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의 신인류 호모 나랜스
한혜원 지음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래미안에 산다. '미래지향적이며(來), 아름답고(美), 편안한(安) 아파트'라는 표어를 내세운 주택 브랜드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지도 않다. 여느 다가구주택처럼 방음이 잘 안 되고,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집의 어느 부분에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래미안에 산다. 미래지향적이며 아름답고 편안한 아파트라는 '이미지' 안에 산다. 이미지가 밥 먹여주느냐고? 인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밥만 먹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최근에 읽었던 진화생물학 책에서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짓는 것으로 '음악'을 들고 있었다. 인간의 음악활동에 대해 진화론 입장에서는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음악활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음악 이외에도 인간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은 다양하다. 그중에 하나로 '이야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술수로 활용해 마진율을 높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일 수는 있겠으나 보다 근원적으로 소비자가 물건, 장소, 사람 등을 통해서 그 실체 너머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이다. 즉, 이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이 우선하고 그 갈망이 물건에까지 파급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감성적 교류를 전제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누군가로부터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미래지향적이며 아름답고 편안한' 곳에 삽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반면에 '래미안에 삽니다'라고 하면 아아,하면서 알은체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브랜드 스토리가 노리는 것이며, 이야기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이야기의 시대이다. 밥 먹고 숨을 쉬듯이 우리는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20세기까지 '이야기'는 종이 위에 쓰여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21세기 이야기'는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시간적, 물리적 제약도 없다. 20세기까지 '이야기꾼'은 특정한 사람들의 특권처럼 떠받들여졌지만, 이제 누구나 다양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바로 '이야기하는 인간'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발달은 생활의 안락함 뿐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 욕망을 풀어낼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사진 파일을 공유하고 익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섞을 수 있다. 앞서 얘기한 브랜드 스토리 전략처럼 '이야기'는 상품에 값비싼 이미지를 입히기도 하고, 영상매체나 게임,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 본능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이야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일까. 그것은 진화론적 입장이고, 21세기에서 '이야기'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야기 없이는 이야기가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혜원은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야기 본능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상물이나 게임, 그리고 예술작품에서 광고, 브랜드까지 생활 곳곳에 심어진 이야기를 캐내고 있다. 아울러 이야기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전반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호모 나랜스,라는 다소 낯선 용어와는 달리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를 준다.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판치는 세상. 이야기를 생산하는 동시에 소비하기도 하는 우리에게 '이야기'의 의의를 묻고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