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여행, 나쁜 여행, 이상한 여행 - 론리플래닛 여행 에세이
돈 조지 지음, 이병렬 옮김 / 컬처그라퍼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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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길 따라 마음 따라 무작정 걷기를 좋아한다. 걸으면서 알았다. 비슷비슷한 풍경이라도 제각각의 멋과 맛이 있다는 것. 마음을 열고 눈을 뜬 자에게만 그것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이다. 집 주변 들판을 산책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새로운 풍경과 만날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 마음을 조금만 달리 하면 언제 어디서든 색다른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은 장소보다는 여행하는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긴 휴가를 얻는다고도 한다. 물론 미리 마음에 두고 있는 여행지가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런데 여행지가 정해져 있는 경우 유의할 것이 하나 있다. 미리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말 것.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유명 여행지라도 내 식대로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면, 전혀 색다른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난관이나 즐거움, 사람들과의 만남이 진짜 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내 생애 가장 좋은 여행은 스무 살 되던 해에 떠난 자전거 여행이었다. 때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볕 아래 길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 화인(火印)을 찍기라도 하듯 나는 그 뜨거운 길에 내 청춘을 새겨넣었다. 길은 끝이 없었고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뜩해지기까지 할 정도. 그런데 그때 나는 힘들다는 생각을 안했다. 가슴 한가득 무언가 꽉 차 있는데, 그것들이 바람 따라 하나씩 풀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살면서 완전한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들 중 하나로 나는 그 해 여름의 여행을 꼽고 싶다. 동시에 그것은 이상한 여행으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 그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어서, 실제로 내가 그 망망한 길 위에 있었던 것인지 가끔은 의심스럽게 생각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여행은 청춘의 열정이라면 열정이지만, 미련하다면 미련했다. 그 여름에? 거기를? 뭐? 자전거로? 주변에서 한결같이 이런 반응들을 보였지만, 역시 나에게는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어떤 여행이라도 잊지 못할 기억 한두 개쯤은 남게 마련이다. <좋은 여행 나쁜 여행 이상한 여행>에는 여행작가 31인의 각색각양 여행담이 담겨 있다. 다양한 여행기를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재미있고 매력적인 여행담은 처음이다. 여행의 우발적 성격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구불구불한 죽음의 길을 달려 도착한 인도 히말라야의 작은 마을 카자에서 유서 깊은 사원이나 불교유적, 하다 못해 독실한 불교신도들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롤프 포츠가 거기 묵는 동안 했던 유일한 일은 미국 포르노를 보는 일이었다. “서양인들은 다 저렇게 해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는 주민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며칠 간격으로 온다는 버스에 올라탄 그는 “깨달음 비슷한 걸” 얻긴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여행하기 전에 여행지에 대해 섣부른 기대를 하지 말 것. 아마 그는 이 귀중한 진실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담은 에드윈 터커의 이야기이다. 에드윈 터커는 자전거 여행 중 티베트 남서부 고원지대를 지나다 양 치는 원주민과 마주치게 된다. 그에게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한 마지막 펜 한 자루가 있었다. 모두 선물하고 남은 그 마지막 한 자루를 그는 여행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티베트의 원주민이 그 펜을 탐 내었다. 인사부터가 “헬로우, 펜!”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줄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여행의 귀중한 기념품으로 가져갈 것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원주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의 양과 펜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에드윈은 설마,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원주민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해서 양과 펜을 맞바꾸게 되었지만, 자전거를 몰고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진 그가 양을 데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해서 양도 잃고 펜도 잃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언뜻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 같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헬로우, 펜!” 하고 다가오는 원주민과 언제 어디서 마주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내 기억에서 가장 나쁜 여행은 중학교 때 수학여행이다. 시간표대로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시간 동안 눈도장만 찍는 일이 참 지루하고 시시했다. 그때 찍은 사진 몇 장, 거기 서 있는 나는 무척 피곤해 보인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나, 새삼 놀라울 정도이다. 누구나 저마다 꿈꾸는 ‘좋은 여행’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꿈과 현실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그래서 삶은 더욱 매력적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도 지나고 보면 넉넉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 책에는 흔히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여행담이 가득하다.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준비됐어요?”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아뇨, 하지만 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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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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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창 소설을 즐겨 읽던 때가 90년대 중반이었다. 무턱대고 넉넉한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는 혼자만의 착각으로, 어쨌든 한때 나는 즐겁지만 아주 힘겹게 소설 읽기에 열중했었다. 그 당시 여성주의 소설과 작가(?) 소설이 범람했던 터라 유행을 타고 열심히 소설 읽기에 매진(?)했다. 그러나 곧 80년대 소설로 눈을 돌렸고, 이내 6, 70년대 소설로 귀향하고 말았다. 왜였을까?  2010년 나는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요즘 나는 시간이 많다. 그러나 여유는, 예전 소설 읽던 때만큼의 여유는 장담할 수 없다. 이제 30대 중반에 다다랐고, 또한 겨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0년에 만난 소설 <라이팅 클럽>은, 90년대에 내가 한창 읽어대던 그 소설과 비슷한 맥락을 띄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향수를 느꼈을까. 아니면 낯설지 않은 소재에서 비롯되는 음침한 지루함을 느꼈을까?

 

  <라이팅 클럽>에는 '지루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몇 가지 이유를 먼저 들어야겠다.

 

2.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이름 대신 "딸", 혹은 "아들"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곧잘 듣는다. 뭔가 이상하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칭으로 이름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생경했던 모양이다. <라이팅 클럽>에서 화자인 '나'는 어미를 '김 작가'로 부른다. 작가라는 칭호에는 일면 존경이 있을 수도 있지만, 딸 아이가 어미를 '작가'로 부르는 데에는 다분히 비아냥이 섞여 있다. '여사'가 아닌 '작가', 여기서 우리는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의 골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딸도, 어미와 같이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 일면 글쓰기가 가식과 허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모녀의 삶은, 어쩌면 삶이 아닌, 글쓰기를 위한 맹목으로써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글이 먼저인지, 삶이 먼저인지. 여전히 명확히 답을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맥주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글을 써놓고는(노동일기) 생각보다 짧고 재미가 없다는 것으로 자평하고 마는 딸의 심리는 가엾기까지 하다.

 

  모녀는 서로 닮아 있다. 삶이 아닌 글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 그러나 처연함이 생략된 열정이 갖는 허술함에 때때로 독자는 시니컬해지고 만다. 그들의 모습에서 정열을 잃고 허술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또는 급하거나 중요한 일에 소홀히 하고 마는 삶의 태도를 다시금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라이팅 클럽>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반성하게 도와준다.

 

  <라이팅 클럽>은 두 모녀의 삶을 걷어내면, 딸 아이(영인)의 성장기를 나타내는 '성장소설'로 읽힐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다. 딸 아이의 입을 통해서 소설은 전개되고, 세상을 조망하고 있다. 이니셜로 표기되는 일부는 혹시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해본다. 혹시 그때 그 양반이(?) 하는 상상을.

 

  성장소설은 새로운 경험을 제시해 줄 때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힌다. <라이팅 클럽>에서 영인이 서른이 넘어 미국행을 하게 되는 것이나, 그 어미의 병환에 <돈키호테>를 읽어주는 장면은 예상치 못한 장면이기 때문에 소설 읽기에 박차를 가한다. 전반적으로 단문을 즐겨 쓰고 있는 글쓴이의 문체가 무미건조해 보이는 영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3.

 

  '라이팅 클럽'이 있을 법한 '계동', 김 작가는 딸 아이에게 무심했고, 딸 영인은 어미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무던히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비록 그것이 땅을 떠 허공에서 부유하는 공허함이었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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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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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리의 법칙>.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 두 개를 사용하고 있다. 거리, 그리고 법칙. 나는 이 두 단어에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 책 <거리의 법칙>을 읽는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청춘에 즐겨 읽던 소설이 이제는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별난 일이다. 책장을 넘기며 주인물이나 주변인에 매료되어 때때로 동일시를 경험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청춘은 아주 멀어져 버렸다는 것 말고도 또다른 분명한 이유는 이제는 이야기보다 삶이 더 기괴하다는 것을 체험했고 또 하루하루 그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소설은 더 이상 삶보다 자극적이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

 

 

2.

<거리의 법칙>은 적어도 내게는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참 오랜 만에 느껴보는, 별난 소설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소설로 명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나는 이 이름이 좋다. 뼈다귀해장국이 연상되는, 채피의 팔죽지에 새겨진 문신에서 따온 이름, 뼈다귀)의 삶이 보통이라 일컫는 평균치의 사람들에게는 사실 경험하기 힘든, 별난 일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 추위에 조금만 더 골목을 들어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바로 본이라는 사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이 경험하는 세상, 즉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일부는 히피족이나 아동 포르노 제작자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또 일부는 아이맨처럼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기도 하며, 또 일부는 가족이라는 허울 아래에 지극한 무관심으로 본과의 경계를 유지하고 있다.

 

3.

 

<거리의 법칙>에서 '본'은 몇 개의 성장점을 지니고 있다. 로즈를 만나는 순간, 그리고 아이맨을 스쿨버스에서 만나는 순간이 특별히 인상 깊다. 이 두 사람과의 '본'은 이기에서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이고, 행동한다.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러나 인위가 아닌 자연으로 남과 어울릴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사람과의 본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들 속에서 보인 '본'의 모습은 참으로 '자유'였다.

 

양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그들 속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본'이 경험하지 못한 삶의 진정성을 '본'은 거리에서 경험한다. 우연이라 할까. 그렇지 않다. 본이 경험한 로즈와 아이맨은 그 자신이 얻어낸 참 자유였다.

 

<거리의 법칙> 중반부에 양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린 채피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본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비로소 이 소설의 전반부가, 채피의 불량한 행동이 어디서 기인했는지가 명확해진다. 나쁜 행동을 하는 채피는, 본은 선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희망을 갖게 하는 배려를 작가는 농밀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서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4.

 

여태 살면서, 기억나는 사람이, '존경'이라는 이름에 오버 랩되는 얼굴이 있는가. 있을까.

 

삶은, 처한 환경이 아닌 어떤 대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진정한 주인공을 결정짓는다. 피동적이었던 삶에서 '본'은 신선한 자극을 나에게 선사하였다. <거리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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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천사들
에이나르 마우르 그뷔드뮌손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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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가 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신 앞에서 평등해.

 우리는 천사들이라고. 우주의 천사들. 

 

   (책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는 변함이 없다. 2010년 8월 23일자 연합기독뉴스에서는 '자해 또는 타해의 위험성'이 없음에도 강제입원이나 수용된 자들을 구제하는 '인신보호법(법률 제8724호)'이 2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널리 홍보가 되지 않아 이용하는 건수가 많지 않다는 소식을 전한다. 여전히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부당하고 불법적인 처우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나 범법행위는 보도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자들을 바깥으로 내쫓고 문을 닫아버린다. 닫는 것으로 모자라 무거운 자물쇠를 채워 가둔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그들의 평생 감옥이 된다. 정신을 흐리는 독한 약과 고된 노동으로 삶을 보내야 한다. 어쩌다 병세가 호전되어 사회로 돌아와도 편견과 불신의 벽 앞에 부딪히는 것이 이들, 정신질환자들의 현실이다.

 



   러나 이 얘기는 거짓말도 윤색도 아니었다. 라그나르 삼촌이 클레프 정신병원의 남자 간호사 자리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왜 해고된 거예요?"

   "내가 어떤 환자한테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한 조각 줬거든."

   "그건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없잖아요."

   "아니, 되더라고. 의사들은 내가 병원 음식을 낭비하는 몹쓸 짓을 한 거라고 하더군."

  

     ㅡ (책속에서)

 

 

   아이슬란드의 작가 그뷔드뮌손(Einar Mar Gudmundsson)은 본 작품 <버림받은 천사들>에서 정신병을 앓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 '파우들'을 통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대 속에서 고독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정신질환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는 팔랑거리며 풀밭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도로를 따라 굴러가는 매혹적인 자전거들을, 밤의 고요 속에 잠긴 우주를 떠올렸지만 그 밝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는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 밖에서는 날개 달린 시간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 펄쩍 뛴다. 행복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자전거들이 굴러가고 나비들이 팔랑거리지만 나는 아이들 소리도 자전거 소리도 새들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밝게 빛나고 있지만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으므로. 

 

  ㅡ  (책속에서)

 

 


    정신병을 앓다 자살한 '파우들'의 영혼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파우들'은 1949년 3월 30일, 아이슬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에 가입한 날 태어난다. 눈앞을 흐리는 최루탄 가스와 성난 사람들의 외침. 그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고였을까. '파우들'은 성장하면서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망상을 즐기게 된다. 그 누구도 정신병의 전조증상을 눈치채지 못했던 어느 날, 감정이 폭발한 '파우들'은 맨발로 집을 뛰쳐나온다. 그로부터 사회와 격리된 '파우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베를린 장벽 붕괴가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거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저 벽은 무너질 수 있지만 나와 세상 사이의 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겠지. 맨눈으로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그 벽은 갈라진 틈 하나 없이 견고하게 서 있으니까.' 

 

 ㅡ (책속에서)


 

   "바닷가에 거대한 궁전처럼 서 있는" 클레프 정신병원에 수용된 '파우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파우들'에게 있어 세계는 두 개로 분리된다. 정신병원 안과 밖. 그러나 '파우들'과 그의 친구들은 두 세계 어디에도 온전히 설 수 없다. 어디에도 디딜 '땅'이 없는 이들에게 의사는 독한 약을 처방한다. 독한 약기운은 서 있지 못하는 자들을 구름처럼 붕 뜨게 만든다. '파우들'과 그 친구들은 자신을 '그림자'라고 느낀다. '파우들'의 태어남과 혼란스러운 성장기가 지나면, 그러니까 클레프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후부터는 뚜렷한 줄거리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파우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앓는 그의 친구들이 병원과 사회에서 겪어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파우들'의 감상으로 채워진다. 정신병을 앓는 주인공이 화자라는 특성 때문에 문장 표현방식은 추상적인 면이 많다. 그뷔드뮌손은 정신질환자의 감정이나 느낌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해 낸다.

 


   은 춥다. 가끔가다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을 때가 있다. 가끔가다 차가운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누워서 몸을 떨 때가 있다. 볼드윈 왕의 말이 맞았다. 나는 내 천사들을 잘 돌봐주지 않았다. 지상으로 추락한 지 오래된 내 천사들은 날개가 꺾인 채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실되고 상실되는, 나른한 공백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이 불가사의한 건물의 복도를 헤매고 다닌다. 밖은 춥다.  (책속에서)

 


   1993년 발표된 <버림받은 천사들>은 그뷔드뮌손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00년에는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프리드릭손'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고 한다. 놀랍다. 사회 바깥에서 고독에 떨다 자살한 정신질환자의 고백에 관심(혹은 흥미)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이 믿기 힘들다. 물론 '파우들'은 허구의 인물이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을 안심시킨 것일까. '파우들'은 허구의 인물이고, 따라서 우발적이고 기이한 행동으로 자신을 놀래키거나 해치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또한 '파우들'은 작가의 능숙한 손끝에서 아름다운 호소력을 가진다. 그의 문장은 서글프고 아름답다. 그런데 '파우들'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그러니까 정신병원이나 요양시설, 혹은 길거리에서 말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그냥 관심 말고, 호의적인)을 보이거나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을까. 나자신조차 의심스럽다. 안타까운 현실.

  


   연으로 뛰어든 남자들과 여자들이여.

   창틀에 대고 울어대던 비 내리던 날들이여.

   아, 얼마나 비참한가, 이 고통의 길은.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고 살아 있는 것도 거의 없네.

   침묵의 밤은 영원하여라.

     ㅡ (책속에서)


 

 

   이 작품을 완전한 허구로만 볼 수도 없다. 그뷔드뮌손은 정신질환을 앓다 죽은 자신의 친형을 모티브로 삼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가족구성원의 고독과 고통의 시간을 지켜본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정신질환자들에게 '차가운 벽'이고 '어둠'인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아리기조차 조심스럽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겠다. "신 앞에서 평등"한 "우주의 천사들" 그 어느 누구도 추락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것. 함께,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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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탄생 - 예술가의 창조력을 일깨운 뮤즈 이야기
유경희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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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는 세상, 예술과 일상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세상, 도처에 예술작품은 너무 많지만 진정 흥미로운 예술가는 실종된 세상이 되었다. 특히 우리의 상황이 더욱 그러하며, 미술은 그 장르의 특성상 더욱 그러하다. 미술은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 물질적인 것으로 언제라도 맞바꿀 수 있는 교환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이중으로 유혹에 노출된 셈이다. ㅡ 6쪽, 들어가는 말)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그의 자서전을 구해 읽은 적이 있다. 작품만큼이나 그의 자서전은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아, 이런 것이 예술가의 감성이구나. 달리의 괴짜 같은 행보를 따라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늘날에는 예술도, 예술가도 너무 많다. 잘만 하면 예술해서 돈도 많이 번다. 이제 예술은 수많은 직종 가운데 하나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예술해서 돈 벌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서만 이용하는 것 같은 일부 예술가들의 행태가 불편하고 우려될 때가 있기는 하다. 예술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현실도 씁쓸하다. 예술가는 시대가 만든다고 한다. 진정한 예술정신이 아쉬워지는 요즘이다.

 

 

   "지금까지 사랑을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랑이 없었다면 내 노래들도 없었을 겁니다." 주옥 같은 곡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장발의 가수가 언젠가 TV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예술적 모티브가 되어준 것이 '사랑의 감정'이었다는 말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표출해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예술가에게는 그것이 외부의 것이든 내부의 것이든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경희 씨는 "예술가들의 창작 욕망에 불을 붙이고 고무하는, 즉 상상력과 영감을 고취하는 존재는 그 무엇이든 막론하고 뮤즈"라 이름 붙인다.《예술가의 탄생》은 사랑, 사람, 삶의 전환기 등 예술가에게 '뮤즈'가 된 것들을 중심으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조명한다.

 


   로트레크의 예술과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한 주목할 만한 단서가 바로 가장假裝 취미이다. 현재 남아 있는 로트레크의 사진 중에는 기묘한 변장을 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각 실행에 옮겼던 그는 가발을 쓰고 드레스를 입은 여성으로, 때로는 사무라이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런 기질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탈자아적 욕구이며 동시에 육체적 장애에 대한 은폐이기도 하다.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며 사교적인 성격도,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육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 역시 가장의 일종인 셈이다. ㅡ 124쪽)


 

 

   키 작은 화가 로트렉의 짧고 불우한 생애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에게 가장假裝 취미는 자신을 벗어던지려는, 즉 자기자신이기를 거부한 몸짓이었다는 내용은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왜소증이었던 로트렉의 '탈자아적 욕구'가 단연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사랑과 예술을 놓지 않았던 프리다 칼로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야생의 삶을 택했던 고갱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창조의 근원이 되어준 것이 바로 '탈자아적 욕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려는 로트렉의 몸짓이나 예술에 장애가 되는 환경을 내던지고 야생의 삶을 택하는 고갱의 공통점, 그리고 수많은 장애나 난관을 극복한 예술가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탈자아적 욕구', '탈현실적 욕구'가 없었다면 그들 예술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술가의 탄생》은 조금 특별하고 기이하며 지난한 예술적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예술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가 간접적으로 묻고 있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깊이있게 파고들어주었으면 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쉽다는 말이다. 그들 생애와 작품은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별하거나 기이한 예술가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도 깨닫게 해준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싶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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