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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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보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 보이는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눈은 다른 눈과 결합한다.

 

                                              

                                                                       ㅡ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어머니 손을 잡고 읍내 장터에 나가면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나왔나 싶을 정도로 북적였다. 장날을 기다려 그간 수확한 농작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사람, 손때 묻은 돈을 들고 장터 구경을 나온 사람, 그들을 따라나선 아이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머니 옷깃을 꽉 쥐고 있으면 손에는 땀이 배어나왔다. 그때 내 키는 어머니 허리에 겨우 미치는 꼬맹이였다. 설탕옷 입은 뜨거운 핫도그를 베어먹으면서 내 눈은 여기저기 머물렀다. 그러다 내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목을 쳐들지 않으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른들 틈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고무 다리를 끌며 길바닥을 누비는 사람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몹시 놀랐다는 것만 기억한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쳐다봤던 것 같다. 그는 시선을 땅에 두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다리가 없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다만 구걸을 위해 다리 없는 사람 시늉을 한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들었다. 나는 경악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들이 불쌍했다. 멀쩡한 두 다리를 그런 식으로 욕보이다니. 정말로 병신 같았다.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감추던 벌레같은 굽은 등이 눈에 선하다.

 

 

   서두를 조금 불편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소개하려는 사람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유쾌하며 열정적인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케빈 마이클 코널리'는 스물다섯의 청년이다. 두 다리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 좌우 상칭 무지증이라고 한다. 처음 그의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와 팔이 있지만 마치 토르소처럼 허리만 댕강 남은 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케빈은 어릴 때부터 놀라움 담긴 시선을 받아왔다. 그를 향한 시선에 담긴 감정은 대부분 경악과 연민, 호기심, 공포였다.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케빈은 세상의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을 익혔다. 그런 긍정적인 마음 자세가 없었더라면 케빈은 집 밖에도 못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랍게도, 그는 다리 있는 사람들도 하기 힘든 레슬링이나 스키를 즐기고 <x게임>에 출전해 입상까지 한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삶의 전환점이 있다. 난생 처음 스스로 번 돈을 쥔 케빈은 여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역시 난생 처음 가족의 도움이 미치지 않는 세계에 홀로 자신을 던진다. 낡고 냄새나는 스케이트보드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더 넓은 세상 속으로 향했던 그 시점이 케빈의 삶에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자신을 잘 알고 아껴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작고 안전한 울타리를 떠난 케빈은 불편하고 불쾌한 시선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단지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동정의 시선을 던지고, 시선만으로도 모자라 돈까지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케빈은 상처를 받는다. 아무리 시야가 넓고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결국 자기 세계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 눈에 비친 두 다리 없는 작은 몸뚱이를 받아들이는 그들 마음까지는 케빈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국의 붐비는 거리에서 케빈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에게 꽂히는 무수한 시선들을 피하기만 했던 케빈이 생각해낸 그 방식은 이렇다. 자신도 그들의 반응을 포착하고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카메라를 이용해 그들의 시선을 포착하고 수집하면서 자신과 세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는 케빈이 포착한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이 담겨 있다. 그리고 케빈이 그들 시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솔직하고 유쾌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다시 그 어린 시절 장터로 돌아가서, 병신 시늉하던 고무다리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는 왜 시선을 땅에 박고 있었을까. 눈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는 붐비는 그 장터에서 왜 그는 굽은 등과 푹 숙인 고개 아래로 시선을 감추고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문득 그 고무다리 아저씨를 생각했다. 맨땅에 헤딩하던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세상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검은 고무 아래 감춰진 두 다리, 멀쩡한 두 다리가 있음에도 자신이 병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 물론 이것은 나의 시선이고 나의 생각일 뿐 실제로 그 사람이 왜 맨땅에 헤딩하듯 고개를 땅에 처박고 눈을 내리깔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케빈이 포착한 사람들의 시선에 내 시선을 포개면서 나 또한 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나 반성을 하게 되었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그런 편협한 시선을 던졌고, 던질 것이라는 사실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이 다양한 세계,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를 포용하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케빈의 삶,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포착해낸 다양한 시선들은 많은 생각을 던져 준다. 래서,

 

 

빈, 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네 눈에 비친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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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발견
오정희.곽재구.고재종.이정록 지음 / 좋은생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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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 발견(오정희/곽재구/고재종/이정록)

 

 




연초록빛 바다는 이색적이다. 등대 두 개가 있다. 하얀색과 붉은색, 등대를 초록의 바닷물이 거리를 만들어 두었다. 더 멀리 아득한 산이 보이는데, 이런 책표지는 ‘그리움’을 마치 환상처럼 표현하고 있다. 감상적이라는 말은 때때로 비현실적이라는 뜻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래서 감상적이라는 말이 때때로 부정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과 잇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립다는 것이 비경제적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故 박경리 선생은 오정희 씨가 오랫동안 작품을 하지 않는 데 대하여 탄한 적이 있다. 오정희 씨의 작품은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습작기 동안 가까이 두고 읽는, 필사의 대상으로 쓰인다고 밝히고 있다. 글 읽기를 즐기지 않았던 나에게 오정희 씨의 작품은 주변인들의 감상으로만 남아 있다. 좋다는, 글을 굉장히 잘 쓰는 작가로 알고 있다. 故 김소진 씨가 오정희 씨의 작품을 필사했다는 말을 기억한다. 그러한 오정희 씨의 수필이 ‘그리움의 발견’의 전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움의 발견’에는 다양한 사진 작품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보통은 글이 중심을 이루면 사진이 부차적으로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리움의 발견은 사진이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읽어감에 따라 더 실감하게 된다. 유명작가들의 글, 산문의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색다른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줄글의 의미를 방해하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화제를 표현하고 있는 사진은 애석하게도 누가 찍었는지 명쾌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좋은생각 사진실이라는, 책 말미에 ‘잘못된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꿔 드립니다. 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와 함께 기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서점에서 교환받아야 할까, 문득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시부저기 웃고 만다. 사진만을 도려내어 다시 엮더라도 참으로 좋은 책이 될 만하다.






두 번째 작품들은 곽재구 씨, 시인의 글이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고재종, 이정록 씨의 시들도 참 읽기 좋고, 그들의 작품에 좋은 경험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곽재구 씨의 산문은 양념(수식)이 적어 산뜻하다. ‘그리움의 발견’에서도 곽재구 씨의 글은 정갈하다. 1995년 가을 구소련을 여행하면서 시인이 경험한 책방에서의 일이 인상 깊었다. 이유야 여럿이겠다. 헌책방을 즐기는, 어디 여행지를 선정할 때 먼저 헌책방이 있는지, 그 위치부터 파악하고 짐을 꾸리는 젊은 날의 버릇이 여전해서 그런지 나는 시인의 시선이 마치 내가 거기 그 자리를 지키고 섰는 듯한 착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움은 지금 여기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이 그리운가. 그리울 것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기억 저편을 부유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현재에서의 결핍, 공복감이 어쩌면 기억을 자극해 그리움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움의 발견’을 덮으면서, 내 손에서는 인화된 사진 여러 장이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 사진을 내려다본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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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살 Zero 다이어트 - 사이토 미에코의 지압과 스트레칭으로 끝내는 4weeks plan 미에코 다이어트 시리즈
사이토 미에코 지음, 김민정 옮김 / 보누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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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lly Diet(지압과 스트레칭으로 끝내는)/ 사이토 미에코․김민정/ 보누스 ‘




* 여배우와 모델을 비롯해 2만여 명 이상의 고민을 해결한 일본의 독보적인 “하체” 전문가.


 

 





‘비너스의 탄생’(보티첼리 作)이나 신윤복의 ‘미인도’는 대상체의 생김이나 표현법을 제외하고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균형’이다. 현대에도 다이어트는 단순히 체중감량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해서 죽어나가는 유럽의 여자 모델의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혀를 차며 목숨까지 내놓고 밥을 거부하냐, 비난 일색이다. 그러면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조작하면서 누구는 몸매가 좋고, 누구는 왜 저렇게까지 관리를 안했나, 살찐 거 봐라 하면서 비난이다. 한입에 두 말하는 일은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다. 이러한 습성은 오래오래 끈질기게 전수될 것이 분명하다.


 

앞서 말한 비너스나 우리나라의 미인도를 살펴보면서 ‘균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밸리 다이어트’ 역시 균형잡힌 몸매를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을 소개하고 있다. 자세법 등을 사진을 먼저 제시하고 있어서 글 읽어나가기가 수월한 점이 좋다. 글쓴이는 앞서 ‘다리 다이어트’와 ‘엉덩이 up 다이어트’로 호평을 받은 경험을 머리글에 남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글쓴이 소개에서도 일본 국적인 저자의 평가를 상당히 높게 두고 있다. 먼저 뱃살과 허리선을 뚜렷하게 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고, 이는 먼저 자기 평가를 제시하고 있어서 실천 방법으로는 상당히 편리한 쪽에 속한다. 허리, 배꼽 아래, 엉덩이 맨 위, 대전자, 엉덩이 맨 아래를 실제 치수로 확인하고 먼저 기록하는 부분은 이후 이 책을 성실히 따른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으로 뚜렷한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체중 조절(다이어트)는 현재 건강관리라는 의미로 재명명되고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선호한다. 이는 균형을 건강과 동의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미인의 조건은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혹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균형미가 필수적이다. 외현적인 아름다움과 공격적인 다이어트로 변형된 체형보다는 인체 내의 장기, 건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밸리 다이어트’는 그 구성에 있어서 먼저 신뢰가 간다.






완벽한 체형, 아름다움은 ‘내가 어떤 사람을 꿈꾸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먼저 왜, 어떤 이유에서 나는 미인을 형상화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나를 이해하는 유쾌한 한 방편일 것이다. 그리고 왜 구태여 그러한 틀에 내 몸을 맞추고 싶어하고, 때때로, 너무 자주 우리는 좌절하지만 그러한 절망감을 겪게 되는 이유를 살피는 것도 좋은 법하다.






새로운 미인도, 비너스의 제작은 오로지 내 손에 달려 있다. 세상은 상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내 생각, 나의 습성은 상상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큰 축복이다.






잡설이지만 이 책의 모델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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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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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평화로운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알리스는 남편(쥘)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소파에 앉아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은 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남편의 죽음, 갑작스러운 이별을 마주하고 알리스는 담담하다. 여느 날처럼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샤워를 하면서도 알리스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소파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 듯한 평온한 남편의 모습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창 너머에는 눈이 내리고, 부지런한 누군가 눈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알리스는 쥘이 매일 아침 읽던 신문을 들여온다. 그리고 쥘 옆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차갑게 식어가는 쥘에게 말을 건다. <쥘과의 하루>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여자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쥘을 향한 알리스의 말, 허공을 치는 혼잣말은 시간(時間)을, 쥘의 죽음을 유예시키고 있다.

 

   <쥘과의 하루>라는 제목에도 드러나듯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심 모티브는 '시간'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알리스의 익숙한 일상은 덜커덕, 급제동이 걸린다. 홀로 남편의 죽음을 독차지하고 앉아 그에 대한 증오와 사랑을 털어놓는 알리스의 모습에는 익숙한 시간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과 시간을 붙들고 있는 자의 힘이 교차한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한. 그는 살아 있다. 그녀가 원하는 한. 아직 그에게 못 다한 말이 너무 많았다. 하루가 지나는 동안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25쪽)


    

   알리스의 독백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아우르는데, 그의 독백, 정체된 알리스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익숙한 일상을 깨워주는 것이 이웃집 소년 다비드이다. 소년은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쥘과 바둑을 두었다. 자폐증을 가진 이 소년은 어김없이 10시가 되면 바둑을 두러 온다. 삶과 죽음, 일상과 비일상이 뒤죽박죽 된 알리스의 시간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다비드가 하고 있다.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 소년의 정확한 시간관념은 알리스를 '밤', 자야 하는 시간에 데려놓는다. 알리스는 잠이 든다. <쥘과의 하루>는 알리스가 깨어난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을 그리고 있다.   

 

   로랑 모비니에의 <이별 연습>이라는 소설이 있다. 정부(情婦)와 동행 중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향해 혼잣말을 하는 청소부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쥘과의 하루>를 읽으면서 나는 자꾸 <이별 연습>이 떠올랐다. 알리스나 <이별 연습>의 청소부 아내에게 '혼잣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남편을 향한 것이기보다는 시간이 축적한 모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치열한 몸부림 같은 것은 아니었나. 다시 살아가기 위한 그 몸짓은 그러므로 숭고하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지겠죠. 그래도 살아 있는 당신보다 죽은 당신을 떼어버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쉽네요. 당신이 피와 살로 된 여자의 수중에서, 내 삶에서 떠나는 걸 보느니 차라리 환히 빛나는 천사의 손에서 사라지는 게 더 나아요." (66쪽)

 



   가장 익숙했던 무엇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누구든 그동안의 '시간'이 붕괴되는 경험을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키고 '나'의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알리스는 그 위기를 독백이라는 형식으로 극복하고 있다. 일상에 뚫린 크고 검은 구멍을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말로 메우고 있는 그녀의 이별 연습을 지켜 보는 내내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알리스의 하루는 우리가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시간이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울림이 깊은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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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야생중독
이종렬 지음 / 글로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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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표지에 실린 사자 얼굴이 무섭다고 했지만, 나는 그 눈빛에서 야생에서 살아가는 어려움과 '맹수의 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 숨은 쓸쓸함을 보았다. 분명 수사자일 것이었다. 책의 시작을 여는 것은 당연히 '맹수의 왕' 사자인데, 그들의 삶은 '왕'이라는 이름만큼 위엄 있고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사자의 말로가 그렇다. 힘이 있을 때에는 암사자들에게 먹이를 얻어 먹으며 그나마 위엄을 지키지만, 힘이 없거나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면 암사자들에게 쫓겨나 초원을 떠돌다 굶어 죽거나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된다는 수사자의 운명은 우리의 늙은 아버지들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한 면에 크게 실린 수사자의 슬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담배 연기 짙게 밴 긴 한숨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린 치타나 어린 누, 어린 하이에나 같은 동물의 새끼들은 우리 짐승(愛犬)을 닮았다. 가만 보면 순진한 눈동자나 까맣고 축축한 코, 보들보들한 털 같은 것들이 꼭 닮아 있다. 세상 모든 어린 것들은 깨끗하고 귀엽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짐승이라 새끼든 어미든 그 기세가 맹렬하고 냉혹하다. 어미 치타는 새끼 치타를 위해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새끼 톰슨가젤을 사낭해서, 바로 물어죽이지 않고 뒷다리를 물어 다치게 한 뒤 자기 새끼에게 사냥교육을 시킨다.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치타의 사냥감이 되어 달아나는 새끼 톰슨가젤의 몸부림은 애처롭다. 새끼 톰슨가젤이 치타의 사냥감이 되어 죽어가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어미 톰슨가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을 뜯어먹는다. 이종렬 씨는 이 모습을 보면서 초원에서 가장 연약하고 순한 톰슨가젤에게 빠른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일 것이라고 쓴다. 정말 잊었을까. 죽어가는 어린 톰슨가젤의 크고 놀란 눈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맥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풀을 뜯는 어미 톰슨가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나는 정말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가 야생에 간다면, 세렝게티 초원에 가서 그 모습을 본다면 나는 또 무슨 생각을 할까. TV로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사진과 짧고 강렬한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TV 다큐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세렝게티(Serengeit)' 초원은 탄자니아에 속해 있다. 정식 명칭으로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전체 면적 1만 4763km² 이고, 우리나라 경상북도 넓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생 다큐멘터리 연출가이자 야생사진가 이종렬 씨는 아프리카의 야생에 반해 가족과 함께 탄자니아에 산다.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아프리카 대초원의 야생을 렌즈에 담고 있다. <아프리카 야생중독>은 그 성과물 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책으로 만나는 <동물의 왕국>인 셈이며, 우리가 모르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탄자니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벗어나면 현지인이 사는 마을이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던 대부분의 마을이 관광지가 되었고, 순진했던 사람들도 얍삽해지고 있다. 그 얍삽함은 그러나 눈에 훤히 보이는 정도여서 내가 보기엔 오히려 순진함의 증표처럼 보였다. 마사이족 추장이 말한 아프리카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말을 여기 옮겨 본다.

 


  "아프리카의 시간은 사사와 자마니입니다. 자마니는 현재 이전까지 내가 겪은 시간이고, 사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길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겁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을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시간에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렝게티 초원의 석양을 등지고 돌아와 낡은 침대에 홀로 누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종렬 씨는 아프리카 대평원을 일컬어 "모두가 그리운 사람이 되는 땅'이라고 했다. 빨갛게 타는 하늘 아래 바오밥 나무 하나만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의 말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풍경은 그 자체로 시(詩 혹은 時)였다. 언젠가 보았던 진화심리학 책에서는 세렝게티 초원을 인류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곳의 풍경 사진들은 형언할 수 없는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킨다. 야생은 냉혹하나 또한 아름답다. 저 빨간 구름떼들과 소시지 나무 아래서라면 하이에나가 죽지도 않은 사냥감을 찢어먹는 모습도 평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르지. 실제로 내가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아프리카가 좋아져서, 아프리카에 중독되어서, 온 가족을 다 데리고 아프리카까지 와서 살고 있지만, 내겐 한국에서 보았던 아프리카보다 아프리카에서 보는 아프리카가 여전히 더 낯설다."라고 이종렬 씨는 쓰고 있다. 그와는 다른 입장이지만, 어쨌든 나도 아프리카인들의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부근이라 그들 역시 야생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상상한 그곳은 문명에 물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명 원시적인 전통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점점 문명 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듯 보였다. 문명인이라는 자들이 아름다운 야생의 숲에 열기구를 띄우고 그 '문명인다운'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그들의 아름다운 전통과 야생이 잘 지켜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기, 정신적 고향을 마음에 품은 굶주린 짐승이 야생의 아름다움을 실컷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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