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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평점 :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난 이제야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완전한 어른의 세계에 속해 있던 운전이라는 세계, 어릴적 아빠가 운전하는 걸 보다가 화살표가 몇 번 깜박깜박 하고 나면 여지없이 아빠가 그 쪽으로 핸들을 트는 것을 보고 '우와, 자동차가 어떻게 우리가 가는 길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빠가 깜박이를 켜는게 아니라, 자동차가 이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는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쩜 그리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여유롭게 깜박이를 넣고, 자유롭게 차선변경을 해대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신기하기만 하던 어른들의 세계에 나도 스리슬쩍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엄마, 아빠가 소곤소곤 얘기하던 은행 융자금과 대출의 세계를 현실에서 이해하고 되었고, 결혼과 육아라는 현실이 코앞에 당도해온 그런 어른 말이다. 어릴 적 상상 했던 무지무지 잘나가고 빛나는 어른의 모습은 되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난 꾸역꾸역 어른이 됐다. 내 마음도 같이 어른이 됐을까?
마스다 미리의 중년 어른아이 감성을 담은 에세이가 나왔다. 만화가로 유명한 분이고, 지금까지 나온 만화책도 무지무지 많다고 알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에세이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 시절 어린아이들은 그 모습 그대로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 짧은 에세이는 시종일관 소녀같고 엉뚱한 그녀의 매력을 보여준다. 책 초반 부분을 읽으면서 20대 정도의 싱그러움이 느껴져서 혹시 젊었을 때 썼던 일기를 보여주는건가 싶었는데, 지금의 나이, 중년이 되어서의 즐거운 생활들을 엮은 책이었다. 친구들과 페루 요리 만들어 먹기 모임을 하자며 충동적으로 모여 맛있는 요리를 해먹고, 달콤한 음식을 보면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그녀의 귀여운 일기를 보고 있으면 싱긋 웃음이 난다. 가끔 가다 나이드신 부모님 얘기나, 결혼을 안한 자신이 혼자 늙어가는 사실에 대한 얘기를 할 때나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뿐, 그녀의 평소생활은 2~30대의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게 항상 천진난만하고 엉뚱하다. 가족오락회에서 접시돌리는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밤새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라던가 어린시절의 엉뚱한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나는 고타쓰(난방기구) 상판의 먼지 제거하는 일도 동경했다. 요즘 고타쓰 상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사안 가장자리가 덧대어 있었다. 그래서 그 덧댄 사이로 먼지가 끼어 지저분 했다. 우리집에서는 거기에 쌓인 먼지를 이쑤시개로 빼내곤 했는데 난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덧댄 곳에 이쑤시개를 꼽은 후 고타쓰 가장자리를 한 바퀴 빙 돌면 이쑤시개 끝에 까만 먼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 나, 크면 고타쓰 먼지 제거하는 사람이 될래."
그러면 엄마는 웃으면서 "고맙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
<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름다운 꿈] p.93>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에 점점 치여가면서 웃음과 동심을 잃어간다. 그런데 우리의 마스다 미리 여사는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것을 기어이 찾아내어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계단 옆에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먹는 바삿하고 고소한 튀김.
"우리, 꼭 애들 같다."
그러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양과 깜장 얼룩의 길고양이가 와서, 우리 앞에 다소곳하게 앉는다.
"왜? 너도 끼고 싶어?"
중년의 세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 저녁 노을 빛을 받으며 바람을 맞는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것 속에 분명히 지금 이 순간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저녁노을계단에 앉아] p .34>
빨갛게 불타는 저녁 노을을 친구들과 고양이와 함께 바라보며 순수하게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여유, 눈앞의 것들이 뭐든지 신기하고 아름답기만한 어린아이의 시선, 그건 우리가 나이를 얼마나 먹든 꼭 지켜야 하는 정신적 자산 아닐까? 내 속에도 어린아이가 있을까 생각하며 끄적끄적 일기를 써봤다.

「초등학교때 겪은 일 중에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서러운 일이 하나 있다. 옆집 가족과 함께개울가로 놀러갔던 날, 갑자기 비가 내리기시작했다. 만약을 대비해 다급하게 텐트 쳤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양쪽 집안의 4명의 아이들은 다들 한 두살 터울이었지만 그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아빠가 우물쭈물 하는 나를 보고 답답했던지 나에게만 다그쳤다.
"니가 애야? 꾸물거리지 말고 이것 좀 옮겨봐."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랬겠거니 이해는 하지만 어찌나 서러웠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그럼 내가 어른이야?" 하고 소리치곤 낑낑대며 짐을 옮겼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은 법적으로도 완벽한 어린이란 말이다. 첫째라는 이유로 나는 항상 반쯤은 어른 행세를 해야할 때가 많았다. 거기다 사고뭉치 동생에 비해 공부든 뭐든 알아서 스스로 했던 편이었기에 부모님의 잔소리도 별로 들어본 적도 없다. 관심이 고팠던 어린 나에게는 어른스러웠던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였던 셈이다. 덕분에 난 나이를 먹고도 아기 같은 짓을 하곤 한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야~ 뭐행?" 하고 여전히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딸이고, 결혼해서 벌써 애가 둘씩 있는 부모가 된 친구들을 우러러 보며 "아니, 쟤네는 대체 언제 저렇게 어른이 됐데?" 하며 신기해하는 철부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좋아하는 빈스빈스 아이스크림 와플만 먹으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단순함을 장착하고 있으며, 매일 걷는 산책길의 풍경을 보면서도 "어머 여기봐, 너무 예쁘다!" 하고 매번 감탄할 줄 아는 단기기억 상실증(?)도 얼마쯤 지녔다.
난 앞으로도 철들지 않을 것이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철없이 웃을 수 있는 어른아이로 살고 싶다.」
얼굴에 난 주름은 보톡스로 펼 수 있지만, 마음에 진 주름은 답이 없다.
즐겁게 살자,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