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임영태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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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은행업무를 보고, 꽃에 물을 주는 일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매일 내 눈앞에 펼쳐진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 시간들이 내 삶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 단면만 보이기에 뭔가 특별해보이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똑같다. '사람사는게 다 똑같지' 라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일거다. 살아가는 일상에 관한 담담한 이야기, 소설이지만 별다른 큰 사건이 없는 심심한 이야기, 그렇기에 더 진짜같은 이야기가 이 소설에 담겨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의 돌을 굴려 올리며 그 숙명 안에서 자기 존재의 긍지를 찾는다. 세상 누구인들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비굴한 아첨도 허세도 뻔뻔함도, 남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 일마저 아무튼 저마다의 고군분투이다. 그런 눈길로 바라보면 모든 삶이 눈물 겹다. 
<작가의 말중 p.8>

소설 속의 '나'는 인구 오천여 명이 사는 작은 읍에서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있는 GS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의 남성이다.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시급 6,500원을 받으면서 일한다. 편의점에 출근해서 오후에 일하는 남학생과 교대를 하고, 가게 안을 둘러보고, 청소를 하고, 담배와 진열대를 점검하고, 마치 혼자 커다란 우주선에 탑승한 기분으로 한밤에 혼자 환하게 불켜진 편의점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한다. 소설은 편의점에서 주인공이 일하는 모든 과정과 밤새 오가는 손님들의 생김새나 구입해가는 물품의 종류와 가격까지 너무나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런 단조로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자도 실제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걸까? 너무 세부적이라 그 옆에서 같이 밤새도록 편의점 판매대를 지키고 앉아서, 들고 나는 손님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한밤 중에 오는 손님들은 규칙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다르지만, 아침 6시가 지나고 출근시간 대가 되면 매일 매일 나타나는 인물들이 정해져있다. 매일 일반적인 통학시간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편의점에 와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떼우는 학생, 아침마다 신문 2부씩 사가는 아저씨, 조기축구가 끝나고 2+1 컵커피를 사가는 아저씨 등 '나'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들러서 그들이 사가는 제품과 그들의 표정을 보며 타인의 삶의 관찰하고 행운을 빌어준다.

주인공의 아내 역시 동네의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아내는 오후 3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까지 5700원의 시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부부는 어쩌다 쉬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함께 밥 먹을 시간도 거의 없는 셈이다.  주인공은 젊을 적 다니던 회사가 IMF로 망하게 되면서 차라리 잘됐다 싶어 원래 하고 싶었던 '발명'을 하고 했다. 어떻게든 대박 상품을 만들어내면 인생 역전이라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이렇게 편의점에서 밤새도록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다. 

삶의 이면들에 언뜻언뜻 매혹적인 것이 번득거릴 때 나는 내 앞에 비범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먹고 사는 것에나 매여 있는 시시한 삶은 결코 살지 않을 것이다. 더 높고 더 고결한, 눈부신 무엇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평범하기라도 했다면…… 허술하고 조급하고, 때로 시건방지기까지 했다. 늘 추상적으로 더듬거렸을 뿐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성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박한 휴식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구차한 사내일 뿐이었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176>

주인공은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과거 아내와 살아갈 방도를 찾기 위해 살던 집의 전세자금을 빼서 동네 슈퍼라도 시작해 보려고 내놓은 가게들을 여럿 보러다녔었다. 꿈에 부풀어 보러 갔던 가게의 주인들은 하루 매출 15~25만원 정도에 수익율은 매출의 20% 정도된다며 주인공 부부가 간절히 가게를 인수해주기를 바랬지만, 주인공 눈에 비친 그들 삶의 찌들고 지친 모습은 자기들이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부부가 하루종일 모든 시간을 투자해 한달에 60~70만원을 번다면 그 인생은 과연 어떨 것인가. 그렇게 이들은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와서 새로운 꿈을 품고 열심히 각자의 시간, 각자의 편의점에서 각자의 우주선을 꾸려가고 있다.

책 표지에 "살아가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라는 멘트와 함께 가만히 보면 첵 제목에서 중간에 자음 모음 몇개만 까만 금박이 씌어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독'이라고 읽힌다.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고독이다. 그런데 상황이 절망적이든, 비극적이든, 기쁘든 슬프든 사람은 어떻게든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 사람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작가는 그 살아있는 삶 자체를 짧은 소설에 담고, 독자가 같이 따라다니며 각자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혹시 쌀이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된다면 그 전에 죽으면 된다. 먹는 문제는 산 자에게나 필요하고 위협이 되는 일이지 죽은 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먹고 사는 일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결혼하기 전부터 '생활'이라는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 125> 

이랬던 주인공이 이제는 아내와 함께 어떻게든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혼자 힘으로 편의점에서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점점 익숙하게 대응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보며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 편의점에서 있었던 조금이라도 특이한 일은 아내와의 주말 저녁식사 시간에 얘기해주기 위해 기억속에 넣어둔다. 주인공은 어쩌면 이제야 생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인류사의 모든 사건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로부터 생겨났다. 먹고사는 일을 어떻게 받아내느냐에 비천과 긍지가 갈린다. 희대의 배신도 숭고한 헌신도 다 먹고 사는 일을 둘러싼 발걸음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다. 
<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p. 206> 

살아가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힘들다고 죽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어떻게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뿐. 

어차피, 그게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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