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육 개혁, 옳은 길로 가고 있나 - 학교교육의 시장화와 교육과정의 보수화 비판
마이클 W. 애플 지음, 성열관 옮김 / 우리교육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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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제목은 번역자가 판매고를 목적으로 한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제목이다. 원제는 "Educating The "Right" Way : Markets, Standards, God and Inequality " 이다. 이 책의 저자는 Michale W. Apple 이다. 책 제목을 보면 알수 있듯이, 저자는 신자유의 공교육에 대한 도전과 이 흐름의 뒷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보수 진영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의 미국 기독교 신학사적인 흐름까지 추적을 감행하고 있다.

저자의 논의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 상징 자본을 기본으로 해서 그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핵심적으로 지적해야 할것은 마이클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입장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권력이 한 쪽으로 쏠리지 않기를 원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이다. 그에게 있어서 잘난 사람이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갖는 것을 사회적인 제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거대한 아비투스를 형성하여, 권력과 부의 불균등화를 이루어 내어 비인간성을 유도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새삼스레 던진다. 그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사실상 공교육 제도를 보장하기 위한 논의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해서 그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에게서 철저하지 못한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그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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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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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나의 나됨을 성취하는 것만이 전부인가? 나는 나 됨은 나 혼자만이 달성되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너가 있음으로 성취되어지고, 확인되어지는 것들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와 설레임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의 글에는 생명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삶이 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평온하면서도, 잔잔한 재미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이 책으로 까지 나와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야 하는 시대가 통탄스럽다.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면서, 받아 들여져야 하는 것들이, 아직도 자연스럽지 않은 까닭인가 보다.

말 그대로 이 책은 그녀의 책이다. 결국 나의 책이 될수 없는 법이다. 난 그녀의 보았을 뿐, 나는 발견하지 못한다. 아무리 감동 받으면 무얼하나. 그것은 결국 그녀의 삶 뿐인것을.

여성이라는 관점. 남성이라는 관점. 그것을 벗어난 인간의 관점. 그 어느것도 하나도 명확하지 않은 시대에 지껄여져 나오는 주장들이란 한낱 부질없는 소리 들이요,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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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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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의 주된 이야기의 골자는 칸트에 대한 저자의 재해석이다. 좀더 세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칸트가 말한 윤리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카타라나 고진은 일본인으로서 거시적인 시선으로 서양 철학을 본다고 한 신문사에서 소개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 부분은 조금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윤리에 있어서 주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골자는 배리법(背理法)이다. 정명제와 반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것 두가지가 동시에 성립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윤리의 문제에서도 그러하다고 본다.

정명제:자유는 존재한다.  반명제: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가지가 동시에 성립한다고 칸트는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할까 라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다. 그것은 괄호 넣기를 시도함으로써 그러하다. 특별히 적용되는 분야는 도덕과 미학의 분야에서 적용된다. 괄호넣기 즉 무관심을 통해서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으로 취급을 하게 되고, 의사는 아무런 감정없이 의사 직업을 수행할수 있다.

카타라나 고진은 말하기를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자유롭다고 간주해야 한다는 칸트의 배리법을 통해서 '자유롭지 않다'에 대해서 괄호넣기를 의미한다. 모든 잘못을 외부 환경의 잘못으로 돌리고 인간은 슬그머니 빠져버리는 타율적인 도덕과 외부 원인의 주변 환경문제로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자유롭게 "간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유로워라 라는 당위(sollst)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상명령이다. 그는 지상명령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쓴다. 지상명령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여한 지상명령의 느낌을 묘하게 던져준다. 자유로워라 는 당위에서 부터 인간은 자유롭다 라고 간주하게 되고 자유롭지 않다의 괄호넣기는 성립한다.

환경은 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환경은 구속만을 가져다 준다. 도리어 자유로워라는 당위와 명령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그 자유의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의 잘못은 취급되고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사안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을 하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범죄에 대한 정확하게 인식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인식은 곧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예로 일본의 언론 자세에 대해서 다룬다. 엽기적인 살인 행각들에 대해서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모든 환경의 잘못으로 지적되는 것이 그 부모이며, 그 부모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응당 자연스런 것이지만, 부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 범인에 대한 처벌의 이유와 조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개인의 범죄는 없고, 오직 환경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타율적인 도덕의 치명적인 문제가 여기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을 이야기할 때는 괄호 넣기를 통해 자유가 없지만,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간주하여, 그 범죄에 대한 범인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괄호 넣기 전은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형이하학적인 의미에서 원인을 조사하고 밝혀내야 한다. 그러나 범죄의 책임의 소재는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천황의 문제로 돌아가자. 도덕적인 책임은 인식과 이론의 바탕위에서 성립된다. 천황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형이하학적인 의미에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서 철저한 인식이 없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의 책임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룰것은 도덕인 무엇인가이다. 그에게서 자유란 타인의 자유까지도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이를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칸트의 철저한 현실인식 반영이 묻어 있는 장면이다. 살면서 다른 이를 수단으로 취급할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것이다.

고진의 책은 불편하다. 다시금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을 가르는 그의 작업은 못내 아쉽다.그 작업의 아쉬움을 인식과 이론 위에서 도덕 책임이 이루어진다로 엮지만 나는 불편하다. 다시금 현실을 인정해야 하며, 거기에 알맞는 윤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이 아닌가? 얼핏 들어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맞아 보이는 것 같은 이유는 그의 "애매한" 사회와 도덕 인식 덕분이리라.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불확정적인 세상인것 같다. 무언가가 정해지지 않은 세상. 그가 말하는 도덕이란 것도 애매하다. 자유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지만, 그의 어투는 내가 보기에는 불분명한게 많다. 그것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구분지어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바라볼수 있는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 대목에서 볼수 있다. 하나의 전체성으로 인간을 바라보지 못하고, 윤리의 테제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분열된 인간을 드러내는것 외에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고도의 물질 문명이 발달했고, 기계론적이며 위계적인 일본의 구조와 아울러서 허무주의와 미신의 대상으로 상상되는 일본의 종교 내지 정신 문화의 이분법적인 구조와도 비슷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타라나 고진. 그는 철저한 일본 사람인것 같은데....솔직히 달갑지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그의 글들은 내용이 없는 말장난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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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3 (양장) - 쇠퇴와 멸망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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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3권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비진티움이 멸망해 가는 과정은 솔직히 지루하다. 비잔티움이라는 특수성과 지리적인 부분들이 크게 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뒤에 가면 갈수록 1,2권에 비해서 신선함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반복되는 족보 중심의 전개와 일반 민중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는 노리치의 글 재주가 부족했는지, 아니면 독자 대상층이 다르기 때문이었는지 알수 없다.

1,2권의 재미는 사라졌고, 이제는 지루함만 남았다. 읽어가면서 내내 언제쯤 망하는거지만 신경을 곤두세워 보고 있다. 망해가는 과정은 그리 스펙터클하지 않다. 그저 천천히 망해가는 제국의 모습속에서, 현대인의 눈은 그저 인물들의 치세의 빈약함과 사회 구조 시스템에서도 그 문제를 찾게 된다. 단순히 노리치의 시선이 왕의 치세에만 눈이 멎어서 더 이상의 심도 있는 관찰이 부족했던 것이 3권에서는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건 아닌가 싶다.

이야기 서술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도리어 3권에서는 책읽기의 방해물이 되고 있는것 같다. 심도 있는 접근이 없기에 미끄러져 할강하는 새처럼 글은 시원스레 읽히지만, 웬지 씁쓸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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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의 교수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켄 베인 지음, 안진환.허형은 옮김 / 뜨인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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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학습의 내용과 방법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 사서 삼경을 공부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공부해서 대학 전공을 공부해야 한다. 각각의 공부 방법은 모두 틀리고, 필요로 되어지는 사고 기술 능력도 현저하게 틀리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필요로 되어지는 능력의 정도도 틀리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이 책의 원제는 "What the best college teachers do" 이다. 여기 제목에서부터 우선 막히는 부분은 최고 대학 선생들의 기준을 무엇으로 두고 선정을 했을까? 여기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은근슬쩍 시작을 하다가 곧장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무엇을 중점에 두고 최고의 교수들을 선정했는지는 아직까지 미지수이다. 전체 책의 논의를 두고 보았을 때, 저자 나름의 최고의 교수는 학생들의 삶의 도덕적 가치와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주어 행동의 변화로까지 이끌어 낸 교수를 지칭하는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학생들의 대상군에 대한 분석도 없으니,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했는지, 그리고 왜 이 교수들을 선별 취재 했는지 알수가 없다. 15년의 세월이라는 연구 조사지만, 무엇이 기반된 결과들이며, 선정된 결과들인지는 알 도리가 없으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겠다.

그럼 선정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저자가 말한 교수는 학생들에 소위 '변화'를 이끌어 낸 교수이다. 그 변화를 하기 위해서 다양한 교수법이 사용되어진다. 그것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지적 자극을 이끌어 내거나, 교실 내외의 학습 환경을 조성하여 학습자의 적극적인 학습을 유도한다. 다양한 수업 방식을 이용하고, 다양한 채점 방식을 이용하여 학습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내용을 천천히 읽다 보면, 켄베인의 학습과 가치관이 연결 되어 있다는 점을 알수가 있다. 즉 그는 학습은 이해의 영역이며, 이해를 통하여 추론하여 통합하며, 통합한 뒤에는 그것을 평가하는 종합적인 학습 해야 하며, 평가는 학생의 이해의 구축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어떤 적용을 시켰는가에 대한 학습-개인 성숙의 관계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하기에, 교수자는 학생들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학생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그들에게 제시할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허위의식을 버리고 그들과 삶과 삶이 부딪히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나아가야 하며, 주변 사물의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지식의 연결고리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켄베인이 생각하는 학습의 정의는 강단 철학에서 벗어나, 철학함을 배워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논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시대적으로도 "what to teach" 에서 "how to teach"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도 시대적으로는 동의하는 학습태도이다. 하지만 그의 저술 자체가 학습에 대한 저자만의 편견, 다른 학생들의 피드백에 대해서도 명확히 분석치 않은 자료에 대한 편협한 인상들, 최고 교수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자신만의 논리와 근거의 불명확성, 시대적인 인식을 추상화 시켜 절대적인 학습법을 비취는 기운들.....이런 것들은 솔직히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이것을 내가 적용하기 위한 점은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정말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성에서 나아가 복잡성을 논의할 수 있는 교사의 수준은, 내 경험상 높은 수준의 학문적 통합성, 균형 그리고 논리 추론 구조화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이런 것을 갖추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에 나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두번째는, 학생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부분이다. 학생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들과 허물없이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학습의 구조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학생들에게 하는 질문 호기심을 이끌어 내기, 단순함과 일상에서 질문을 유도하기 등은 많이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적용하고는 싶지만, 적용이 어려운 부분은 가치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은 고등학교가 "study" 개념의 학습이라면, 대학은 "philosophy" 학습 개념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고등학교 이하 과목은 자신의 호기심과는 상관없이 수업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대학은 선택이 가능하다. 그것은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수업을 참여하기에, Carl Jung 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들의 무의식의 영역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 수업을 듣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은 자신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수강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존재한다. 그리고 추론이라는 이성적인 방법을 쓰기 보다는, 정의되어진 학습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부담도 존재한다. 이것으 일종의 약속되어진 정의를 바탕으로 학습이 펼쳐지는 독특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상이 틀리다는 점 또한 무시 못한다. 책의 제목대로만 한다면 최고의 대학 교수들인만큼, 수강생 역시 미국 전역에서 선발된 최고의 학생들인 것이다. 그들은 이미 12년 가량의 "study"과정을 거친 학생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을 현실적인 초중고 과정에서 실현하고자, 심도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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