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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온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오빠, 핏줄이란 대체 뭘까?"
<아침이 온다>를 읽고 난 다음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남자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가 최근에 입양에 관한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라는 말을 시작으로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말하면서 중간중간 울컥하는 마음을 되삼키며 마지막 장면까지 얘기를 끝마치자 오빠도 다소 울컥한 표정이었다.
"야, 이거 이야기로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네. 한 편의 영화같아. 특히 마지막 장면 진짜 여운이 남는다."
그 후 둘이서 한참을, 핏줄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가족의 의미는 뭘까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은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매력도 충분했지만 곰곰히 곱씹어 생각해 볼만한 요소들도 많아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핏줄로 이어진 친부모와 말다툼 같은 대화를 하면서 가족이란 노력해서 쌓아 올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족은 아무리 핏줄로 이어졌다 한들 오만하게 굴어서는 쌓아올릴 수 없는 관계다. < 아침이 온다 p. 140>
아사토를 입양한지 6년 째, 커갈수록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을 키우는 행복에 푹 빠져있는 엄마 사토코에게 어느 날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아이를 돌려주세요. 그러기 싫다면 돈을 준비하세요."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왔던 사랑스러운 아들인데 이제와서 돌려달라니 이 얼마나 날벼락 같은 말인가. 아사토를 부부에게 맡긴 어린 엄마는 이럴 사람이 아닌데 도데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사토코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다.
사토코 부부는 6년 전 남편의 무정자증으로 인해 자연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본래 아이를 갖는 것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알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열망으로 열심히 불임 클리닉에 다니며 갖가지 시도를 해보기 시작한다. 욕심과 달리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막대한 비용과 고통에 부부는 서서히 지쳐간다. 그렇게 부부는 결국 임신을 포기하고 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부부는 뉴스에서 아이 양육이 불가능한 부모와 불임 부부를 연결해 입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단체 '베이비 배턴'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핏줄을 중요시 하는 일본의 분위기 속에서 입양은 큰 결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부부는 베이베 배턴의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실제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참석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얘기해주는 그 표정을 보고 입양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 부분에서 코끝이 찡했다.
입양신청을 한지 한달 후, 부부는 드디어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아기의 엄마는 놀랍게도 앳되 보이는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작은 몸으로 사토코의 손을 꼭 잡고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라는 말만 되뇌이던 작은 소녀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출산하게 된 것일까. 아사토를 돌려달라며 전화를 걸었던 여자는 정말 이 소녀가 맞는걸까.
소설 <아침이 온다>는 15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아이를 출산하게 된 엄마 가타쿠라 히카리의 인생과 입양한 아이를 사랑으로 길러온 사토코 부부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어린 나이에 임신했다고 하면 보통 가정환경이 불우했거나 불량한 아이는 아니었을까 상상하기 쉽지만 히카리는 예상외로 교사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막내딸이었다. 교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몰라도 딸들의 자연스러운 이성에 대한 관심에 너무나 폐쇄적이었던 부모님에 대한 반작용으로 히카리는 오히려 자유롭고 자극적인 연애를 꿈꾸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러던 차에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히카리는 그에게 자신의 순결을 바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히카리의 인생은 조금씩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길로 빠져들게 되는데...
편견이란 무섭다. 입양한 아이는 내 뱃속으로 낳은 아이보다 애정이 덜 갈 것 같고, 어린 나이에 출산한 여자아이는 왠지 발라당 까진 아이일 것 같고, 바른 부모 밑에서는 무조건 바른 아이가 자라날 것 같지만, 틀렸다. 우리는 잘 모르는 세계를 바라볼 때 잘 모른다는 이유로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
핏줄이란 무엇일까. 같은 핏줄로 이루어진 가족이면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하고, 조심성 없는 말과 행동으로 서로 평생토록 안고갈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의 노력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핏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출산을 마치고 돌아온 히카리가 명절에 온 사촌들이 다 모인 외할머니집에서 외삼촌이 자신의 임신과 출산 사실을 들먹이며 같잖은 위로를 건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출산에 대해 상의도 없이 모든 친척에게 알린 엄마를 증오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심해하거나 비웃고 있을 그 들의 마음을 히카리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한편 아사토의 엄마는 아들이 유치원에서 친구를 정글짐에서 밀었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아들인 아사토가 자신이 한것이 아니라고 하자 주변의 비난과 질타를 무릅쓰고서도 아들을 믿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속으로는 '정말 아들이 한 짓이면 어쩌지' 하고 고민하기도 하지만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상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직접 배가 아파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자식에게 상처주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로 인한 책임과 대가도 오롯이 지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두 부모의 모습들이 대비되면서 히카리의 삶이 너무 가슴아팠다. 딸이 겪었을 아픔을 이해하기 보다 남들에게 숨기기 바빴던 엄마의 모습, 그럼에도 친척들에게는 핏줄이라는 이유로 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비밀을 공유하는 모습, 방황하는 히카리를 허락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포기하고 방관하는 모습, 이것은 같은 핏줄을 나눈 가족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히카리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났다.
좋은 소설은 낯선 배경과 환경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잘 이끌어 낸 이야기라고 들은 적이 있다. 불임이나 혼전출산, 둘 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상황이지만 아침이 온다 를 읽으면서는 마치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된 듯 함께 아파하고 공감했다. 아플 정도로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내 머릿속 마지막 이미지는 그래도 아름답고 동화적인 장면이었다. 책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에서 히카리라는 이름은 빛이라는 뜻이고, 아사토는 아침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참 절묘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부디 햇빛 찬란한 아침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