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천사들
에이나르 마우르 그뷔드뮌손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리가 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신 앞에서 평등해.

 우리는 천사들이라고. 우주의 천사들. 

 

   (책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는 변함이 없다. 2010년 8월 23일자 연합기독뉴스에서는 '자해 또는 타해의 위험성'이 없음에도 강제입원이나 수용된 자들을 구제하는 '인신보호법(법률 제8724호)'이 2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널리 홍보가 되지 않아 이용하는 건수가 많지 않다는 소식을 전한다. 여전히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부당하고 불법적인 처우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나 범법행위는 보도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자들을 바깥으로 내쫓고 문을 닫아버린다. 닫는 것으로 모자라 무거운 자물쇠를 채워 가둔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그들의 평생 감옥이 된다. 정신을 흐리는 독한 약과 고된 노동으로 삶을 보내야 한다. 어쩌다 병세가 호전되어 사회로 돌아와도 편견과 불신의 벽 앞에 부딪히는 것이 이들, 정신질환자들의 현실이다.

 



   러나 이 얘기는 거짓말도 윤색도 아니었다. 라그나르 삼촌이 클레프 정신병원의 남자 간호사 자리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왜 해고된 거예요?"

   "내가 어떤 환자한테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한 조각 줬거든."

   "그건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없잖아요."

   "아니, 되더라고. 의사들은 내가 병원 음식을 낭비하는 몹쓸 짓을 한 거라고 하더군."

  

     ㅡ (책속에서)

 

 

   아이슬란드의 작가 그뷔드뮌손(Einar Mar Gudmundsson)은 본 작품 <버림받은 천사들>에서 정신병을 앓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주인공 '파우들'을 통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대 속에서 고독하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정신질환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는 팔랑거리며 풀밭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도로를 따라 굴러가는 매혹적인 자전거들을, 밤의 고요 속에 잠긴 우주를 떠올렸지만 그 밝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는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 밖에서는 날개 달린 시간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 펄쩍 뛴다. 행복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자전거들이 굴러가고 나비들이 팔랑거리지만 나는 아이들 소리도 자전거 소리도 새들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밝게 빛나고 있지만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으므로. 

 

  ㅡ  (책속에서)

 

 


    정신병을 앓다 자살한 '파우들'의 영혼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파우들'은 1949년 3월 30일, 아이슬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에 가입한 날 태어난다. 눈앞을 흐리는 최루탄 가스와 성난 사람들의 외침. 그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고였을까. '파우들'은 성장하면서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망상을 즐기게 된다. 그 누구도 정신병의 전조증상을 눈치채지 못했던 어느 날, 감정이 폭발한 '파우들'은 맨발로 집을 뛰쳐나온다. 그로부터 사회와 격리된 '파우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베를린 장벽 붕괴가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거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저 벽은 무너질 수 있지만 나와 세상 사이의 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겠지. 맨눈으로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그 벽은 갈라진 틈 하나 없이 견고하게 서 있으니까.' 

 

 ㅡ (책속에서)


 

   "바닷가에 거대한 궁전처럼 서 있는" 클레프 정신병원에 수용된 '파우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파우들'에게 있어 세계는 두 개로 분리된다. 정신병원 안과 밖. 그러나 '파우들'과 그의 친구들은 두 세계 어디에도 온전히 설 수 없다. 어디에도 디딜 '땅'이 없는 이들에게 의사는 독한 약을 처방한다. 독한 약기운은 서 있지 못하는 자들을 구름처럼 붕 뜨게 만든다. '파우들'과 그 친구들은 자신을 '그림자'라고 느낀다. '파우들'의 태어남과 혼란스러운 성장기가 지나면, 그러니까 클레프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후부터는 뚜렷한 줄거리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파우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앓는 그의 친구들이 병원과 사회에서 겪어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파우들'의 감상으로 채워진다. 정신병을 앓는 주인공이 화자라는 특성 때문에 문장 표현방식은 추상적인 면이 많다. 그뷔드뮌손은 정신질환자의 감정이나 느낌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해 낸다.

 


   은 춥다. 가끔가다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을 때가 있다. 가끔가다 차가운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누워서 몸을 떨 때가 있다. 볼드윈 왕의 말이 맞았다. 나는 내 천사들을 잘 돌봐주지 않았다. 지상으로 추락한 지 오래된 내 천사들은 날개가 꺾인 채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실되고 상실되는, 나른한 공백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이 불가사의한 건물의 복도를 헤매고 다닌다. 밖은 춥다.  (책속에서)

 


   1993년 발표된 <버림받은 천사들>은 그뷔드뮌손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00년에는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프리드릭손'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고 한다. 놀랍다. 사회 바깥에서 고독에 떨다 자살한 정신질환자의 고백에 관심(혹은 흥미)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이 믿기 힘들다. 물론 '파우들'은 허구의 인물이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을 안심시킨 것일까. '파우들'은 허구의 인물이고, 따라서 우발적이고 기이한 행동으로 자신을 놀래키거나 해치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또한 '파우들'은 작가의 능숙한 손끝에서 아름다운 호소력을 가진다. 그의 문장은 서글프고 아름답다. 그런데 '파우들'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그러니까 정신병원이나 요양시설, 혹은 길거리에서 말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그냥 관심 말고, 호의적인)을 보이거나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을까. 나자신조차 의심스럽다. 안타까운 현실.

  


   연으로 뛰어든 남자들과 여자들이여.

   창틀에 대고 울어대던 비 내리던 날들이여.

   아, 얼마나 비참한가, 이 고통의 길은.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고 살아 있는 것도 거의 없네.

   침묵의 밤은 영원하여라.

     ㅡ (책속에서)


 

 

   이 작품을 완전한 허구로만 볼 수도 없다. 그뷔드뮌손은 정신질환을 앓다 죽은 자신의 친형을 모티브로 삼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가족구성원의 고독과 고통의 시간을 지켜본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정신질환자들에게 '차가운 벽'이고 '어둠'인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아리기조차 조심스럽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겠다. "신 앞에서 평등"한 "우주의 천사들" 그 어느 누구도 추락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것. 함께,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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