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 여성들의 오피스 서바이벌 매뉴얼
제시카 베넷 지음, 노지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농구화 가격과 의자가격을 비교하며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왜 좋은 의자에 돈 투자를 망설이냐는 메시지로 광고를 진행했던 S브랜드의 의자를 구매했다가 반품한 적이 있다. 왜 그 광고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무조건 남성이라는 전제를 두고 광고를 만들었을까.(실제로 광고에서도 남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광고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세심한 조절이 가능한 편안한 의자라는 말에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매했었다. 의자를 배송받고 앉아보는 순간, 이 의자는 '남성의 체형에만 맞춰서 만들어진 의자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평균에 가까운 체형의 여성인 내가 앉았는데 그렇게 다양한 조절기능에도 불구하고 내 체형에는 처음부터 안맞는 크기로 제작된 것이었다. 도저히 허리가 아파 오래 앉을수가 없었다. 결국엔 몇 일만에 반품을 하고 말았다. 정말로 사무실에서 일하는게 실제로 남성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든건가 싶어 생각할수록 화가났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이렇게 활발한 시대에 아직도 이런 광고가 성공하고, 또 아무도 이상한 걸 못 느낀다는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이 필요한 것인가. 동등하게 입사한 회사 내에서도 여성을 마치 남성들의 보조 정도로 생각하는 문화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왜 회사 내에서 여성들은 은연 중에 남성의 보조역할을 강요받거나,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게되는 것일까. 왜 여성이 하는 말은 남성의 같은 어조에 비해 감정적으로 들리며, 같은 성과를 내도 더 작아보일까. 책을 읽으며 예전의 회사생활을 떠올려봤다. 지금 생각해도 분하거나 어이없는 일도 있고, 통쾌하게 한방먹인 일도 생각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성과 여성은 같은 일을 하고서도 그 일을 포장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듯 하다. 여성은 분명 자신이 잘해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해도 과도한 겸손으로 기어이 그것이 별것 아닌 일처럼 만들어버린다. 반면에 남성은 자신이 한 일을 최대한 남들 앞에 잘 포장해서 내놓는 일을 더 능숙하게 해내는 것 같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지만, 내가 회사 내에서 겪은 남성들의 일부는 이런 면이 매우 심했다. 

몇 년 전 마케팅 회사의 기획자로 일할 시절, 같은 부서 남자 직원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던 적이 있다. 회사 내 직급 없이 서로 "ㅇㅇ님" 이라는 호칭으로 모든 직원이 평등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일의 특성상 기획자가 모든 일을 기획하여 실행팀에게 일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아 미묘한 상하관계 같은 느낌이 없진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행팀 직원들은 모두 여성, 기획팀은 나를 제외하곤 모두 남성이었다. 그들은 여성인 내가 자기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자기들 밑에 두려고 안달인 경우가 많았다. 혹은 일부러 다른 직원들 앞에서 "그때 ㅇㅇ님이 잘못해서 혼냈던거 미안해요.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난 그에게 잘못해서 혼난적도 없었으며, 혼날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망칠뻔한 미팅에 동석하여 1시간 넘게 클라이언트 설득을 도와줬더니 돌아오는 길에 고맙다고 까지 해놓고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자신이 나보다 위에 있다고 다른 직원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었으리라. 

한번은, 다른 기획자 A가 너무 바쁘다고 하길래 그렇다면 내가 세부적인 부분을 돕겠다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이 기회다 싶었는지 분명히 자신이 해야되는 부분까지 넘기면서 마치 내가 자신의 비서라도 되는양 굴었다. 나는 정색하며 "그 부분은 저에게 맡길 부분이 아니라 직접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부분까지 돕겠다고 한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했더니, 그때부터 이상하게 비꼬며 나에게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빡빡하게 구는군요." 라며 각종 인신공격을 했다. 다행히 그 대화는 메신저로 이어지고 있었고, 난 끝까지 고분고분 듣고 있다가 팀 회의시간에 그 안건을 꺼내들었다. 
"제가 A 님을 도우려고 했던 건 그의 비서가 되고싶어서가 아니었어요. A님이 저에게 자신의 일을 다 맡기면서 뭐라고 했는지 다 같이 메신저 대화내용을 보면서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라고 했더니 그 사람 갑자기 당황하더니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모두가 있는 앞에서 자신의 이상한 성격이 드러나는 건 싫었나보다. 그렇게 통쾌한 복수를 했지만, 이 일은 다른 남자직원에게는 내가 당돌하고 감정적인 여자로  기억되는 계기가 되었나보다. 난 그 회의시간에 한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도, 흥분한 적도 없었지만, 그 직원은 마치 내가 그 상황에서 소리지르고 흥분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 놀란 기억이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이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에 잘 나와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대부분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일부는 여성이 스스로 자초하는 것도 있는 듯하다.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여성은 칭찬을 받으면 뿌듯하게 드러내는 대신, 어쩔 줄 몰라하며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겸손의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회사 내에서는 어느새 그게 사실이 되어버린다. "그렇군, 그녀는 그냥 보조만 했던거군." 하고 말이다. 



누군가 칭찬을 하면 모든 사족을 다 빼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 자신이 잘한 것을 과장되게 자랑할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숨길 필요도 없다. 그리고 책을 보며 너무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서 놀랐는데 바로 가면증후군 증상 이란 거였다. 여성들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언젠가 벗겨질 가면이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훌륭하고 유명한 여성들조차 '자신이 지금껏 이룬 업적들이 사실은 사람들이 속은것이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까 무섭다고 느끼는' 가면증후군 증상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도 내가 어떤 부분을 잘해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사실은 내 실력이 아닌 것 같고, 언젠가 벗겨질 가면같이 느껴져서 불안할 때가 있다. 거기다 스스로 생각할 때 완벽하지 않으면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부분도 많다. 그래서 여성의 경우, 자신이 잘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겸손 때문에, 혹은 스스로의 불안 때문에 다른사람에게 묻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내가 느끼는 불안이 사실은 여성 모두의 불안이었다니, 안타깝기도 하면서도 이제는 좀 더 자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더이상은 바보같이 굴지말자! 라고 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여성들이 받는 억울한 차별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여성들이 자주하는 실수나 고쳐야 할 말투, 직장 내 차별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좋을지 요목조목 지적해주고, 고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남성과 싸워 이기자는 내용의 책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의 사회생활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잘하는 부분은 따라해보고, 직접 적용해봄 으로써 여성들이 살아갈 방향을 찾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남성들의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가입을 촉구하기도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좀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제대로 일할 수 있으면 남성들도 유일한 가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유로워져서 길게 보면 서로서로 윈윈 이라고 말이다. 

세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만의 뛰어난 부분이 있듯, 여성만이 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서로가 현명한 처신을 해서 각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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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09-17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보조자라는 인식이 제일 힘들어요...

다림냥 2017-09-17 13:07   좋아요 0 | URL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죠ㅠ 여성은 뒤치닥거리 하러 회사에 들어간게 아닌데 말이에요~
 
생각이 행동으로 변하는 8가지 방법 - 온은주의 비주얼씽킹 : 입문편
온은주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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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사람 완전 부럽다! 김중혁 작가는 정말 부럽게도 글도 잘쓰면서 그림도 잘 그리더라. 질투가 난다!! 나의 다이어리는 투박하게 글씨로만 빼곡히 들어차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귀여운 그림으로 다이어리 꾸미기도 하고 싶고, 남자친구와의 재밌었던 일상을 일상툰 으로도 만들어보고도 싶고, 그림 에세이 도 써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무지무지 많다. 그런데 문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무지 어렵고, 무섭다는 것! 그러면서도 도구는 기가 막히게 많이 갖추고 있는 나는 각종 펜, 색연필, 싸인펜, 만년필 펜촉 등등 무수히 많은 도구를 갖추고 있음에도 막상 그림을 그리려고만 하면 겁부터 집어먹게 되는 전형적인 그림 공포녀다. 보고 따라 그리라고 하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는데 처음부터 생각해서 그리라고 하면 도무지 뭐부터 해야할지, 초등학교 2~3학년 수준의 그림밖에 안나오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이런 나의 답답함을 해결해줄 만한 비주얼 씽킹 도서를 발견했다. 생각이 행동으로 변하는 8가지 방법 은 그림을 잘그리는 법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도서이다. 





어려운 그림을 그리려 하지 말고, 아이들처럼 졸라맨부터 시작하라!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동그라미를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빈종이를 채워가라는 말은 예쁜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조금은 줄여주었다. 책을 보며 어설픈 졸라맨들을 따라그려본다. 너무나 유명한 화가인 피카소는 일부러 어린아이처럼 그리기를 연습하기 위해 한줄로 그릴 수 있는 단순한 그림을 끝없이 연습했다고 한다. 가장 단순하지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그것 또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화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일단은 원근감이나 세부 묘사는 패스하고 생각나는대로 부담없이 그려보자.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이모티콘인 라인 이나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따라그려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사람의 기분을 잘 나타내는 특징적인 표정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그림들을 모사해보면서 점점 나만의 그림을 연습해본다. 어떤 한 단어를 떠올리며 그 단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를 다각도로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위의 그림은 뒷모습이라는 주제로 저자가 다양한 상황의 뒷모습을 다양한 배경과 함께 그려본 것이다. 엄청나게 잘 그린 그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개성이 있고, 그림 에세이 나 그림 일기를 쓰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그림은 무엇보다 매일매일 그리는 것이 훈련에 가장 좋다고 한다. 하루의 1% 시간만 투자해서 30일 동안만 매일 시간을 투자하면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습관이 밴다고 하는데, 하루의 1%가 15분이란다. 자기 직전이나, 출근한 직후 등 뭔가를 시작하고 끝낼 때 약간의 짬을 내서 매일 매일 무언가를 그리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너무 큰 주제를 정하면 꾸준히 하지 못하고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 조금의 시간을 들여도 할 수 있을만큼 작은 주제로 쪼개서 하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나는 매일 책을 끼고 사니 내가 읽은 책 표지를 보고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도 마침 책표지를 그린 그림이 있어서 반가웠다. 상상의 산물이 아닌 보고 그릴 물체가 있으니 훨씬 도전하기 좋을 것 같아서 나도 하루 15분 프로젝트를 한번 해봐야겠다.  




감정을 그리면 감정이 힐링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감정의 세탁소 같은 느낌인데, 자기가 느끼는 감정들을 표정으로 매일 다이어리에 기록하다보면 자신의 감정변화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고, 힘든 감정을 그림으로 마주함으로써 힐링되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나도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감정을 낙서하듯 그려봤다. 책도 읽고 싶은데 난데없이 노래도 부르고 싶다ㅋㅋ 졸라맨버전으로 그린 건데도 스스로 생각해서 그리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다. 




그림 일기 를 쓸때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서 표정과 글로 그 날의 상태를 표현하면 좀 더 생생하게 나의 상태를 남겨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어떤지 심리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주얼 씽킹 은 의외로 옷장정리에도 활용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들을 하나하나 그려서 확인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자주 입는 옷과 안입는 옷은 무엇인지 금방 시각적으로 파악되어 정리하는 것도 빨라진다고 한다. 나도 옷장에 옷이 수없이 많은데 막상 입으려면 입을 옷이 없어서 항상 고민인데, 한번 다 꺼내서 그림으로 그려서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예전에 기획자로 일할 시절, 간단한 사안을 전하기 위해서도 무조건 PPT등을 이용해 자료를 만들어야 했던 일들이 번거로웠던 적이 있다. 차라리 간단한 것은 바로 그림으로 그려서 전달하는 것이 훨씬 직관적이고 빠른 방법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다. 그만큼 펜을 들고 바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던 걸까. 손으로 대충 그리는 것은 낙서같은 느낌이라 전문성이 안느껴진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걸까. 저자가 손으로 그린 기획안을 바탕으로 실제로 결과물이 만들어진 것을 보니 생각을 바로 펜으로 간편하게 그린 기획안도 꽤 괜찮을 것 같다.



그림을 잘 그려서 화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그림만 그리려고 하면 단순한 낙서 앞에서조차 머뭇머뭇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스스로 잘 못 그린다는 생각에 실패한 그림을 그릴까봐 망설이게 되는건 아닐까. 그냥 아무생각없이 오늘 읽었던 소설에 나왔던 물귀신을 그려봤다. 생각보다 넘 귀엽게 그려졌다. 왠지 소설 속 무서웠던 이미지가 그림으로 미화된 느낌이다ㅋㅋ 

사람은 꿈을 꿀때도 장면으로 꾸고, 모든 상상도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비주얼 씽킹 훈련을 하면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실체로 좀 더 머릿속에 잘 각인할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의 평소 생각이나 감정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걸 시각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활용하고, 시각적인 정리를 통해 효율적인 공부에도 도움받을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실체적으로 와닿아야 행동으로도 움직여진다. 그런 다양한 방법에 대해 생각이 행동으로 변하는 8가지 방법 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당장 해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들도록 만들어준다. 
더군다가 펜이랑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는데 무얼 망설이는가. 자신이 그린 그림에는 무조건 이름을 써서 진짜 예술가처럼 다 모아서 남겨두라고 저자가 그랬다.  아무리 못 그린 그림이라도 내 생각이 담기고 개성이 담기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잘나가는 웹툰을 보면 의외로 그렇게 잘 그리지 못한 그림도 많다. 대상의 특징을 잘 잡아서 나타내기만 하면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낙서를 조금 더 예술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겁내지 말고 자꾸 펜을 들고 무엇이든 그려봐야겠다. 나는 무엇이든 글로 정리하는 좌뇌형 인간이라 그림보다 글이 훨씬 편한 듯 하지만,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우뇌부분이 발달하면 생각도 훨씬 풍부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또 그림 그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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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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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아리송해진다. 김사과 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뭘까. 책 제목처럼 끝없이 더 나쁜 쪽으로 걸어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자신을 끝없는 밑바닥까지 추락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이야기들, 아니, 심지어 이야기 형식이 아닌 혼자만의 독백과 낙서같기도 한, 한글과 영어가 막무가내로 섞여있는 글들. 읽으면서 느꼈다. 이 작가, 끝없이 삐뚤어지겠다는 마음 가짐을 형식 파괴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ㅋㅋ 인터넷에 김사과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김사과(방실) 이렇게 나온다. 김사과가 본명일까, 방실이 본명일까. 둘다 이런 화끈하고 삐뚤어진 서사에 어울리지 않는 매끄럽고 순한 이름 아닌가. 심지어 내가 받은 김사과 작가의 사인본엔 엄청나게 귀여운 작가의 사인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쓰는 이야기엔 세상의 끝을 발견한 듯한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있다. 소설속에는 자신을 놓아버린 듯한, 미래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읽기만 해도 그 수렁으로 함께 빠져버릴 것만 같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또 역겨워하는 남자. 그보다 역겨운 인간을 만난 적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매일 조금씩 더 역겨워지는 것 같다. 나는 전혀 과장하고 있지 않다. 그는 역겨운 인간이고 나는 그런 그를 사랑한다. 왜 나는 오직 역겨워하거나 오직 사랑하지 못하나. 왜 나는 단순하게 아름다운 감정을 가질 수가 없나.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믿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믿기에 나는 지나치게 병적이고 자주 혼란에 빠지며 너무나도 얄팍하고 가벼운데다가... 무엇보다 나 자신을 깊이 불신한다. 아마도 그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인간을 사랑하게 된 이유다. 아니 그뿐인가?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를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건 정말 추잡한 느낌이다. 늦은 밤 잠에 취한 거리가 딱 그 꼴이라 생각하는 순간 거리의 추한 어둠이 나를 돌아보며 웃는다. 
< p.20 [ 더 나쁜 쪽으로 ] 중에서 >


소설의 '나' 는 '나' 를 흔한 여자애들 중에 한명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에게서 진짜를 발견하고 싶었고, 그와 자는 방법이 그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짜를 봤고, 여러번 지겹도록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발견한 그의 진짜는 불면과 외로움 이었고, 그것은 비밀조차 아니며, 결과적으로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결국엔 서로에게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하며, '나'는 끝없이 거리를 헤매며 걷는다. 더 나쁜 쪽을 향해 걷는다. 외국의 낯선 거리에서 느끼는 황폐하고 외로운 기분, 누구에게서든 진짜를 발견하고 싶지만 결국엔 누구에게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나'는 황폐하다. 



"삶은 호텔 같았고 매일매일은 호텔의 욕실에 놓인 일회용 샴푸 같았다. 그것을 도대체 다 써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새것이 놓여 있었다. 거기엔 오직 시작만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망쳤다. 시작하고 또 시작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눈치챌 수 없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시작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미쳐버리지도 못했다. " 
<p.47 [ 샌프란시스코 ]중에서 >


뭔가 시작하고 또 시작해도 결국 아무데도 가 닿지 못하고, 심지어 자유롭지도 못한 상태로 거기에 있는 것. 미래라는 것은 나에게만은 허용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모든 시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나는 그 시간조차 순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p.52) 

김사과의 소설은 이처럼 뭔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퇴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디서도 진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속에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미래도 없다. 그래서 머리가 뒤죽박죽인,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대로 써나간 소설이다.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답답하고 그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주인공들의 답답한 혼자만의 메아리는 느껴진다. 

1부의 소설들은 특별한 줄거리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진 이야기라면, 다행히 2부의 소설들은 줄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소설들의 주인공도 뭔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다. 

<박승준씨의 경우>의 박승준씨는 서울의 한 사립대에 재학중인데 살인적인 학비때문에 고시원에 살면서 옷살 돈이 없어 근처 아파트의 재활용품 수거함에서 괜찮은 옷을 뒤져서 입으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재활용 수거함에서 dior 정장을 줍는다. 금요일밤 혼자 고시원에 쳐박혀 있는 자신의 찌질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dior 정장에 예전에 주운 흰 티셔츠를 받쳐입고, 6년전에 고모가 생일선물로 사준 낡은 리복 운동화를 신고 신사동을 어슬렁 거리다, 얼떨결에 돈있는 사람들끼리의 벌이는 파티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한 패션 사진작가는 최고급 dior 정장에 주운 흰 티셔츠에 리복 클래식 이라니 "역시 이친구 힙스터야" 하며 추켜세우고, 다들 모여들어 그의 특이함을 칭송한다. 힙스터가 뭘까 하며 사전을 찾아봤더니,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뜻한다고 나와있다.  물론 박승준씨는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를 능력이 없을 뿐 자신의 고유한 패션과 문화따위 없다. 자신의 없어보임을 들키고 싶지 않은 박승준씨의 필사적이고 당황스러운 마음, 소설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다. 소설의 결말마저도 가히 김사과 답다. 

<카레가 있는 책상> 은 역시 고시원에 사는 듯한 주인공의 비틀린 시선을 보여준다, 동네의 버블티 가게에서 알바를 하던 여학생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해 마음대로 상상하며, 1년뒤 남자친구와 같이 데이트를 하던 그녀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남성으로써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사하겠다며 미친듯이 쫓아가놓고선 난 단지 좋은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왜 도망가냐며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미쳐버린 자의 시선, 방 밖에서 사람이 맞아죽어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잠을 청하는 자들의 무정한 마음이 드러나있다. 이들이 미친 것인가, 세상이 미친것인가. 

이처럼 김사과의 더 나쁜 쪽으로 소설집에는 미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세상끝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같이 한숨 쉬게 되는 이야기 말이다. 김사과는 왜 이런 소설들을 쓰는 걸까. 한번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사과여, 얼마나 더 발칙해지려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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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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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선한 이웃들과 가족간의 따스한 느낌, 시원한 바닷바람이 넘실거리는 조용한 시골동네의 정 넘치는 모습들 때문에 오랜만에 콧잔등이 시큰시큰했다. 난 대놓고 슬픈 이야기보다 이런 따뜻한 이야기에 더 약한가보다. 책 표지에서 전해지는 맑고 따스한 느낌의 에너지가 이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 책을 읽고 나면 몸 전체가 한꺼풀 벗겨진듯 나마저도 좀 더 착하고 순해진 느낌이 든다. 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 의 공식 테마곡 코니 프란시스의 흥겨운 'vacation'도 찾아서 여러번 들었더니 책에서 타마짱이 테마곡을 틀고 심부름 서비스를 시작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노래를 같이 흥얼거렸다. 
♬ V-A-C-A-T-I-O-N! In the summer sun!~ 

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는 실제로 일본의 '마오짱'이라는 심부름 서비스를 만든 실제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 이라고 한다. 쇼핑약자가 사회문제로 떠오를 만큼 쇼핑사막이 많이 존재하는 일본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와 그와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작가는 마오짱과 동승하여 취재를 다녔는데 노인들이 마오짱을 실제 손녀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야겠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매일 바다를 보며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걸까. 이 소설에는 진정 인생에 감사하고, 주어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멋진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몇년 전 사고로 딸을 잃었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딸이 남기고 간 행복만큼 더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타마짱의 멋진 외할머니 '시즈코', 언제나 호탕하고 긍정적인 웃음으로 주변사람까지 밝게 만드는 타마짱의 아버지 '쇼타로', 어설프지만 넘치는 사랑으로 타마짱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어하는 필리핀인 새엄마 "샤린", 이들은 타마짱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는 든든한 가족이다. 


1분, 1초,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귀중한 생명을 소모하며 꾸준히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지 않는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 없어졌다. 그 조바심이 내 안에 쌓여 점점 무거워질수록 '불안'으로, 혹은 '공포'와 비슷한 감각으로 발전하여 마음을 짓눌렀다. 내가 '심부름 서비스'를 생각한 것은 대학 생활을 겉으로만 즐기며 생명을 허비하고 있는건 아닌지 불안했던 때였고, 그래서 내 결단은 빨랐다. <p.130>



엄마가 돌아가시 전 타마짱에게 한말이 있었다. '생명은 곧 시간이란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생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라고 생각하니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타마짱은 심부름 서비스를 창업하기로 결심한다. 시골에는 곳곳에 가게가 있지않아 교통이 불편한 곳에 사시는 노인들은 쇼핑하는 것 자체가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사랑하는 시즈코 외할머니가 쇼핑약자 였단 사실을 깨달은 타마짱은 할머니와 마을의 모든 노인들을 위해 의미있는 시간을 쓰기로 한 것이다.   


손님 중엔 쇼핑이나 수다라는 목적 없이도 밭에서 갓 수확한 채소를 들고 일부러 나오는 분도 계셨다. 사실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때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먹고나서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정말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한다. 그렇게만 해도 할머니들은 얼굴에 주름을 잔뜩 잡고 웃어준다. 
심부름 서비스를 시작한 후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순수한 행복감을 느낀다는 당연한 깨달음.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되어 '감사의 캐치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p.268>


타마짱은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주문받아 판매하는 것 외에도 거동이 불편한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는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가져다 드리기도 한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살뜰한 손녀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타마짱은 어느날 무서운 진실을 맞딱드리게 된다. 엄마가 타마짱이 놓고간 준비물을 가져다주려고 집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죄책감과 충격에 휩싸인 타마짱의 마음을 토닥여주는 아빠의 말은 아프고 아름답다. 


"엄마가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살면서 누려야 했을 즐거움이나 행복까지 모조리 짊어지고 살아. 다시 말하면, 엄마 몫까지 굵고 길게 인생을 즐기라는 거야. 짊어지라는 아빠의 말은 그런 뜻이란다. " <p.307>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가 유유히 흐르고, 순박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는 고향마을. 그 눈부신 풍경 속에는 사람의 인생이란 으레 그런 것처럼 슬픔과 기쁨이 비슷한 비율로 자리잡고 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마음 속 한구석에 묻은 채 밝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타마짱의 가족들, 엄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셔서 태어나서 한번도 엄마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는 타마짱의 소꿉친구 소스케,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고 싶어 용기를 내어 도시로 나가 취업했지만 거기서 회사 내 성폭행을 당하고 더 큰 정신충격을 받아 방안에만 틀어박히게 된 타마짱의 친구 마키, 마피아로 활동하며 젊은 시절을 탕진했지만 자신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해주는 쇼타로 덕분에 다시 용기를 가지고 새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무뚝뚝한 아저씨 후루타치, 이들은 모두 인생의 어두운 면을 겪으면서도 또 한편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열심히 살아가려 용기를 내는 인물들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인 인생이라야 그림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림이 빛과 그늘로 그려지듯 행복과 불행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고 깊이 있게 채색하기 위한 소중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자신이 그려온 '인생이라는 이름의 그림'을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기 인생을 객관적인 눈으로 감상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내 인생에 가장 절망적인 그늘을 드리운 사건은 남편과 딸의 죽음이었다. 그 그늘이 너무나 짙었기에 손녀의 생명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빛이 강하면 그늘은 짙어지고 그늘이 짙으면 빛이 더 눈부신 법이니까. <p.358>



나도 시즈코 할머니 처럼 늙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 모든 것을 왜곡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어두운 그늘 덕분에 빛이 더 눈부심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떠난다. 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는 인물별로 각자 화자가 되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설이 진행된다. 그들 모두의 웃는 얼굴 뒤에는 인생의 굴곡이 있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 소설은 사람들의 인생처럼 추운 겨울, 만물이 소생하는 봄, 뜨거운 생명력이 솟구치는 여름,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등 다양한 계절과 날씨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행복했던 이유는 이야기가 무작정 행복하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경을 바탕으로 사람들 속에 속속들이 자리잡은 아픔과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또한 이겨내며 다시 살아갈 힘을 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숨어있었기에 울면서도 웃고 싶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지만, 그런 묘한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 읽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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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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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문득 얼마전 가부장을 뒤집은 가모장 발언 으로 모든 여성들에게 통쾌함을 심어준 숙 크러쉬 김숙 언니가 생각났다. "어디 남자가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있어!" , "남자가 집에서 살림만 잘하면 되지." , "그 깟 돈이야 내가 벌면 돼." ,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 망신한다는 얘기가 있어." 같은 주옥같은 그녀의 어록을 듣고 있으면 통쾌함이 절로 밀려옴과 동시에, 단지 예전부터 여자들이 수도 없이 듣던 소리를 성별만 반대로 바꿨을 뿐인데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큰 충격을 줬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왜 그동안 거꾸로 생각해 볼 생각은 못했을까. 그리고 상황을 거꾸로 뒤집어 봄으로써 여자들에게 쏟아지던 이 말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이었는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요즘엔 시대가 바껴서 여자가 능력이 있어 돈을 잘 벌면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만 하겠다는 남자들도 늘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어디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편이 목소리를 높여?" 라는 말을 들으면 과연 가만히 있을 남자가 있을까? 사실 여자한테 저런 말해도 가만히 있을 여자는 없겠지.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그렇다. 세상이 점점 바껴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 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책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만 해도 최근들어 페미니즘 도서를 여러 권 연달아 읽으며 점점 좁았던 생각을 레벨업 해 나가는 중이다. 페미니스트 의 리더격이라 할 수 있는 리베카 솔닛 의 첫 페미니즘 책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가 출간 된 이후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 가 출간되기 까지 우리사회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메갈리아 , 문단계 성폭력 등등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우리도 비로소 여성차별,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이 책은 리베카 솔닛 이 각종 매체에 투고했던 다양한 주제의 페미니즘 관련 칼럼 들을 모아서 묶은 책이다. 각각의 칼럼이 다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도 있었고, 때로는 '진짜 이정도일까? 이건 너무 과한데' 라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염두해 두어야 할 것들, 최소한 차별 받을 때는 '이것이 차별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기분으로 열심히 읽었다. 말하고 싶은 건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성이 받는 대우 만큼만 동등하게 받고 싶다는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십년 전, 내가 쓴 정치 관련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되어있던 자리에서, 나를 인터뷰하던 영국 남자는 내 정신의 산물을 논하는 대신 내 육체의 산물을, 혹은 그 결핍을 논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무대에서 내게 아이를 갖지 않은 이유를 캐물었다. 내가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은 내가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고 그러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내가 실제로 낳은 책들을 논하는 대신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를 논해야만 한다는 것인 듯 했다. 
내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내 책을 낸 출판사의 홍보담당자는 열받아서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 저 사람은 남자한테는 절대로 그런 걸 안 물을걸요." 홍보 담당자가 내뱉었다. 
옳은 말이었다. ( 나는 요즘 저 말을 질문으로 바꾸어 질문자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사용하곤 한다. "남자한테도 그런 걸 물으시나요?")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p. 15 ~ 16 >

책의 첫 부분에서 이 부분을 보고 '진짜 그러네!' 했다. 직업적인 일로 남성을 인터뷰 할 때 공개적으로 "왜 자녀를 안가지시나요?" 이런 류의 질문을 하는 장면은 본 기억이 없다. 작가의 직업적 성취에 대해서 공개적인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아이 낳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는 저의는 대체 뭘까? '여성의 소명은 아이를 낳는 일이야, 그걸 기억해!'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다행히 리베카 솔닛 이 저 질문을 받았던 시점이 10년 전이었다고 하니, 지금은 많이 바꼈을 거라 믿고싶다. 

책을 쭈욱 읽으며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일화가 하나 생각 났다. 초등학생 시절에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살던 집이 생각보다 빨리 팔리는 바람에 1년의 붕뜬 시간을 신도시 주변의 낡은 주택가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살면서 가장 크고 많은 바퀴벌레와 쥐를 목격했다. 그리고 어찌보면 별거 아니지만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꽤 충격적이고 찝찝한 기억도 함께.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밤,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 누군가의 낯선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왠 낯선 아저씨가 방에 들어와 나를 건드리려다가 후다닥 뒤로 물러나더니 나와보라며 손짓을 했다. 처음보는 아저씨였고, 잠결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옆방을 향해 "엄마~~" 하고 불렀더니 놀라며 "에잇~" 하면서 나가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 다행이었던게 그 아저씨는 전형적인 범죄자는 아니었던 듯 하고, 그 때 엄마는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고 없었다고 한다. 큰일 날뻔 했지만 별일 없어 다행이라 여기며 자고 일어난 아침, 옆집에 살던 어떤 여자아이가 어젯밤 찾아왔던 그 아저씨는 우리 옆집에 살던 주인집 아저씨이며, 난 그 아저씨한테 당했기 때문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야 한다는 듯이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난 당한게 없으며 잘못은 그 아저씨가 했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야 될까. 하지만 난 정말로 이유모를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고, 그 날부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잤으며, 그 아저씨와 비슷하게 생긴 어른들을 지금까지도 경멸하게 됐다. 이 글을 쓰면서도 뭔가 작은 수치심이 생긴다. 

보통 성폭행을 당하면 수치심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거나, 혹은 신고를 하더라도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이 너무 수치스럽고 힘들어 2차 피해를 당하는 느낌이 들만큼 힘들어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힘든 과정을 진행하고 나서도 피의자에게 유죄가 선고되는 일은 극히 적다고 한다. 피해를 당했다는 것 자체가 여성에게 수치라고 생각되는 사회 분위기와, 그런 일을 당하는데는 여자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사회의 시선 때문인데 이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여자가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마셨든, 어디를 갔든, 그런 게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 강간은 고의적 행위고, 행위자는 강간범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특히 대학 캠퍼스의 젊은 여자들이 스스로 강간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되는데, 이처럼 강간을 신비화하는 이야기 속에는 캠퍼스의 젊은 남자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 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여자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여자 자신의 잘못이다.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p. 267>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여자가 원인을 제공했다느니, 그러게 왜 밤늦게 돌아다녔냐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조심할수록 더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면 남자는 이성적인 판단력이 없단 말인가,  스스로 본능에만 이끌리는 짐승이라고 증명하는 것이란 말인가.  

인류에게 왜, 언제부터 남녀차별 이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에 대해 남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혹시 수렵과 채집 시절에 남자가 주로 밖에 돌아다니며 짐승을 잡아오고, 여성은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DNA가 남아있어서 여성의 사회참여 같은 부분에 아직도 편견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책을 읽다가 리베카 솔닛 이 그 부분에 대해 정면 반박하는 내용이 있어 흥미롭게 읽었는데, 수렵과 채집에 있어 남성은 짐승을 잡아오고, 여성은 남성에게만 의존하며 집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얘기는 거짓이라는 주장이었다. 남성과 여성은 분명 자신의 역할에 따라 상호 의존적으로 살아왔고, 현재까지 원시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족들을 살펴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자를 의존적이라고 부를 순 있겠지만, 그것은 남자에게도 기꺼이 똑같은 표현을 쓸 때만이다. 의존성은 썩 유용한 척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호의존성이 더 나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쓸모없고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주고 여자는 받는다는 생각,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논다는 생각이 담긴 사냥꾼 남자 이야기는 현재의 정치적 위치를 정당화 하는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p. 202>

페미니즘 을 주장하며 남녀 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함께 성장하고 싶다. 어차피 남녀는 함께 살 수 밖에 없고, 가족을 이루거나 함께 자손을 낳고 기른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가정'이 남녀의 결합을 기반으로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은 페미니스트가 드세고 괜한 것에 깐깐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듯 하다. 그러면서 김치녀, 맘충 등 여성혐오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도 한다. 자신의 아내, 자신의 딸은 모든 여성혐오 대상에서 예외 인 것처럼... 

남녀 차별, 인종차별, 소수인 차별, 장애인 차별 이런 모든 인권 문제들이 조금씩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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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09-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간의 탓은 피해자에게 있지않고 피의자에게 있다는 논리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어떤 옷을 입었건 무엇을 마셨건 어디를 갔건 그런 것으로 강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군요 강간의 탓이 여자에게 있는것은 아니지만 강간에 이르는 상황들은 예측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범지역을 피해간다거나 홍**국개의원 같은 사람과 만남을 피해간다거나 예측가능한 상황은 피해자가 되기 이전에 방지할 수도 있죠 경찰들도 함정수사라고 과거엔 우범지역에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다니다가 범죄자를 검거한 사례도 있고 모르는 남성의 차에 단둘이 타지 않는다던가 모르는 남성이 주는 개봉된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던가 하는건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대처하지 않습니까? 범죄의 탓은 분명히 범죄자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 관점을 확대해석해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한다면 피해자를 양산하는 논 리가 될뿐이 아닌가 싶네요

다림냥 2017-09-11 01:54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있겠군요. 물론 범죄 위험이 높은 장소에 가지 않는 다거나, 수상한 사람과 같이 차에 타지 않는다거나 하는 기본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백번 동의합니다. 그건 성폭행 뿐만 아니라 강도나 폭행등의 다른 범죄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다만 작가는 성폭행에 대해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고, 당할만 했다‘ 이런 시선은 부당하다는 의미로 그런 글을 쓴 것 같고, 저도 그런 의미로 쓴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특정 의상을 입고,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꼭 성폭행을 당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말이죠. 남자들이 여자에게 ‘니가 먼저 꼬리 쳤잖아‘ 라고 말하며 ‘성폭행 당해도 싸다‘, 이런 논리는 아닌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쓴거였어요~ (물론 고의로 목적을 가지고 남성을 유혹하다가 스스로를 위험으로 내몬 여자들은 제외하고 말할께요) 여자들이 아무것도 조심하지 않고, 대처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쓴 글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오해 말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