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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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난 이제야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완전한 어른의 세계에 속해 있던 운전이라는 세계, 어릴적 아빠가 운전하는 걸 보다가 화살표가 몇 번 깜박깜박 하고 나면 여지없이 아빠가 그 쪽으로 핸들을 트는 것을 보고 '우와, 자동차가 어떻게 우리가 가는 길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빠가 깜박이를 켜는게 아니라, 자동차가 이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는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쩜 그리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여유롭게 깜박이를 넣고, 자유롭게 차선변경을 해대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신기하기만 하던 어른들의 세계에 나도 스리슬쩍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엄마, 아빠가 소곤소곤 얘기하던 은행 융자금과 대출의 세계를 현실에서 이해하고 되었고, 결혼과 육아라는 현실이 코앞에 당도해온 그런 어른 말이다. 어릴 적 상상 했던 무지무지 잘나가고 빛나는 어른의 모습은 되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난 꾸역꾸역 어른이 됐다. 내 마음도 같이 어른이 됐을까? 


마스다 미리의 중년 어른아이 감성을 담은 에세이가 나왔다. 만화가로 유명한 분이고, 지금까지 나온 만화책도 무지무지 많다고 알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에세이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 시절 어린아이들은 그 모습 그대로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 짧은 에세이는 시종일관 소녀같고 엉뚱한 그녀의 매력을 보여준다. 책 초반 부분을 읽으면서 20대 정도의 싱그러움이 느껴져서 혹시 젊었을 때 썼던 일기를 보여주는건가 싶었는데, 지금의 나이, 중년이 되어서의 즐거운 생활들을 엮은 책이었다. 친구들과 페루 요리 만들어 먹기 모임을 하자며 충동적으로 모여 맛있는 요리를 해먹고, 달콤한 음식을 보면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그녀의 귀여운 일기를 보고 있으면 싱긋 웃음이 난다. 가끔 가다 나이드신 부모님 얘기나, 결혼을 안한 자신이 혼자 늙어가는 사실에 대한 얘기를 할 때나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뿐, 그녀의 평소생활은 2~30대의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게 항상 천진난만하고 엉뚱하다. 가족오락회에서 접시돌리는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밤새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라던가 어린시절의 엉뚱한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나는 고타쓰(난방기구) 상판의 먼지 제거하는 일도 동경했다. 요즘 고타쓰 상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사안 가장자리가 덧대어 있었다. 그래서 그 덧댄 사이로 먼지가 끼어 지저분 했다. 우리집에서는 거기에 쌓인 먼지를 이쑤시개로 빼내곤 했는데 난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덧댄 곳에 이쑤시개를 꼽은 후 고타쓰 가장자리를 한 바퀴 빙 돌면 이쑤시개 끝에 까만 먼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 나, 크면 고타쓰 먼지 제거하는 사람이 될래." 

그러면 엄마는 웃으면서 "고맙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

<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름다운 꿈]  p.93>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에 점점 치여가면서 웃음과 동심을 잃어간다. 그런데 우리의 마스다 미리 여사는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것을 기어이 찾아내어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계단 옆에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먹는 바삿하고 고소한 튀김.

"우리, 꼭 애들 같다."

그러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양과 깜장 얼룩의 길고양이가 와서, 우리 앞에 다소곳하게 앉는다. 

"왜? 너도 끼고 싶어?"

중년의 세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 저녁 노을 빛을 받으며 바람을 맞는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것 속에 분명히 지금 이 순간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저녁노을계단에 앉아] p .34>


빨갛게 불타는 저녁 노을을 친구들과 고양이와 함께 바라보며 순수하게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여유, 눈앞의 것들이 뭐든지 신기하고 아름답기만한 어린아이의 시선, 그건 우리가 나이를 얼마나 먹든 꼭 지켜야 하는 정신적 자산 아닐까? 내 속에도 어린아이가 있을까 생각하며 끄적끄적 일기를 써봤다. 



 


초등학교때 겪은 일 중에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서러운 일이 하나 있다. 옆집 가족과 함께개울가로 놀러갔던 날, 갑자기 비가 내리기시작했다. 만약을 대비해 다급하게 텐트 쳤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양쪽 집안의 4명의 아이들은 다들 한 두살 터울이었지만 그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아빠가 우물쭈물 하는 나를 보고 답답했던지 나에게만 다그쳤다. 

"니가 애야? 꾸물거리지 말고 이것 좀 옮겨봐."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랬겠거니 이해는 하지만 어찌나 서러웠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그럼 내가 어른이야?" 하고 소리치곤 낑낑대며 짐을 옮겼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은 법적으로도 완벽한 어린이란 말이다. 첫째라는 이유로 나는 항상 반쯤은 어른 행세를 해야할 때가 많았다. 거기다 사고뭉치 동생에 비해 공부든 뭐든 알아서 스스로 했던 편이었기에 부모님의 잔소리도 별로 들어본 적도 없다. 관심이 고팠던 어린 나에게는 어른스러웠던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였던 셈이다. 덕분에 난 나이를 먹고도 아기 같은 짓을 하곤 한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야~ 뭐행?" 하고 여전히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딸이고, 결혼해서 벌써 애가 둘씩 있는 부모가 된 친구들을 우러러 보며 "아니, 쟤네는 대체 언제 저렇게 어른이 됐데?" 하며 신기해하는 철부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좋아하는 빈스빈스 아이스크림 와플만 먹으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단순함을 장착하고 있으며, 매일 걷는 산책길의 풍경을 보면서도 "어머 여기봐, 너무 예쁘다!" 하고 매번 감탄할 줄 아는 단기기억 상실증(?)도 얼마쯤 지녔다. 

난 앞으로도 철들지 않을 것이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철없이 웃을 수 있는 어른아이로 살고 싶다.



얼굴에 난 주름은 보톡스로 펼 수 있지만, 마음에 진 주름은 답이 없다. 

즐겁게 살자,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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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 황선미 첫 번째 에세이
황선미 지음 / 예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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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만 보이면 끼적인다는 작가의 오래된 습관이 왠지 반가웠다. 나도 한때 종이만 보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끄적이며 혼자 마음 달래던 때가 있었다. 종이에 실컷 끄적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끄적이듯 작가의 마음을 털어놓았던 일기장을 담은 책이다. 정말 혼자 볼 일기장이니까 할 수 있는 말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 작가로서의 고뇌들이 날것의 느낌으로 들어있다. 나의 끄적임이 나중에 다시 못봐줄 유치찬란한 칭얼거림이었다면, 그녀의 끼적임은 읽는 이에게 공감과 울림을 주는 힘을 지닌 글이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 베스트 셀러 작가 황선미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소박함과 진실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이야기다. 어릴 때는 일기를 쓰고 나서 누가 볼까봐 항상 태워서 없앴었다는 저자가 이 일기들을 공개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니 지치거나 슬플 때마다 나는 이렇게 끼적였던 듯 하다. 누구하고도 말하기 어려웠던 내밀한 감정, 온전히 내 몫일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이나 고독, 좌절감, 때로는 패배감의 정체를 몰라 낱알을 헤집듯 사건의 전말을 따져보는 경우에도 닥치는 대로 아무 종이에나 글을 끼적였다. 나 자신에 집중하는 이 행위는 그러니까, 더는 절망하지 않으려는 숨고르기라고 해도 좋겠다.」 

< 작가의 말 중  p.5> 



저자는 어린시절에 대한 아픔이 있는 듯 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밖으로 많이 떠돌던 아버지, 살기도 팍팍한 환경 탓에 자신에게 끝까지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엄마, 부모의 사랑에 대한 결핍은 저자에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길거리의 노숙자나 세월에 지친 노인을 우연히 마주칠 때면 저자는 어김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실때까지도 자신에게 곁을 내주지 않은 탓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얼마쯤 상처를 가진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는 일곱살이 되기전에 잠깐 느껴봤던 완벽한 풍성함과 안정감을 기억하며 그것이 작품활동의 원천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은 참 오랜 시간동안 인생에 영향을 미치나보다. 저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좀 더 행복하게 자라났다면 더 밝고, 깊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난 어쩌면 작가가 겪었던 빛과 어둠에 대한 기억이 작품에 더 큰 명암을 넣어주어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 부부는 남편이 시골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는 통에 시골에 땅을 사게 되는데, 당진 초입에서 바다도 안보이는 마을 한가운데의 땅을 속아서, 그것도 시세보다 비싸게 구입한다. 이왕 저지른 일 끝까지 하자 싶어 집도 짓고 귀농은 했지만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농부의 답답한 심정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황도 복숭아 나무를 심기로 계획하지만 막상 작은 꼬챙이 같은 묘목을 보고 이게 언제 크려나 싶어 실망하기도 한다. 그런 생활 안에서도 깨닫는게 있다. 



「소소하게 농사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삶과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눈을 가진 감자 조각이 어두운 땅속에서 해내는 일보다 놀랍고 창조적인 예술이 얼마나 될까. 칼날에 쪼개진 몸을 스스로 치유하며 자라난 감자 줄기가 뽑힐 때 실핏줄로 연결된 크고 작은 감자들이 주렁주렁 딸려 나오던 광경은 내가 경험한 어떤 예술보다 경이로웠다. 」 

<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p. 244>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직접 그린 삽화가 책 곳곳에 등장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꽃과 열매 들이다. 얼마나 세세하게 관찰하면서 그렸는지 그림만 봐도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작가로서의 사생활이다. 글이 안써져서 괴로워하고, 인세가 줄어들어 살림에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작가로서 겪게 되는 영광스러운 일, 혹은 불쾌한 일들이 가감없이 적혀있어 흥미로웠다. 10년차 작가, 그것도 책을 100만부 팔아치운 베스트 셀러 작가지만 결코 영광스러운 삶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보다 잘 나가게 된 덕에 가족의 생계를 도맡게 되어 무거운 책임감에 허덕여야 하고, <마당을 나온 암탉>라는 작품 하나로 작가를 규정하는 탓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허덕이는 중이다. 일기라는 가장 깊숙한 내면을 표현한 글을 보면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한사람의 인간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했을 지라도 아프고, 상처받고, 걱정많은 우리네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쓸수록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나는 결코 내 유년의 그 거리에서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내 작품의 거의 모든 게 그 거리에서 재생산되고 변주되고 확장된다. 바로 그 거리가 나를 키워냈다는 걸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무리 지나온 길을 버린다 해도 나는 그 길의 끝에 있고, 지나온 길이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p. 365> 


저자는 과거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하지만, 결국엔 과거의 경험을 자양분으로 현재를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고, 뭔지 모를 미래를 위해 꾸준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오늘'은 또 '내일'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서 지금을 견뎌내면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견뎌낸 하루들이 켜켜이 내 앞에 쌓여있기에 가끔은, 오늘이 참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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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4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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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로 기억한다.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 별빛이 몇 광년되는 거리에서 왔단 말이지?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별이라니...' 학교에서 별에 대한 이야기를 배우고 나서 올려다 본 밤하늘은 아무 생각없이 본 하늘과는 좀 달라보였다. 광활하고 까만 우주를 생각하면 기분이 너무나 아득해져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자그마한 고민들은 아무것도 아닌걸로 여겨지곤 했다. 마음이 복잡해질 땐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까마득한 우주를 상상했다. 어린 사춘기 소녀의 꽤나 철학적인 자기위로였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지구과학 과목을 좋아했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그 속에 속한 지구를 나와 떼놓고 과학적으로 생각해본다는건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기원>은 그야말로 우주의 탄생인 빅뱅부터 시작해서 은하계와 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구는 어떻게 생겨났고 생물이 살아가기 적합한 환경이 될 수 있었는지, 특히나 지구에 우리같은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었던 가능성과 환경에 대해 300페이지(원문은 100페이지)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쾌속질주하며 알려주는 책이다. 엄청난 빅 히스토리를 짧게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절대로 쉽지 않다. 방대한 내용을 대충 대충 쉽게 짚고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깊이 파헤쳐 다른 책에서 볼 수없었던 전문적인 지식까지 조목조목 알려주기 때문에 사실 일반인이 보기엔... 어렵다. 읽다가 외계어를 읽는 기분이 들어서 몇 페이지씩 훅훅 뛰어넘으면서 읽기도 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땐 그냥 넘어가는 게 상책! 그렇게 이해할 수있는 부분만 건너뛰면서 읽어도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던 듯 하다. 


모든 것의 기원은 예일대의 과학강의 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데이비드 버코비치 교수에게 학생들이 찾아와 막무가내로 이런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만들어진 수업이라고 한다. 그 학생들은 이 수업을 듣고 정말 다 이해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과학도나 물리학도가 아닌) 일반인의 지식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책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근데 요상하게도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니 (물론 띄엄띄엄 읽었지만)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조금은 더 전문적으로 알게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기분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p. 85> 그러나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달月'이다. 행성이 위성을 거느리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달이 있다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달의 질량은 목성이나 토성이 거느리고 있는 가장 큰 위성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목성의 질량은 지구의 300배나 되는데 목성의 가장 큰 위성인 가니메데Ganymede의 질량은 달의 2배 밖에 안된다 (2배 정도의 차이는 그냥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3장 태양계와 행성 중에서 > 


지구에 가까이 돌고 있는 달은 실제로 미스테리한 존재이다. 달이 언제, 왜 생겼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지구에서 보이는 다른 별들에 비해 달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크다. 추석 때마다 엄청난 크기의 보름달을 보면 너무 크고 밝아서 놀랍고 경악스럽기 까지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저렇게 큰 위성이 우리 옆에 딱 붙어있을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 달은 지구에 중력을 행사해서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조간대에 사는 생물들이 수상 생활과 육지생활에 모두 적응해서 바다 생명체가 육지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한다.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과 동물이 생겨난 것도 어쩌면 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신기하다. 


<p. 179> 희귀 지구 가설에 의하면 지구는 은하수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은 덕분에 생명체 탄생에 적절한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의 태양계가 은하수의 중심에 가까웠다면 초대형 블랙홀이 내뿜는 가공할 복사에너지에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지구는 탄생시기도 적절했고(생명에 필요한 원소들이 모두 만들어진 후에 탄생했다), 물이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모두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태양과의 거리도 적당했다. 천문학적 조건 외에도 지구는 지질구조판을 갖고 있어서 안정된 기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달의 조력에 의한 조수현상 덕분에 수상생물이 육지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지구는 자전축이 공전 면에 대하여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계절이 주기적으로 변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었다. 

<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중에서 >


넓디 넓은 우주, 우리 은하계 너머 어딘가에는 또다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한 우리 은하계에서는 지구 외의 별에서 생명체를 발견한 일이 없다. 지구는 하필 적절한 위치에서 적절한 기후와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인류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행운 속에서 생겨난 생물체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드라마를 보다가 별거 아닌데 머리에 확 박힌 대사가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배두나가 조승우와 나누는 대화였다. 

배두나가 조승우에게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라고 묻는다. 

"네"

"왜요?"

"(하늘을 가리키며) 공간 낭비니까?"  

외계인이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대화 중 생각나는 가장 명쾌한 대답인 것 같다. 이 광활하고 끝도 없는 우주에 생명체가 우리 밖에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간낭비 아닌가 말이다. 


<p.259> 이 책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우주의 역사를 24시간으로 축약했을 때, 인간의 역사는 길게 잡아봐야 0.04초 밖에 안된다. 이 책 전체가 우주의 역사라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쯤 될 것이다. 

< 8장 인류와 문명 중에서 >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나타난 건 우주의 역사로 보면 불과 1초도 안되는 시간 전에 갑자기 휙 하고 나타난 꼴이다. 그런 인간들이 짧은 시간에 모든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등극하여, 지구 환경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위치에 올라섰다. 하지만 우리가 밝혀낸 우주의 비밀은 아직 먼지만큼도 안 될 듯 하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렇기에 우주 너머에 뭐가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모든 것의 기원> 은 광활한 역사 속 알아야 될 지식들만 쏙쏙 뽑아내서 잘 정리해놓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빅히스토리 책 일 듯 하다. 좀 더 깊게 전문적으로 이 우주와 모든 것의 기원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물론 어려운 건 각오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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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온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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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핏줄이란 대체 뭘까?" 

<아침이 온다>를 읽고 난 다음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남자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가 최근에 입양에 관한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라는 말을 시작으로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말하면서 중간중간 울컥하는 마음을 되삼키며 마지막 장면까지 얘기를 끝마치자 오빠도 다소 울컥한 표정이었다. 

"야, 이거 이야기로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네. 한 편의 영화같아. 특히 마지막 장면 진짜 여운이 남는다." 

그 후 둘이서 한참을, 핏줄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가족의 의미는 뭘까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은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매력도 충분했지만 곰곰히 곱씹어 생각해 볼만한 요소들도 많아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핏줄로 이어진 친부모와 말다툼 같은 대화를 하면서 가족이란 노력해서 쌓아 올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족은 아무리 핏줄로 이어졌다 한들 오만하게 굴어서는 쌓아올릴 수 없는 관계다. < 아침이 온다 p. 140>


아사토를 입양한지 6년 째, 커갈수록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을 키우는 행복에 푹 빠져있는 엄마 사토코에게 어느 날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아이를 돌려주세요. 그러기 싫다면 돈을 준비하세요."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왔던 사랑스러운 아들인데 이제와서 돌려달라니 이 얼마나 날벼락 같은 말인가. 아사토를 부부에게 맡긴 어린 엄마는 이럴 사람이 아닌데 도데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사토코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다. 


사토코 부부는 6년 전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인해 자연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본래 아이를 갖는 것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알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열망으로 열심히 불임 클리닉에 다니며 갖가지 시도를 해보기 시작한다. 욕심과 달리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막대한 비용과 고통에 부부는 서서히 지쳐간다. 그렇게 부부는 결국 임신을 포기하고 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부부는 뉴스에서 아이 양육이 불가능한 부모와 불임 부부를 연결해 입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단체 '베이비 배턴'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핏줄을 중요시 하는 일본의 분위기 속에서 입양은 큰 결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부부는 베이베 배턴의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실제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참석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얘기해주는 그 표정을 보고 입양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 부분에서 코끝이 찡했다.


입양신청을 한지 한달 후, 부부는 드디어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아기의 엄마는 놀랍게도 앳되 보이는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작은 몸으로 사토코의 손을 꼭 잡고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라는 말만 되뇌이던 작은 소녀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출산하게 된 것일까. 아사토를 돌려달라며 전화를 걸었던 여자는 정말 이 소녀가 맞는걸까. 


소설 <아침이 온다>는 15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아이를 출산하게 된 엄마 가타쿠라 히카리의 인생과 입양한 아이를 사랑으로 길러온  사토코 부부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어린 나이에 임신했다고 하면 보통 가정환경이 불우했거나 불량한 아이는 아니었을까 상상하기 쉽지만 히카리는 예상외로 교사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막내딸이었다. 교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몰라도 딸들의 자연스러운 이성에 대한 관심에 너무나 폐쇄적이었던 부모님에 대한 반작용으로 히카리는 오히려 자유롭고 자극적인 연애를 꿈꾸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러던 차에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히카리는 그에게 자신의 순결을 바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히카리의 인생은 조금씩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길로 빠져들게 되는데... 


편견이란 무섭다. 입양한 아이는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보다 애정이 덜 갈 것 같고, 어린 나이에 출산한 여자아이는 왠지 발라당 까진 아이일 것 같고, 바른 부모 밑에서는 무조건 바른 아이가 자라날 것 같지만, 틀렸다. 우리는 잘 모르는 세계를 바라볼 때 잘 모른다는 이유로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 

핏줄이란 무엇일까. 같은 핏줄로 이루어진 가족이면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하고, 조심성 없는 말과 행동으로 서로 평생토록 안고갈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의 노력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핏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출산을 마치고 돌아온 히카리가 명절에 온 사촌들이 다 모인 외할머니집에서 외삼촌이 자신의 임신과 출산 사실을 들먹이며 같잖은 위로를 건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출산에 대해 상의도 없이 모든 친척에게 알린 엄마를 증오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심해하거나 비웃고 있을 그 들의 마음을 히카리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한편 아사토의 엄마는 아들이 유치원에서 친구를 정글짐에서 밀었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아들인 아사토가 자신이 한것이 아니라고 하자 주변의 비난과 질타를 무릅쓰고서도 아들을 믿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속으로는 '정말 아들이 한 짓이면 어쩌지' 하고 고민하기도 하지만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상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직접 배가 아파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자식에게 상처주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로 인한 책임과 대가도 오롯이 지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두 부모의 모습들이 대비되면서 히카리의 삶이 너무 가슴아팠다. 딸이 겪었을 아픔을 이해하기 보다 남들에게 숨기기 바빴던 엄마의 모습, 그럼에도 친척들에게는 핏줄이라는 이유로 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비밀을 공유하는 모습, 방황하는 히카리를 허락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포기하고 방관하는 모습, 이것은 같은 핏줄을 나눈 가족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히카리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났다. 


좋은 소설은 낯선 배경과 환경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잘 이끌어 낸 이야기라고 들은 적이 있다. 불임이나 혼전출산, 둘 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상황이지만 아침이 온다 를 읽으면서는 마치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된 듯 함께 아파하고 공감했다. 아플 정도로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내 머릿속 마지막 이미지는 그래도 아름답고 동화적인 장면이었다. 책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에서 히카리라는 이름은 빛이라는 뜻이고, 아사토는 아침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참 절묘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부디 햇빛 찬란한 아침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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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임영태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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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은행업무를 보고, 꽃에 물을 주는 일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매일 내 눈앞에 펼쳐진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시간들이 내 삶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 단면만 보이기에 뭔가 특별해보이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똑같다. '사람사는게 다 똑같지' 라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일거다. 살아가는 일상에 관한 담담한 이야기, 소설이지만 별다른 큰 사건이 없는 심심한 이야기, 그렇기에 더 진짜같은 이야기가 이 소설에 담겨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의 돌을 굴려 올리며 그 숙명 안에서 자기 존재의 긍지를 찾는다. 세상 누구인들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비굴한 아첨도 허세도 뻔뻔함도, 남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 일마저 아무튼 저마다의 고군분투이다. 그런 눈길로 바라보면 모든 삶이 눈물 겹다. 
<작가의 말중 p.8>

소설 속의 '나'는 인구 오천여 명이 사는 작은 읍에서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있는 GS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의 남성이다.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시급 6,500원을 받으면서 일한다. 편의점에 출근해서 오후에 일하는 남학생과 교대를 하고, 가게 안을 둘러보고, 청소를 하고, 담배와 진열대를 점검하고, 마치 혼자 커다란 우주선에 탑승한 기분으로 한밤에 혼자 환하게 불켜진 편의점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한다. 소설은 편의점에서 주인공이 일하는 모든 과정과 밤새 오가는 손님들의 생김새나 구입해가는 물품의 종류와 가격까지 너무나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런 단조로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자도 실제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걸까? 너무 세부적이라 그 옆에서 같이 밤새도록 편의점 판매대를 지키고 앉아서, 들고 나는 손님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한밤 중에 오는 손님들은 규칙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다르지만, 아침 6시가 지나고 출근시간 대가 되면 매일 매일 나타나는 인물들이 정해져있다. 매일 일반적인 통학시간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편의점에 와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떼우는 학생, 아침마다 신문 2부씩 사가는 아저씨, 조기축구가 끝나고 2+1 컵커피를 사가는 아저씨 등 '나'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들러서 그들이 사가는 제품과 그들의 표정을 보며 타인의 삶의 관찰하고 행운을 빌어준다.

주인공의 아내 역시 동네의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아내는 오후 3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까지 5700원의 시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부부는 어쩌다 쉬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함께 밥 먹을 시간도 거의 없는 셈이다.  주인공은 젊을 적 다니던 회사가 IMF로 망하게 되면서 차라리 잘됐다 싶어 원래 하고 싶었던 '발명'을 하고 했다. 어떻게든 대박 상품을 만들어내면 인생 역전이라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이렇게 편의점에서 밤새도록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다. 

삶의 이면들에 언뜻언뜻 매혹적인 것이 번득거릴 때 나는 내 앞에 비범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먹고 사는 것에나 매여 있는 시시한 삶은 결코 살지 않을 것이다. 더 높고 더 고결한, 눈부신 무엇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평범하기라도 했다면…… 허술하고 조급하고, 때로 시건방지기까지 했다. 늘 추상적으로 더듬거렸을 뿐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성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박한 휴식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구차한 사내일 뿐이었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176>

주인공은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과거 아내와 살아갈 방도를 찾기 위해 살던 집의 전세자금을 빼서 동네 슈퍼라도 시작해 보려고 내놓은 가게들을 여럿 보러다녔었다. 꿈에 부풀어 보러 갔던 가게의 주인들은 하루 매출 15~25만원 정도에 수익율은 매출의 20% 정도된다며 주인공 부부가 간절히 가게를 인수해주기를 바랬지만, 주인공 눈에 비친 그들 삶의 찌들고 지친 모습은 자기들이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부부가 하루종일 모든 시간을 투자해 한달에 60~70만원을 번다면 그 인생은 과연 어떨 것인가. 그렇게 이들은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와서 새로운 꿈을 품고 열심히 각자의 시간, 각자의 편의점에서 각자의 우주선을 꾸려가고 있다.

책 표지에 "살아가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라는 멘트와 함께 가만히 보면 첵 제목에서 중간에 자음 모음 몇개만 까만 금박이 씌어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독'이라고 읽힌다.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고독이다. 그런데 상황이 절망적이든, 비극적이든, 기쁘든 슬프든 사람은 어떻게든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 사람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작가는 그 살아있는 삶 자체를 짧은 소설에 담고, 독자가 같이 따라다니며 각자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혹시 쌀이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된다면 그 전에 죽으면 된다. 먹는 문제는 산 자에게나 필요하고 위협이 되는 일이지 죽은 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먹고 사는 일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결혼하기 전부터 '생활'이라는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 125> 

이랬던 주인공이 이제는 아내와 함께 어떻게든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혼자 힘으로 편의점에서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점점 익숙하게 대응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보며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 편의점에서 있었던 조금이라도 특이한 일은 아내와의 주말 저녁식사 시간에 얘기해주기 위해 기억속에 넣어둔다. 주인공은 어쩌면 이제야 생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인류사의 모든 사건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로부터 생겨났다. 먹고사는 일을 어떻게 받아내느냐에 비천과 긍지가 갈린다. 희대의 배신도 숭고한 헌신도 다 먹고 사는 일을 둘러싼 발걸음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 206> 

살아가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힘들다고 죽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어떻게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뿐. 

어차피, 그게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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