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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 황선미 첫 번째 에세이
황선미 지음 / 예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종이만 보이면 끼적인다는 작가의 오래된 습관이 왠지 반가웠다. 나도 한때 종이만 보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끄적이며 혼자 마음 달래던 때가 있었다. 종이에 실컷 끄적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끄적이듯 작가의 마음을 털어놓았던 일기장을 담은 책이다. 정말 혼자 볼 일기장이니까 할 수 있는 말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 작가로서의 고뇌들이 날것의 느낌으로 들어있다. 나의 끄적임이 나중에 다시 못봐줄 유치찬란한 칭얼거림이었다면, 그녀의 끼적임은 읽는 이에게 공감과 울림을 주는 힘을 지닌 글이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 베스트 셀러 작가 황선미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소박함과 진실함이 그대로 담겨있는 이야기다. 어릴 때는 일기를 쓰고 나서 누가 볼까봐 항상 태워서 없앴었다는 저자가 이 일기들을 공개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니 지치거나 슬플 때마다 나는 이렇게 끼적였던 듯 하다. 누구하고도 말하기 어려웠던 내밀한 감정, 온전히 내 몫일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이나 고독, 좌절감, 때로는 패배감의 정체를 몰라 낱알을 헤집듯 사건의 전말을 따져보는 경우에도 닥치는 대로 아무 종이에나 글을 끼적였다. 나 자신에 집중하는 이 행위는 그러니까, 더는 절망하지 않으려는 숨고르기라고 해도 좋겠다.」
< 작가의 말 중 p.5>
저자는 어린시절에 대한 아픔이 있는 듯 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밖으로 많이 떠돌던 아버지, 살기도 팍팍한 환경 탓에 자신에게 끝까지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엄마, 부모의 사랑에 대한 결핍은 저자에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길거리의 노숙자나 세월에 지친 노인을 우연히 마주칠 때면 저자는 어김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실때까지도 자신에게 곁을 내주지 않은 탓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얼마쯤 상처를 가진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는 일곱살이 되기전에 잠깐 느껴봤던 완벽한 풍성함과 안정감을 기억하며 그것이 작품활동의 원천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은 참 오랜 시간동안 인생에 영향을 미치나보다. 저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좀 더 행복하게 자라났다면 더 밝고, 깊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난 어쩌면 작가가 겪었던 빛과 어둠에 대한 기억이 작품에 더 큰 명암을 넣어주어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 부부는 남편이 시골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는 통에 시골에 땅을 사게 되는데, 당진 초입에서 바다도 안보이는 마을 한가운데의 땅을 속아서, 그것도 시세보다 비싸게 구입한다. 이왕 저지른 일 끝까지 하자 싶어 집도 짓고 귀농은 했지만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농부의 답답한 심정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황도 복숭아 나무를 심기로 계획하지만 막상 작은 꼬챙이 같은 묘목을 보고 이게 언제 크려나 싶어 실망하기도 한다. 그런 생활 안에서도 깨닫는게 있다.
「소소하게 농사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삶과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눈을 가진 감자 조각이 어두운 땅속에서 해내는 일보다 놀랍고 창조적인 예술이 얼마나 될까. 칼날에 쪼개진 몸을 스스로 치유하며 자라난 감자 줄기가 뽑힐 때 실핏줄로 연결된 크고 작은 감자들이 주렁주렁 딸려 나오던 광경은 내가 경험한 어떤 예술보다 경이로웠다. 」
<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p. 244>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직접 그린 삽화가 책 곳곳에 등장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꽃과 열매 들이다. 얼마나 세세하게 관찰하면서 그렸는지 그림만 봐도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작가로서의 사생활이다. 글이 안써져서 괴로워하고, 인세가 줄어들어 살림에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작가로서 겪게 되는 영광스러운 일, 혹은 불쾌한 일들이 가감없이 적혀있어 흥미로웠다. 10년차 작가, 그것도 책을 100만부 팔아치운 베스트 셀러 작가지만 결코 영광스러운 삶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보다 잘 나가게 된 덕에 가족의 생계를 도맡게 되어 무거운 책임감에 허덕여야 하고, <마당을 나온 암탉>라는 작품 하나로 작가를 규정하는 탓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허덕이는 중이다. 일기라는 가장 깊숙한 내면을 표현한 글을 보면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한사람의 인간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했을 지라도 아프고, 상처받고, 걱정많은 우리네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쓸수록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나는 결코 내 유년의 그 거리에서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내 작품의 거의 모든 게 그 거리에서 재생산되고 변주되고 확장된다. 바로 그 거리가 나를 키워냈다는 걸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무리 지나온 길을 버린다 해도 나는 그 길의 끝에 있고, 지나온 길이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p. 365>
저자는 과거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하지만, 결국엔 과거의 경험을 자양분으로 현재를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고, 뭔지 모를 미래를 위해 꾸준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오늘'은 또 '내일'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서 지금을 견뎌내면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견뎌낸 하루들이 켜켜이 내 앞에 쌓여있기에 가끔은, 오늘이 참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