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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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떻게 하면 글에서 향기가 날수 있을까? 논리의 수단으로서 글이 사용이 되어질 때, 글은 인격이 아니라 단순한 인간의 도구에 불과하였다. 신영복 교수님께 있어서 글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수감 생활 속에서 자신을 정진하기 위한 길동무였으며,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었는가. 글에서 삶이 나오고, 삶이 글로 들어가니, 삶과 글이 더 이상 둘이 될수 없는 필연을 맞이하였나 보다. 글은 삶이 되었고, 삶이 된 글은 향기를 뿜어내게 되었다. 그 향기를 강렬하지는 않지만, 강인하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이라는 틀에 박혀 자신을 잃어 가는 나를 일깨운다.

자신을 부단히 정진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됨으로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닐까? 결국은 나 자신의 허욕과 허위를 버리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며, 정진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식을 얻고자 함은 버리기 위함이며, 실천하기 위함인데, 지식의 사유화에만 머물렀을때, 나는 절름발이가 될수 밖에 없다.

마지막 글에서 "나는 걷고 싶다" 라는 구절에서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저 앉아서 읽기만을 스스로 강요하며, 거기에서 찾아오는 무료함과 지루함은 실상은 실천 없는 사유의 화석화이며, 생기를 잃어버린 육신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일어나 걷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있으며, 삶으로 드러나길 원한다. 그 원함이 행위로까지 나아가서 나의 삶으로 나아가, 나의 존재의 깊음에 뿌리를 내리며, 나의 나됨(Nartureness)에 까지 나아가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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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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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Eyre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란 표현은 종종 독단적이며 배타적인 소유라는 이름으로 사랑이 행해진다. 그 사랑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형성한다.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고 독립된 여성, 곧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사고와 결단의 영역에서도 독립되어진, 여성은 상대하기가 부담스럽고, 까칠한 여성으로 통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영국 사회를 반영하는 듯,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상류층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되고자 자처한다. 남자의 재능과 외모와 재산을 탐하며 거기에 자신을 노예로 들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제인에어는 분명하게도 자신의 작지만 경제적인 독립을 꾀하며, 여성으로서도 많은 공부를 습득하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로체스터를 만났을 때의 그녀는 자신은 독립된 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히 종속 관계로 성립되어지는 것이 아닌, 성숙한 독립된 두명이 사랑을 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샬럿 브론테의 글처럼 그 들은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사랑을 지켜 나간다. 결국, 그 사랑에는 깊은 신뢰가 밑받침이 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는 독립되어지며, 성숙한 사람으로서의 자세가 엿보이고 있다.

사랑에 빠졌다고 이야기하는 수 많은 젊은 남녀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육체의 만족에서만 자신의 사랑을 찾고자 하는 결과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거기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서로를 속이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물물교환 내지 보이지 않는 가치 교환을 하는 시장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사랑을 한다. 거기에는 서로의 신뢰가 아닌 서로의 계산이며, 서로의 사랑이 아닌 가치 교환이 존재한다. 따뜻함과 믿음직스러움이 아닌 순간의 뜨거움과 질투의 경쟁이 존재한다.

사랑은 제인 에어의 글처럼, 종속관계가 아니라, 성숙한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제인에어는 이것을 간판하였는지, 로체스터씨의 비밀이 밝혀진후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결혼을 했기 때문은 아닌것 같다. 그 관계가 유지되더라도, 그것은 로체스터씨에게 종속되어진 숨겨진 애인이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로체스터에 대한 철저한 종속을 야기하기에, 그녀는 도망을 할수 밖에 없는 것이었으리라.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닌,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나아가는 길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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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미로 2008-06-14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춘기때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20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아 있는책이랍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서평을 읽어봅니다.^^

minority 2008-06-14 12:37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책이더군요. 읽어 가는 내내, 가슴 졸이며 봤답니다.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마이스토리 2009-09-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감입니다.
요즘 처럼 자극적인 사랑이 난무한 가운데 제인에어는 심장을 이어주는 애절한 사랑의
본보인 것 같아 몇번을 읽어도 몰입하게 됩니다.
서평 잘읽었습니다.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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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조직 단체는 정부이다. 정부의 역할론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이견이 있지만, 현존하고 있는 정부는 지역을 추상적 공간화를 통한 시민 내지 국민들의 통치를 역할 수행이라고 본다. 이러한 통치는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분명 억압한다. 억압의 원인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권력 유지를 돕는 산하 기관들이 존재한다. 이 산하 기관들에서 수익을 만들어 내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분명한 혜택을 누리며, 자신의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의미를 돈이라는 수익을 차단해 버리거나, 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유보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러한 권력 유지는 수익의 혜택을 산하 기관 내지 특정인에게 부여하여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를 활성화 시킨다.

그러한 조직 체계는 정부를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 체계 유지에, 마찰이 발생하게 되고, 마찰의 발생은 도덕적인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간단히 무시되어져 버린다. 정부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대외 활동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권력의 특성상 그것은 더욱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외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정부에게 있어서 개인의 도덕적인 행위는, 일탈 행위로 보여지며, 범죄 행위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통제되어져 되고, 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소로우는 이야기 한다. 국민보다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인정해야 하며, 비도덕적인 지시에 대해서 저항해야 하며, 법보다 정의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것을 이야기한다. 소로우는 권력의 폭력적인 행위에 대해서 저항을 표시해야 한다. 소극적인 저항은 저항이 아닌, 사실상 동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입지를 버리고서라도, 정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majority of one 이라는 표어를 내 걸었던 19세기의 미국의 지성인처럼, 우리도 이러한 개인의 단호한 결의가 필요치 않겠는가.

멕시코와의 영토전쟁, 노예 폐지론에 대한 입장. 당시 미국의 입장은 현재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수동적이 표를 행사하지도 못하며, 자조적인 말로서 경제 활동에만 몰입하는 작금의 세태를 떠올려 본다면, 우리의 모습은 비겁한 행동 다름이 아닌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 저항인가 순응인가? 현대는 사회는 순응이야말로, 가장 값지며 가치있는 행동이라고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개인의 능력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저항과 불복종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알고 있는 젊은이들이 몇명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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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영지주의다 - 기독교가 숨긴 얼굴, 영지주의의 세계와 역사
스티븐 횔러 지음, 이재길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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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에 대한 해설중, 실존주의와의 대조는 영지주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류 개신교가 교의 중심의 종교라면,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비밀한 지식을 이야기하며, 대속을 이야기 한다면, 해방을 이야기 한다. 또한 주어진 현실의 삶에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실존주의와 현실의 삶을 초월하려는 영지주의의 접근은 신선하다.

그 중에서 깊이 와닿은 것은 영지주의 비폭력성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영성의 다양한 접근을 이끌어 간다는 측면에서 주목해서 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특별히 다양성에 혼란을 가중 시킨다는 개신교 체계주의자들의 논박이 영지주의가 혼란의 대상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했다. 4세기 가량부터 교부철학자들의 이러한 신랄한 비판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사건은 기독교가 하나의 체계로 편입 되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의 사회 논리체계와 법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영지주의는 이러한 논리, 체계, 획일적인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 어려웠고, 내재적인 사상의 흐름 자체가 이런 시도가 영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논리의 폭력성이 영혼의 힘을 힘을 압도하고, 폭력은 평화를 이긴다. 이것이 종교의 역사에서 펼쳐 진다. 영지주의는 이러한 역사의 질곡속에서도, 시대의 요청에 대한 영혼의 요구로 다시금 세상에 드러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영지주의의 비도덕성과 혼란을 가져다 준다는 편견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도움을 준다. 반드시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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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 신화상징총서 4
세르주 위탱 지음, 황준성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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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을 단순하게 영지주의에서 출발하지 말자. 내가 교회에서 다닐때 영지주의가 마치 교회의 이단분파로 취급되어지는 수모를 겪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러한 시각들이 저자인 세르주 위탱이 말하는 것과 같이 프랑스의 영지주의 관련 학계에서도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저자의 의도는 영지주의는 기독교와는 다른 근원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영지주의가 단순히 기독교의 근원을 둔 이단 분파가 아니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영지주의의 태도는 시대적인 상황과 맞추어서 나타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근대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 시대의 상황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외부 상황의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어하는 열망을 드러낸다고 한다. 여기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실존주의가 피투성이라는 개념으로 현실을 주어진 삶의 여건으로 파악한다면, 영지주의는 신화에서 드러나는 현실사회와 이것을 접하고 있는 자신의 육체와의 거세 작업을 통하여서 자신을 이 땅과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하는 것은, 제의적인 의식과 비밀스런 의식들을 통해서 비밀리에 전달되어지는 지식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영지주의는 세상의 어렵고 힘들며 추악한 세상을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더욱 들어가 신의 지식을 얻어, 그것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뜨거운 종교 심성의 발현이라고 볼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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