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거! 2 - 상식 마니아를 위한 상식사전
베른트 하르더 지음, 도복선.류경은 옮김 / 보누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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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이상하다. 세탁기를 돌리면 양말이 한 짝씩 실종되는 이 기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내는 빨래한 양말을 개킬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양말 한 짝 어딨어? 나도 알고 싶다. 사라진 양말들이 어디로 가는지 말이다. 한 짝씩 사라지는 양말처럼 조금만 일상에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들이 참 많다. 양말은 가고 먼지는 온다. 밭에 있는 자갈들이 어디서 오는지, 바람은 어떻게 생기는지, 밤의 사막은 왜 그리 추운지 따위의 문제는 굉장히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것인데 정작 그것의 정체나 원인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왜 뜬금없이 이런 이상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나 역시 깊이 생각해 보지 않거나 혹은 의문조차 가지지 않은 문제들이었으니까. 《아! 그거 2》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물음들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났다.

 

 

   제일 먼저 나는 사라진 양말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짝 잃은 멀쩡한 양말들이 자꾸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종된 양말을 찾아요,라고 전단지를 써붙일 수도 없잖은가. 그것은 필시 우리 집 안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사라진 양말 한 짝을 애타게 찾아 헤맸던 경험이 있다면 눈을 번쩍 뜨고 그것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고 있겠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책의 대답을 들으면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세탁기 안의 버뮤다 삼각지대가 있는데, 그래도 나오지 않는 양말들은 외계인이 가져갔다는, 너무 황당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대답이 돌아온다. 사라진 양말의 행방을 알기는 글렀다. 어제 TV에서 양말로 당나귀도 만들고 개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어서 인형극을 보여주던데, 진짜 신기하더라. 나도 그거나 해볼까 싶다.

 

 

   사라진 양말의 행방을 먼저 소개해서 예비독자는 한숨을 푹 쉬며 외면하고 말지도 모른다. 상식이 아니라 단순한 유머집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우연찮게도 가장 황당한 내용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궁금증을 가장 신속하고 재미있게 해소시켜주고 있다. 우리가 평소에 궁금했지만 너무도 당연한 문제라 그냥 지나치고 만, 바로 그런 궁금증들 말이다. 이를 테면 물새는 겨울에도 발이 시리지 않은지, 왜 내가 선 줄은 다른 줄보다 더딘지,소라껍데기를 귀에 대면 왜 바다 소리가 나는지, 남자들은 왜 쓸모없는 젖꼭지가 붙어 있는가 따위의 문제들이다. 나는 이 질문 목록들을 쳐다보면서 감탄사를 남발했다. 질문에 대한 답도 답이지만 질문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웠다. 글쓴이의 남다른 주의력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생각했을까. 일반 사람들이 간과했던 사소한 것들을 포착해내는 힘이 정말로 감탄스럽다.

 

 

   이 책의 테마는 '상식 마니아를 위한 상식사전'이다. 일반 상식책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물음이나 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물음을 던져보았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들에 매달려 있길래 이런 문제들에 궁금증조차 가지지 않았던가.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목록들 중 어떤 것은 쓸모가 없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이 책은 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우리 주변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생활 속 숨겨진 가치를 일깨워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가장 순수한 물음을 던져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거기 답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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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한혜원 지음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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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래미안에 산다. '미래지향적이며(來), 아름답고(美), 편안한(安) 아파트'라는 표어를 내세운 주택 브랜드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지도 않다. 여느 다가구주택처럼 방음이 잘 안 되고,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집의 어느 부분에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래미안에 산다. 미래지향적이며 아름답고 편안한 아파트라는 '이미지' 안에 산다. 이미지가 밥 먹여주느냐고? 인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밥만 먹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최근에 읽었던 진화생물학 책에서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짓는 것으로 '음악'을 들고 있었다. 인간의 음악활동에 대해 진화론 입장에서는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음악활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음악 이외에도 인간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은 다양하다. 그중에 하나로 '이야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술수로 활용해 마진율을 높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일 수는 있겠으나 보다 근원적으로 소비자가 물건, 장소, 사람 등을 통해서 그 실체 너머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이다. 즉, 이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이 우선하고 그 갈망이 물건에까지 파급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감성적 교류를 전제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누군가로부터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미래지향적이며 아름답고 편안한' 곳에 삽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반면에 '래미안에 삽니다'라고 하면 아아,하면서 알은체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브랜드 스토리가 노리는 것이며, 이야기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이야기의 시대이다. 밥 먹고 숨을 쉬듯이 우리는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20세기까지 '이야기'는 종이 위에 쓰여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21세기 이야기'는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시간적, 물리적 제약도 없다. 20세기까지 '이야기꾼'은 특정한 사람들의 특권처럼 떠받들여졌지만, 이제 누구나 다양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바로 '이야기하는 인간'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발달은 생활의 안락함 뿐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 욕망을 풀어낼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사진 파일을 공유하고 익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섞을 수 있다. 앞서 얘기한 브랜드 스토리 전략처럼 '이야기'는 상품에 값비싼 이미지를 입히기도 하고, 영상매체나 게임,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 본능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이야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일까. 그것은 진화론적 입장이고, 21세기에서 '이야기'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야기 없이는 이야기가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혜원은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야기 본능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상물이나 게임, 그리고 예술작품에서 광고, 브랜드까지 생활 곳곳에 심어진 이야기를 캐내고 있다. 아울러 이야기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전반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호모 나랜스,라는 다소 낯선 용어와는 달리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를 준다.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판치는 세상. 이야기를 생산하는 동시에 소비하기도 하는 우리에게 '이야기'의 의의를 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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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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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어버리지 마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 듯했다. (...) 할아버지는 단지를 껴안고 동굴을 나왔다. 저녁때가 다 되었으므로 미군 기지에 있는 조명들의 강한 빛줄기가 몇 개나 교차하며 해안선까지 뻗어나갔다. 여기는 이제 고향이라 부를 수 없는 장소가 되었음을 할아버지는 깨달았다. 

 

                                                 -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중에서


 

 

   나라를 잃는 일은 고향을 잃는 것과 같고,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잃는 것. 어린 시절을 잃는다는 것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 옛날 독립국이었던 류큐(현 오키나와)는 기나긴 압제와 핍박의 역사를 가졌다. 일본 본토에 오키나와 현으로 귀속되어 나라를 잃은 설움도 모자라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시 일본의 횡포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오랜 기간 미군 정하에 놓여 있어야 했던 오키나와의 역사는 남의 일 같지 않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현재 일본 땅에 귀속되어 있는 오키나와를 두고도 자신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감추기에만 급급한 일본의 태도에 피가 끓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키나와 인이 자신들을 우치난추(오키나와 인이라는 말)라 하여 일본 본토인(야마톤추)과 구분을 짓는 것은 피 맺힌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그들의 일념이 아닌가 생각했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이다. 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란 우치난추가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는 이 작품집에서 오키나와 인의 자존심을 읽었다. 그들이 나고 자란 바닷 내음을 맡았고, 그들을 예까지 이끌어 온 역사의 피바람을 보았다. 메도루마 슌은 소설 곳곳에 오키나와 인의 역사와 정서를 심어놓고 있다. 표제작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에서 노인이 소년에게 그 옛날 자신의 아버지의 술 단지에 얽힌 역사적 비극을 들려주면서 손수 술 한 잔을 나누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전쟁과 죽음을 거친 술 단지의 깊은 향기가 여러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얘기는 이런 식이었다. 신이 나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아와모리 3홉들이 한 병을 비우고 밭일도 내팽개쳤다. 할아버지가 내주는 파파야나 구아바, 라이치 같은 것을 먹으면서 나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열중했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이를 상대로 허풍을 떤다고 웃어넘길 수도 있으리라. (...) 하긴 유탄에 맞아 생긴 흉터라며 보여 준 위팔과 정강이의 상처가, 그 후의 이야기에서는 은 광산에서 생매장됐을 때 생긴 상처가 되기도 하고, 또 그 다음 얘기에서는 술집에서 여러 명의 미국인을 가라테로 쓰러뜨렸을 때 칼에 찔린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 점을 지적하자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므로 나도 더는 질문을 삼갔다.

 

                                                   -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중에서


 

  

   무거운 역사를 지고 있던 노인은 이제 소년에게 그 역사를 넘겨준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밭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노인의 허풍 속에 역사의 진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어른이 된 소년은 알았을 것이다. 어른이 된 소년은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오키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인이 오랜 세월 간직해 온 술 단지에 배인 향기처럼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 의해 멀리까지 흐르고 또 흐른다.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은 크게 두 가지 테마로 이뤄져 있다. 오키나와의 역사가 그 첫 번째 테마라면 '샤머니즘'을 토대로 한 '죽음'이 두 번째 테마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고 자라서 바다에 의지해 살다가 죽어서는 바다 저편 세계로 가는 거라고 우타는 배웠다.  - (혼 불어넣기) 중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혼 불어넣기>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 <내해> 속에 흐르는 샤머니즘이 오키나와의 정서 일부분을 차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샤머니즘이 크게 낯설지 않다. <혼 불어넣기>에서 혼이 나간 고타로의 몸에 소라게가 점령하면서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빨간색 볼펜으로 손이나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잠자리에 들면 바깥을 떠돌다 돌아온 영혼이 집을 못 알아보고 영영 나가버린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어린 시절, 굳게 믿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죽기 전에 보인다는 도깨비불이나 죽은 사람의 혼이 형상으로 보이는 장면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메도루마 슌이 보여주는 '죽음'은 삶과 뚜렷한 경계를 짓지 않는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깃들어 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삶의 장소도 죽음의 장소도 '바다'라는 것이다. 오키나와 인들에게 '바다'는 잃어버린 고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바다'가 갖는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라도 잃어버렸던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오키나와 인들의 그리움, 한(恨) 같은 것을 나는 읽어낼 수 있었다. 작품 속 바다와 죽음의 묘사가 가슴을 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가장 매력적이었던 작품은 <투계>였다. 싸움닭의 잔인성과 그보다 더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힘 있는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분노'였다. 싸움닭들의 싸움 장면, 그리고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인간의 잔인성 따위는 읽어내는 이의 분노를 자아낸다. 사토하라를 향한 다카시의 두려움과 분노에서 나는 일본 본토에 대한 오키나와 인의 강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다카시가 사토하라의 셰퍼드에게 칼날 박힌 고기를 던지고 휘발유가 담긴 병에 불을 붙여 사토하라의 개와 싸움닭들을 불태우는 마지막 장면은 무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술에 취한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땅바닥에서 뒤엉킨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인파 속으로 달려간 다카시는, 올라탄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아버지를 보았다. 손가락으로 부는 휘파람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불기운에 땀이 솟아서 고개를 들어 보니, 불타는 남양삼나무의 황금색과 주황색, 오렌지색 불기둥이 마치 다우치의 곤두선 깃털처럼 아름다웠다. 다카시는 밤하늘로 날아오른 불꽃이 집집마다 날아가 마을 전체를 몽땅 태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투계) 중에서


 

 

   "안면을 베이고 머리통이 깨져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다우치에게도, 그런 다우치를 묻으라고 시키는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는 자신에게도 혐오감과 분노가 솟구쳐 내장까지 소름이 쫙 끼치는 기분"을 느끼는 다카시는 싸움에 진 닭을 불쌍히 여기는 한편 강한 분노를 느낀다. 다카시의 이율배반적 감정에서 나는 나라 잃은 설움에 소리 죽여 우는 오키나와 인의 울음을 들었다.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끝내 잃어버린 자책과 일본 본토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울음이었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단지에 배인 오래된 향처럼 역사는 우리의 핏속에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인들의 설움의 역사를 읽는 동안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아픔이 되살아났다. <투계>의 다카시가 그랬던 것처럼 아픈 역사를 몽땅 불태워버릴 수 있다면 좋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 순간 브라질 할아버지가 술잔을 건네면서 하는 말. "잊어버리지 마라."『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역사라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피 흘린 역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또 한 번 나라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일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곧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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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탄생 - 마음은 언제 탄생하여 어떻게 발달해 왔는가?
요시다 슈지 지음, 심윤섭 옮김 / 시니어커뮤니케이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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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나 물질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마음'이 있다. '정신', '영혼'이라고도 하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의 입을 빌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지만 마음의 실체를 확증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에 수많은 의미부여를 해왔던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정치, 문화, 예술, 대중매체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인간 심리를 겨냥하고 있다. 마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란한 마음의 시대에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의 실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 마음에 대한 수많은 억측과 오해의 역사를 거친 오늘날에 이르러 마음과 뇌의 관계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 보는 학자들에게 마음은 더 이상 물질에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뇌스캔을 통해 환자의 뇌 반응을 지켜보면서 병을 판단하고 치료한다. (부분적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을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도 인간 육체의 물질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 '마음'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다. 인간 정신, '마음'은 수많은 가설과 추측으로만 접근해 볼 수 있는 실정이다. 《마음의 탄생》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아기는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편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능인자가 활동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음이란 마음의 핵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활동하는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화두로 책은 시작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요시다 슈지는 7백만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간다. '마음'은 인류가 걸어온 오래된 역사의 산물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곧 '마음'이냐.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없는 육체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 결국 '마음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라는 문제이다. 요시다 슈지는 다각도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진화론적 관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현상, 문화, 역사 속에 숨겨진 '마음'의 작용을 추적하고 있다.

 

 



   인간은 환경, 역사, 풍속, 관습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생물이지만, 누구든 보편성을 갖고 있는 생물이기도 하다. 그 보편성이 바로 사람다움이다. (본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명성 - 사람다움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양수와 일체감을 느끼던 것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공감성(共感性)이라 한다. 공감성 덕분에 인간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화제의 다큐 '아마존의 눈물'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이 공감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공을 뛰어넘는' 인간의 보편성, 바로 사람다움이 우리 '마음'을 두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진화의 규칙에서 벗어난 뇌가 커진 인류는 고기를 먹는 반칙행위를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뇌가 커진 인류가 멸종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말, 바로 언어 사용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언어는 '마음'을 탄생시켰다.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인간 마음의 역사에서 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절대시했던 수렵채집시대에는 없던 갈등이 농경사회에서 생겨났다. 농경사회에서는 인간관계 속에서 절대성이라는 환상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절대적 자연을 대신해 인간에게서 절대성을 추구하면서 "언어와 현실의 괴리"가 생겨났다. '거짓말'의 탄생이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환상을 볼 필요가 없는 이누잇 사람들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가지는 감정은 그저 단순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 한편, 농경사회에서는 계속 거짓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농경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는 항상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배운다. 하지만 그렇게 배우는 이유는 우리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경민은 인간관계가 환상적이기 때문에, 인간관계 속에서 확증을 구하는 대화가 끝도 없이 계속된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 안에서 확증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서로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어떤 자식은 예쁘고 어떤 자식은 정이 덜 간다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이누잇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고 충격적이면서도 한편 부러웠다. 인간에게서는 결코 얻어내지 못할 '절대성'을 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일용할 양식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파트너를 잃은 농경민"의 비애를 느꼈다. (아, 자연!)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세상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제 거짓말도 능력이라 한다.

 

 

   비교적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도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요시다 슈지는 저자 후기에서 "누구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가급적 학술 용어를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은 몇몇 전문가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능인자, 자명성, 디지털화, 아날로그화 등 전문용어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기 때문에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진화론이나 심리학, 뇌 관련 책들을 보아왔지만 이 책만큼 군더더기 없고 이해가 쉬운 책은 드물었다. 책을 통해 '마음'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 '나'라는 것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마음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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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눈동자
알렉스 쿠소 지음, 노영란 옮김, 여서진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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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글뱅글 돌아가는 검은색이 밤을 떠오르게 했다. 전축의 바늘은 숨을 거둔 누군가의 얼굴 위에 새겨진, 깊은 주름 사이를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밭고랑을 만들며 돌아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할머니의 죽음에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있다. 열세살 소년 윌리엄과 동생 비올렛이 할머니의 '죽음' 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잔잔한 공감을 끌어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개미나 날파리의 죽음도 괜찮다) 골똘한 표정으로 물음을 쏟아내던 작은 아이였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벌'로 변했다고 믿는 비올렛과 그런 동생의 믿음을 지켜주려는 윌리엄의 태도는 우리를 아이의 마음으로 물들인다. 할머니가 죽어서 벌이 되었건 물고기가 되었건 분명한 사실은 이제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빈자리는 할머니의 꿈 같은 이야기들과 노래로 채워질 것이라는 동화 같은 암시로 끝을 맺는다.


 

   마치 시간을 가로지르는 목소리처럼 노래는 계속됐다. (본문 중에서)


 

 

   삶과 죽음, 거짓과 진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대립구도를 팀버튼 감독 특유의 환상 기법으로 풀어낸 영화 <빅피쉬>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진실을 찾는 여정에서 아들이 발견한 것은 '꿈의 세계'였다. 늑대인간, 거인친구가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험담을 지긋지긋해하던 아들이 재미없고 시시한 현실에 빛을 더해주는 '꿈'의 귀중함을 알아가는 과정이 감동적이다.

 


  할머니는 확실히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비록 할머니의 하루 일과는 비슷비슷했지만, 할머니는 그 평범한 일상을 동화로 바꾸어 놓을 줄 알았다. (본문 중에서)


 

   <노래하는 눈동자>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빅피쉬>의 허풍쟁이 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평생 고무줄 공장에서 일했던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고무줄은 등장하지 않는다. 북치고 노래하는 멋진 아가씨가 고무줄을 대신하고 있다. 윌리엄과 비올렛은 그 멋진 아가씨에게 환호를 보냈지만, 할머니와 그 멋진 아가씨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땅에 벌을 묻어주면서 윌리엄은 할머니가 남긴 꿈 같은 이야기들과 실제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의 꿈과 실제 삶의 간극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소년은 한 뼘 더 성장한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죽음'은 놀라운 일이다. 미지의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공포와 죽은 이가 남긴 현실의 구멍을 메우는 일까지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야기'는 우리를 위무하고 격려한다. 살아갈 힘, 상처를 회복할 여지를 준다. 동생의 눈동자에서 '노래하는 할머니'를 보았던 것처럼 윌리엄은 살아가는 곳곳에서 할머니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견할 것이다. 이야기의 힘을 느낄 것이다. 숲속 작은 벌의 무덤에 한 줌의 흙을! 흙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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