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 학교의 참교육 이야기
고야스 미치코 지음, 임영희 옮김 / 밝은누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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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적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철저하게 관념의 사유와 그것을 통한 인간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에서부터 인간은 발생하고, 생각이 인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식의 사고들 말이다. 슈타이너 학교의 이야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세상에 대한 열린 사고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나를 배워 가는 과정에서 너를 배우게 되고, 실력 따라 세워놓은 평가를 접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워간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 나라에서 이 교육을 실행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론은 지금은 어렵겠다는 생각과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육을 받아본적이 있는 교사가 지금 없다는 점이다. 언제 까지 준비를 해야 할지...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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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들의 체계
탈콧트 파슨스 지음, 윤원근 옮김 / 새물결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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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를 그대로 제목으로 정해봤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대 사회'들'의 체계의 강조점 때문이라고 할수 있겠다. 우선은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을 한다면, 행위에는 사회체계, 인성 체계, 행동 체계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판단하고있다. 재밌는 점은 그의 연역적으로 추리를 한것인지 귀납적으로 추론 되어진 것인지, 아니면 통찰력으로 깨달은 것인지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접근한다고 보여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억지로 자신의 논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논리의 비약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 책의 떠오르는 것은 사회라는 여러 사회들의 복합체로서 보편 적인 가치를 분화를 통해서 정교화하고 구조화 시켜가는 것이 사회체계라고 하는 부분 같다. 이러한 관점에는 비판도 있기하지만, 그의 시선은 사회에 대해서 비관적이거나 우울하지 않다. 도리어 기능의 분화와 정교화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읽을수가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는 분화되어젹 가고 통합 되어져가려는 보편적인 미국의 사회화 과정을 지향하고 있는것 같다. 달리 말하면 자율 속에서도 통합되어지고 하나가 되면서도 개별이 존중되어지는 분화와 통합이 아우러지는 사회를 이야기한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움직이는 사회는 철저하게 기능주의적인 사회로 움직이면서, 사회문화는 작용을 하지만, 하나의 체계의 원리로 작용하며, 기능주의적으로 작용하여 개인의 자유를 모색한다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너무 피곤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 결론은 참 재밌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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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나남신서 42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한승완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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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다가 포기했었던 공론장의 구조 변동 책을 다시금 읽게 되었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론을 둘러싼 공방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가 되어가 되어진다. 공개성을 지닌 공론이 어떻게 발전하고,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변질되어지는가?

과거에는 공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봉건 사회를 기초로 성립되어진 사회는, 교황과 왕을 중심으로 성립되어진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신의 비호아래 성립되어진 국가에는 사적인 개인이 존재되어지지 않은채, 위계질서에 따른, 고위 신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교양을 통해서 국가 정책이런것들을 비밀하에 추진하게 되어진다. 하지만, 중세가 붕괴되어지고, 사적인 개인들의 등장은 사회와 자신에 대해서 구별하게 되어진다. 구별하게 되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출판물들도 등장하는 시기를 따라서, 살롱과 같은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진다.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독립과 문예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문예적인 공론장을 형성하게 되어진다. 그 공론장의 특성은 공개성을 가지고 민중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공개성의 원칙은 비밀하에 붙여져 추진되어진 과거 정치의 내용들이 이제는 공개성의 원칙을 주장하는데까지 이른다. 이러한 내용에는 상공업자들이 자신의 부를 획득하게 되어진 경제적인 구조, 경제 시기의 문제까지 적절하게 해결되어져,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어졌기에 가능하게 되어졌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발달되어지고, 국가의 관료제로서의 강제적인 통치가 등장하게 되어짐으로써, 여론은 공개성을 문예적이며, 비판적인 담론의 형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따르도록 하는 일종의 교육 수단으로 전락되어지고 만다. 거기에서 공론장을 형성하는 사적인 개인들은 사라져버리고, 공론장은 일종의 현대 산업사회의 문화로 취급되어지면, 시민들은 문화를 소비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국가는 철저한 여론 관리를 통하여 이러한 소비하는 개인을 길들이는데 사용한다.

읽어가면서, 하버마스의 글쓰기에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그의 글을 통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말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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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교육과 교육시장 - 미국교육의 숨겨진 역사 나남신서 522
앤드류 코울슨 지음, 서은경 옮김 / 나남출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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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몇 단어들로 요약을 하자면, 자유와 경쟁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공교육에 문제점을 볼수가 있다. 미국의 교육은 우리에게 마치 환상처럼 모든 것이 선진화되어져 있고, 최첨단의 교육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그럴 것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많은 젊은이들과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대주의 생각들이 그러한 생각의 요인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하지만 미국의 교육 발전 역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의 문제들과 일맥상통하며, 그 구조적인 문제가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책을 중반부까지 천천히 읽어가다보면, 단순히 교육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보았을 때, 교육의 문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어느정도 짐작을 할수 있게 된다. 공교육의 탄생의 배경에는 시민사회의 적합한 적응성을 배양시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본다. 행동과 사고의 표준화를 통한 인간의 조작실험이 교육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권력의 암투가 서로 오고간다는 점을 누구라도 알수가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부와 대학 당국, 학부모와 사설학원, 학부모와 공립 학교들의 힘 겨루기와 서로에 대한 원성은 어디를 가나 공통점으로 발견할수 있다.

이러한 공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저자는 공교육이 경쟁과 자유, 그리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격언과 같이 공교육은 철저한 관료제에 따른 안정성에 대한 확보와 아울러서 자신들의 교육에 대한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결국은 교육세를 내지만 진정한 교육을 추구하는 학부무와 교사 그리고 학생 그 누구도 좋은 호응을 이끌어 낼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교육의 실현을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규제완화와 아울러서 비용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본다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교육 열풍에 대한 시선들이 잘못되었다는 보는 것들은 관료제에 의해서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가에 대해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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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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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러하다. 너의 민족은 이러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하다."

간단한 말들속에 숨어있는 언어의 폭력을 알아 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이 쌓아하는 가는 학문과 체계라는 것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인종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가진 잣대로서 평가를 내리고, 그러한 평가들에 대한 일정한 과학적 방법론을 부여하는 것이 소위 학자들의 임무였다. 자신들의 객관적 정보에 의해서 평가되어진 상대들은 저열하고, 무능하고 게으르며, 반역하기를 잘하는 성품을 지닌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에 관여하면서 이러한 사고들에 대해서 정면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알제리인의 폭력성은 그들의 생존의 수단이며, 가장 강력하며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라는 것을 옹호한다. 또한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 또한 침략자들에 대한 생산성 저하를 위하는 저항의 수단으로서 바라본다. 학자들은 뇌생리학을 바탕으로 알제리인들에 대한 평가를 하지만, 그것 역시도 파농을 거부하고, 알제리인들이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이 겪는 무분별한 폭력성과 인내심 부족의 현상들은 사실상 병이라고 진단이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도리어 병이라고 진단되어진 사항은 자신들의 착취자들에 대한 저항의 동기로 작용하여서 자신의 행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농의 이러한 논의는 광인(狂人)으로 치부되어진 그들의 삶은 무의식의 용기였던 것이요, 프로이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의식에서 작용했던 놀라운 용기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파농에게서는 정신병이라는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상대성으로 인한 결과물이요, 정치적인 희생의 이름이요, 저항의 동기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았다. 한국인에 대한 평가와 그것에 의해서 한국인들의 뇌와 신체에 각인되어진 온갖 일본과 미국과 중국의 폭력의 흔적들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게 되어 서글픔만을 남기게 된다. 일본이 우리에게 주고간 한국인의 우둔함, 미국이 남겨둔 은혜의 나라 미국, 우리가 섬겨야 하는 황제의 나라 중국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들어있는 서글픈 자화상이 아닐까? 이러한 모든 것들에 저항을 했던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은 파농의 생각을 알고 폭력시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슬픔을 남기게 된다.

사회는 이제 살아 있는 생물체가 되어, 자신의 조직이 만들어 내놓은 규범과 규칙에 합당한 인간만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사요 문명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그것에 인생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럴수 있다" 라는 적절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직의 철저한 배척이며, 온갖 체제의 폭력이다. 파농의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진 글들이 동일하게는 대한민국에서, 작게는 작은 조직체인 기업과 관공서와 가족 관계라는 울타리안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의문과 불확실이 가득하며, 체제의 폭력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36세의 파농의 전언이 아직도 가슴에 메아리를 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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