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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한창 소설을 즐겨 읽던 때가 90년대 중반이었다. 무턱대고 넉넉한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는 혼자만의 착각으로, 어쨌든 한때 나는 즐겁지만 아주 힘겹게 소설 읽기에 열중했었다. 그 당시 여성주의 소설과 작가(?) 소설이 범람했던 터라 유행을 타고 열심히 소설 읽기에 매진(?)했다. 그러나 곧 80년대 소설로 눈을 돌렸고, 이내 6, 70년대 소설로 귀향하고 말았다. 왜였을까? 2010년 나는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요즘 나는 시간이 많다. 그러나 여유는, 예전 소설 읽던 때만큼의 여유는 장담할 수 없다. 이제 30대 중반에 다다랐고, 또한 겨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0년에 만난 소설 <라이팅 클럽>은, 90년대에 내가 한창 읽어대던 그 소설과 비슷한 맥락을 띄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향수를 느꼈을까. 아니면 낯설지 않은 소재에서 비롯되는 음침한 지루함을 느꼈을까?
<라이팅 클럽>에는 '지루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몇 가지 이유를 먼저 들어야겠다.
2.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이름 대신 "딸", 혹은 "아들"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곧잘 듣는다. 뭔가 이상하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칭으로 이름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생경했던 모양이다. <라이팅 클럽>에서 화자인 '나'는 어미를 '김 작가'로 부른다. 작가라는 칭호에는 일면 존경이 있을 수도 있지만, 딸 아이가 어미를 '작가'로 부르는 데에는 다분히 비아냥이 섞여 있다. '여사'가 아닌 '작가', 여기서 우리는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의 골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딸도, 어미와 같이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 일면 글쓰기가 가식과 허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모녀의 삶은, 어쩌면 삶이 아닌, 글쓰기를 위한 맹목으로써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글이 먼저인지, 삶이 먼저인지. 여전히 명확히 답을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맥주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글을 써놓고는(노동일기) 생각보다 짧고 재미가 없다는 것으로 자평하고 마는 딸의 심리는 가엾기까지 하다.
모녀는 서로 닮아 있다. 삶이 아닌 글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 그러나 처연함이 생략된 열정이 갖는 허술함에 때때로 독자는 시니컬해지고 만다. 그들의 모습에서 정열을 잃고 허술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또는 급하거나 중요한 일에 소홀히 하고 마는 삶의 태도를 다시금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라이팅 클럽>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반성하게 도와준다.
<라이팅 클럽>은 두 모녀의 삶을 걷어내면, 딸 아이(영인)의 성장기를 나타내는 '성장소설'로 읽힐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다. 딸 아이의 입을 통해서 소설은 전개되고, 세상을 조망하고 있다. 이니셜로 표기되는 일부는 혹시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해본다. 혹시 그때 그 양반이(?) 하는 상상을.
성장소설은 새로운 경험을 제시해 줄 때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힌다. <라이팅 클럽>에서 영인이 서른이 넘어 미국행을 하게 되는 것이나, 그 어미의 병환에 <돈키호테>를 읽어주는 장면은 예상치 못한 장면이기 때문에 소설 읽기에 박차를 가한다. 전반적으로 단문을 즐겨 쓰고 있는 글쓴이의 문체가 무미건조해 보이는 영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3.
'라이팅 클럽'이 있을 법한 '계동', 김 작가는 딸 아이에게 무심했고, 딸 영인은 어미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무던히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비록 그것이 땅을 떠 허공에서 부유하는 공허함이었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