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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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병승의 시는 (...) 열린 경험이며, 감각의 사건이다. 그래서 읽는 일은 희극적인 비애, 냉소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뒤죽박죽'의 체험이다. (해설 : 이광호 "숭고한 뒤죽박죽 캠프")

    동성애적 소재가 무엇일까. 나는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황병승 시인의 이전 시를 모른다.  오히려 그래서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는 동안 나는 편견에서 잠시 벗어나 있지 않았을까. 처음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을 때는 표현방식이 낯설어서 혼란스러워했다. 단지 표현방식만이 낯설었던 것이다. 황병승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보편적이다. 사람살이다. 


    세상은 거대하다. 아버지, 부모님이 '나'를 지켜줄 것처럼 믿었던 시간은 '나'의 몸피가 커지면서 차츰 불신하게 된다. 그들 역시 세상에는 한없이 나약한이라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는 점점 더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돌출구를 스스로 찾는 길밖에 없다.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이상의 시 '오감도'를 만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물론 다르다. 오감도 속에 등장하는 그 아해들과 <트랙과 들판의 별>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인물과 존재, 이국적 대상들과 아해는 동일하지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시 '아빠'에 대해서 이광호 씨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인 데에 중심을 두고 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한 풀이를 기초로 하고 곰곰이, 몇 번을 더 읽어보면 <트랙과 들판의 별>들의 관통하는 무엇을 어렴풋이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 이곳에선 모두 죽었죠/ 믿어서 죽고/ 못 믿어서 죽고// 아빠 하고 부르면/ 우선 배가 고프고/ 아빠 하고 부르면/ 아빠는 없고/ 아빠라는 믿음으로/ 개 돼지를 잡아먹는/ 먼나라의 아빠 숭배자들처럼/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아빠를......// 선생님, / 당신에겐 아빠가 있죠/ 당신의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있어요/ 아빠 좋은 탁자다// 그 위에 올라가/ 타닥 타닥 탭 댄스를 추고/ 노래를 부르고/ 당신의 아이들은 먼 나라의 배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위에서 사랑을 나누죠,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그러한 믿음으로// 등이 배기고 아플 텐데,/ 우리의 아빠는/ 아빠 하고 부르면/ 언제나 울상이고/ 아빠 하고 부르면 / 누가 먼저 먹어 치우지는 않을까,/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선생님,/ 이곳에선 모두 죽였죠/ 밤새도록 들락거리며/ 믿어서 죽이고/ 또 못 믿어서 죽이고.(시 '아빠', p.77)

 

    첫 연에서는 '죽었죠'로 쓰인 것이 마지막 연에서는 '죽였죠'로 바뀌어 있다. '선생님,/ 이곳에선 모두 죽였죠' 누가 무엇을, 누굴 죽인 것일까.  피학살자는 시 '아빠'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이 아닐까. '나'는 불안하다. 아빠, 그 정겨운 느낌이 얻지 못하는 '나'는 불안하다. 이미 '아빠'는 더 이상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대접 해주지 않는 '나'는 또 무엇일까. 불편하다. 불편한 상황이 시편 곳곳에 서려 있다. 

   그리고 시 '아빠'에서 하나 더 눈여겨 볼 것은 '당신의 아이들은 먼 나라 배우들이 그랬던 것처럼'이다.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존재들은 어디어디서 차용해온 것들이다. 왜 흉내내기를 하는 것일까. 전문성을 확보하려면 동양보다는 서양의 것을,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의 길고긴 이름을 인용해오듯이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트랙과 들판의 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서른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 불안에 떠는 광대처럼/(딸꾹, 딸꾹거리며)//(...) 흙 속에 처박힌 열두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사산된 두 마음' 가운데서, p108)

 

   시 '사산된 두 마음'에서 '악마'와 '나'는 동일인이다. 이와 같은 분열 양상은 시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였다'에서도 드러난다. 


기침 끝없는 기침처럼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p. 17)

 

   그리고 끝없이 주문 '문친킨'을 외우는 '나'(시 '문친킨' p.168), 구태여 '미러볼'에 집착하는 '나'(시 '미러볼', p.145),  혼란 속에서 끝없이 중얼거리고 몽환적인 상태로 심중을 드러내는 많은 시편들에서 세계에 맞닥뜨린 '나'의 혼란과 그에 대처하는 한 양상을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열심히 트랙을 돌다 들판에 처박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쓸모없는 별처럼 미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시 '트랙과 들판의 별' 가운데서)

 

    절망적인 세계, 상황을 아주 친절하면서도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은 '안 무섭다, 안 무섭다' 하며 도망가는 '오감도'의 아해들과 동일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듯 보여진다. 과연 '미래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을까. 불편한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개인적인 관점으로 읽은 <트랙과 들판의 별>은 몇 차례 읽은 뒤에야 비로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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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11-0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이상을 떠올렸더랬는데요,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결국 나도 그의 시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는 어차피 서로 같은 듯 이질적이니까요.
서평이 좋으네요. 반갑습니다.

환상의시기 2007-11-0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 감사합니다. 저도 읽으면서 이상의 '오감도'를 몇 번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감상을 했다는 데에 정말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