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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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러하다. 너의 민족은 이러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하다."

간단한 말들속에 숨어있는 언어의 폭력을 알아 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이 쌓아하는 가는 학문과 체계라는 것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인종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가진 잣대로서 평가를 내리고, 그러한 평가들에 대한 일정한 과학적 방법론을 부여하는 것이 소위 학자들의 임무였다. 자신들의 객관적 정보에 의해서 평가되어진 상대들은 저열하고, 무능하고 게으르며, 반역하기를 잘하는 성품을 지닌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에 관여하면서 이러한 사고들에 대해서 정면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알제리인의 폭력성은 그들의 생존의 수단이며, 가장 강력하며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라는 것을 옹호한다. 또한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 또한 침략자들에 대한 생산성 저하를 위하는 저항의 수단으로서 바라본다. 학자들은 뇌생리학을 바탕으로 알제리인들에 대한 평가를 하지만, 그것 역시도 파농을 거부하고, 알제리인들이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이 겪는 무분별한 폭력성과 인내심 부족의 현상들은 사실상 병이라고 진단이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도리어 병이라고 진단되어진 사항은 자신들의 착취자들에 대한 저항의 동기로 작용하여서 자신의 행위를 행사하게 된다. 파농의 이러한 논의는 광인(狂人)으로 치부되어진 그들의 삶은 무의식의 용기였던 것이요, 프로이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의식에서 작용했던 놀라운 용기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파농에게서는 정신병이라는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상대성으로 인한 결과물이요, 정치적인 희생의 이름이요, 저항의 동기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았다. 한국인에 대한 평가와 그것에 의해서 한국인들의 뇌와 신체에 각인되어진 온갖 일본과 미국과 중국의 폭력의 흔적들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게 되어 서글픔만을 남기게 된다. 일본이 우리에게 주고간 한국인의 우둔함, 미국이 남겨둔 은혜의 나라 미국, 우리가 섬겨야 하는 황제의 나라 중국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들어있는 서글픈 자화상이 아닐까? 이러한 모든 것들에 저항을 했던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은 파농의 생각을 알고 폭력시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슬픔을 남기게 된다.

사회는 이제 살아 있는 생물체가 되어, 자신의 조직이 만들어 내놓은 규범과 규칙에 합당한 인간만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사요 문명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그것에 인생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럴수 있다" 라는 적절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직의 철저한 배척이며, 온갖 체제의 폭력이다. 파농의 국가 차원에서 다루어진 글들이 동일하게는 대한민국에서, 작게는 작은 조직체인 기업과 관공서와 가족 관계라는 울타리안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의문과 불확실이 가득하며, 체제의 폭력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36세의 파농의 전언이 아직도 가슴에 메아리를 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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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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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일까?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그것은 어떻게 부여되어지는가?

상당히 어려운 질문인것 같다. 미쉘푸코는 권력에 대한 분석을 이야기하며, 권력 자신이 스스로를 유지해나가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백성들의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철저한 공포를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유지하는 강력한 상징이면서 실질적인 수단은 감옥이다. 감옥은 권력이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사회의 악을 뿌리 뽑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역사는 철저하게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많은 악이라고 하는 것을 재생산하는 공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으니, 그것이 가지고 공포에 대한 상징의 역할인것 같다. 초창기 시절 행하여졌던 잔혹한 신체형은 백성으로 하여금 권력의 대표자인 왕에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육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범죄했던 죄목에 대하여 규정되어진 절차와 항목에 따라서 범죄자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신체형은 점차 사라져 갔지만, 그 원리는 거대한 사회의 면면으로 스며들어 더욱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따. 군대, 학교, 관료제, 시민법등. 이 모든 것들에는 일망 감시체제(Panopticon)이라는 과거 권력자요 권력이었던 왕의 감시 체제를 교묘하게 사회적인 장체로 변화시켜놓은것 다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등록되어지고 관리되어지고 통제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소외되어지고, 벗어나는 인간은 처벌받는다. 그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높은 권력으로 올라 가고자 하고, 더 철저한 상위 감시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오늘도 권력자의 삶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푸코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지 심경이 복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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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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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쉘푸코의 저작을 처음 접하면서 푸코가 그리고 있는 진정한 이상향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해봤다. 권력에 의해 조작되어진 세상속에서 인간은 인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폭력 당하며 살아왔다. 결국 거기에는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철저하게 조작되어지고, 훈련되어지고, 권력과 조직에 순종적인 규격화되어지고 순종적인 부품 하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다. 푸코의 저작에서 내내 짐작해서 추론한것은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것을 진정으로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 도덕이나 정신병으로 치부되지 않는 인간의 개성이 실현화 되어지고,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규명되어지지 않은 다채로운 인간의 인격의 분출을 그는 이야기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광기의 역사는 의미심장하다. 유럽을 이끌고 온 이성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단단한 권력의 아성을 쌓았다. 데카르트의 이성에 대한 그의 해석은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한가지 확인한 점은 이성은 미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부합되지 않는 것은 미친것으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의 존립을 침해를 느꼈나 보다. 그리하여 자신의 규격에 들지 않는 모든것을 광기로 정하여 대감호, 구빈원, 정신병원 행을 시켰다. 거기에는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아닌 행정적이며, 규정에 의한 조치가 있었다는 점이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합리화 되어진 인간. 그리고 훈련되어진 인간. 규례에 익숙하고 조직에 익숙한 인간은 정상이며 그렇지 않은 인간은 비정상적이고 광기에 쌓여 버린 인간이다. 그들은 이성적인 사회에서 제거되어져야 하는 인물이며, 또한 조작되어진 인간으로 하여금 미친다는 것이 얼마나 끔직한지에 대한 관람의 대상이 되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오늘도 미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 정체성에 갇혀진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기 보다는, 권력, 돈, 性에 의해서 포획되어진 편안한 안락을 즐기며 살려 한다.

당신은 이성적인가? 아니라면 미쳤는가? 오늘도 나는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다시금 되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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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9
앙드레 지드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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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구절의 이 말씀은 기독인들의 인생의 행로를 설정하고 있다. 청교도에서 추구하는 금욕과 경건은 보이는 것에서 얻는 모든 것들을 세속적으로 규정한다. 그것이 허락되어지는 영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셨다는 신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조망될 때이다.

알리사는 청교도적인 이상을 쫒아 살려고 한다. 줄리에트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던 것은 겉보기에는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자신의 일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희생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완벽한 만족과 행복을 얻는 것에서 분개를 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는 그녀의 신앙은 철저하게 희생이 아니었고, 자신의 알량한 신앙의 푯대에 맞추어진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제롬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제롬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사랑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또 다시 희생하고자 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독신의 경지도 볼수가 없다. 그저 자신의 신앙 행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의 행위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는 진심이었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죽음을 택한다. 알리사는 병사(病死)인지 자살의 중간 형태를 띈 죽음을 맞이한다. 제롬은 과거 추억이 가득한 알리사를 그리워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나 제롬 역시 추구하였던 것들이 과거 추억과 지성의 영역에서 현실의 삶을 간과한 사랑이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여기에서 두가지 질문을 하면서 이 책의 소감을 마친다. 알리사가 했던 것처럼 그녀가 얻고자 했던 덕이라는 것은 그렇게도 대단하였던 것인가? 그리고 제롬은 진정으로 알리사를 사랑했던가? 그저 자신의 상상속의 그녀를 사랑한것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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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링 - 범죄심리와 과학수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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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페이지 정도를 읽다가 덮었다.

우선 나같은 경우는 범죄자들의 소상한 정신 분석이나 심리적인 동향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과거 있었던 사실들에 대한 간단한 에피소드와 이야기 거리로 채워져 있다. 흥미 거리로 읽기에는 좋지만, 범죄 심리쪽에 관심 이는 분들에게는 비추천이다.

그리고 빌려 읽기에는 좋지만, 사서 읽으라고 권하기에는 정말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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