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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야생중독
이종렬 지음 / 글로연 / 2010년 6월
평점 :
어떤 사람은 표지에 실린 사자 얼굴이 무섭다고 했지만, 나는 그 눈빛에서 야생에서 살아가는 어려움과 '맹수의 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 숨은 쓸쓸함을 보았다. 분명 수사자일 것이었다. 책의 시작을 여는 것은 당연히 '맹수의 왕' 사자인데, 그들의 삶은 '왕'이라는 이름만큼 위엄 있고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사자의 말로가 그렇다. 힘이 있을 때에는 암사자들에게 먹이를 얻어 먹으며 그나마 위엄을 지키지만, 힘이 없거나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면 암사자들에게 쫓겨나 초원을 떠돌다 굶어 죽거나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된다는 수사자의 운명은 우리의 늙은 아버지들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한 면에 크게 실린 수사자의 슬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담배 연기 짙게 밴 긴 한숨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린 치타나 어린 누, 어린 하이에나 같은 동물의 새끼들은 우리 짐승(愛犬)을 닮았다. 가만 보면 순진한 눈동자나 까맣고 축축한 코, 보들보들한 털 같은 것들이 꼭 닮아 있다. 세상 모든 어린 것들은 깨끗하고 귀엽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짐승이라 새끼든 어미든 그 기세가 맹렬하고 냉혹하다. 어미 치타는 새끼 치타를 위해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새끼 톰슨가젤을 사낭해서, 바로 물어죽이지 않고 뒷다리를 물어 다치게 한 뒤 자기 새끼에게 사냥교육을 시킨다.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치타의 사냥감이 되어 달아나는 새끼 톰슨가젤의 몸부림은 애처롭다. 새끼 톰슨가젤이 치타의 사냥감이 되어 죽어가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어미 톰슨가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을 뜯어먹는다. 이종렬 씨는 이 모습을 보면서 초원에서 가장 연약하고 순한 톰슨가젤에게 빠른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일 것이라고 쓴다. 정말 잊었을까. 죽어가는 어린 톰슨가젤의 크고 놀란 눈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맥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풀을 뜯는 어미 톰슨가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나는 정말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가 야생에 간다면, 세렝게티 초원에 가서 그 모습을 본다면 나는 또 무슨 생각을 할까. TV로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사진과 짧고 강렬한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TV 다큐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세렝게티(Serengeit)' 초원은 탄자니아에 속해 있다. 정식 명칭으로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전체 면적 1만 4763km² 이고, 우리나라 경상북도 넓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생 다큐멘터리 연출가이자 야생사진가 이종렬 씨는 아프리카의 야생에 반해 가족과 함께 탄자니아에 산다.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아프리카 대초원의 야생을 렌즈에 담고 있다. <아프리카 야생중독>은 그 성과물 중 하나로 보면 되겠다. 책으로 만나는 <동물의 왕국>인 셈이며, 우리가 모르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탄자니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벗어나면 현지인이 사는 마을이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던 대부분의 마을이 관광지가 되었고, 순진했던 사람들도 얍삽해지고 있다. 그 얍삽함은 그러나 눈에 훤히 보이는 정도여서 내가 보기엔 오히려 순진함의 증표처럼 보였다. 마사이족 추장이 말한 아프리카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말을 여기 옮겨 본다.
"아프리카의 시간은 사사와 자마니입니다. 자마니는 현재 이전까지 내가 겪은 시간이고, 사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길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겁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을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시간에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렝게티 초원의 석양을 등지고 돌아와 낡은 침대에 홀로 누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종렬 씨는 아프리카 대평원을 일컬어 "모두가 그리운 사람이 되는 땅'이라고 했다. 빨갛게 타는 하늘 아래 바오밥 나무 하나만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의 말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풍경은 그 자체로 시(詩 혹은 時)였다. 언젠가 보았던 진화심리학 책에서는 세렝게티 초원을 인류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곳의 풍경 사진들은 형언할 수 없는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킨다. 야생은 냉혹하나 또한 아름답다. 저 빨간 구름떼들과 소시지 나무 아래서라면 하이에나가 죽지도 않은 사냥감을 찢어먹는 모습도 평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르지. 실제로 내가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아프리카가 좋아져서, 아프리카에 중독되어서, 온 가족을 다 데리고 아프리카까지 와서 살고 있지만, 내겐 한국에서 보았던 아프리카보다 아프리카에서 보는 아프리카가 여전히 더 낯설다."라고 이종렬 씨는 쓰고 있다. 그와는 다른 입장이지만, 어쨌든 나도 아프리카인들의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부근이라 그들 역시 야생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상상한 그곳은 문명에 물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명 원시적인 전통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점점 문명 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듯 보였다. 문명인이라는 자들이 아름다운 야생의 숲에 열기구를 띄우고 그 '문명인다운'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그들의 아름다운 전통과 야생이 잘 지켜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기, 정신적 고향을 마음에 품은 굶주린 짐승이 야생의 아름다움을 실컷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