의 우선순위라 쌍방 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다윗 왕의 밀명을 받은 요압 장군은 우리아 장군을 성문 전투에 배치해 고슴도치로 만들었습니다./ 성경시대에 장례를 치를 때 남자는 시신을 운구했고 여자는 향유를 바르고 세마포를 입혔다고 하네요. 안식 후 첫 날에 여자들만 무덤으로 갔는데 제자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라네요. 이것을 안다면 문을 닫아 걸은 제자들을 너무 탓하지도 무덤에 찾아간 여 제자들을 너무 칭찬하지도 않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시신을 방치하거나 불에 태우거나 열조의 무덤에 안치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네요. 어떤 목사님은 예수님이 부자의 묘실에 안장됐다고 안심하던데 유대 문화와 동떨어진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수치스럽게 묻히셨지만 명예롭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류모세 선교사는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카메룬 감독처럼 3D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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