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오류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토머스 키다 지음, 박윤정 옮김 / 열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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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태경제이론(behavioral economics)을 다루었던 <36.5℃ 인간의 경제학>과 <괴짜 경제학> 같은 책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기존의 고전적인 경제학 이론과는 다르게 매우 불완전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이용하자는 내용의 책이 <넛지>고, 비합리성의 엉뚱한 결과를 견제하자는 내용이 <스웨이>라는 책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도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이번에 읽은 토머스 키다의 <생각의 오류>라는 책 역시 “인간은 비합리적이며 복잡계의 특성을 띄는 존재다.” 라는 주장과 많은 학자의 연구결과로 증명된 사례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고민도 담겨있다.

 

진실이기를 바란다고 그것이 정말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회의적인 사색만이 오판을 피하는 길이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오류를 해결할 방법은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개인적으로 이루어 져야 하며,  회의적인 사색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모든 주장을 <모른다>를 기준으로 먼저 받아들인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듣던지 간에 무턱대고 믿지 말아야 한다. 주장을 들어본 후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유가 적합할 때 단계적으로 주장에 대한 믿음을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부정적인 증거가 드러나게 되면 언제든지 믿음의 강도를 낮출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적당하다.

 

반대로 <모른다>를 기준에서 주장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들이 하나씩 제시되면 믿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신을 쌓아나간다. 하지만 절대적인 부정은 없다. 나중에라도 긍정적인 신호를 발견하면 언제든지 불신의 강도를 약하게 낮출 수 있는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회의적인 사색이라 설명한다.

 

<생각의 오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결국, 인간 본능의 비합리적인 판단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어떤 것이 올바른 주장이고 올바른 이유인지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 주장이 좀 허무맹랑한 소리인 것 같다. 그의 말처럼 모든 사건을 짧고 간단한 증거(저자가 주장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 예를 들면 과학적 실험에 따른 결과를 말함)를 토대로 밝혀진 것만 믿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불신한다면, 우리가 정상과학에 근거한 똑같은 삶을 강요받아야 할 터인데, 그런 삶은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의 테이프를 거꾸로 감아서 돌렸더니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며 해프닝으로 웃으며 넘길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왜 미신인지 과학적 법칙으로 일일이 설명하면서 믿지 말아야 한다면 머리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뒤로 감기는 목소리는 사탄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 했던 결과였다고 이야기할 것이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직관에 따라, 우리가 보고 싶고, 믿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 위해 책에 담긴 내용을 이따위로 해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솔직한 심정을 그저 나타낸 것뿐이다.

 

2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행태경제이론을 설명하는 또 다른 서적을 발견하며 기쁜 마음에 그래 그렇지 하며 읽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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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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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이 원래 제목인 위화의 <인생>은 지난번에 읽었던 <허삼관 매혈기>와 <형제>보다 먼저 출간이 된 소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소설에는 어느 한량이 푸구이라는 노인에게 들은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9p-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자체 때문에 살아간다니……. 서문의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인생>은 그(푸구이면서도 위화)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를 그냥 흘러가게끔 내버려둔다.

 

푸구이는 중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증인과 같다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푸구이가 살았던 시대의 중국은 중국내전과 뒤이어 일어나는 문화대혁명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고,그 때문에 국민의 삶은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삶이었다. 개인이 가진 미미한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상이었다.

 

그의 다른 작품인 <허삼관 매혈기>와 <형제>를 통해서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개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위화는 모든 사건을 그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문장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각 등장인물의 특징과 개성은 해학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야기 속 참혹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하지만 알고 보면 어떤 작가보다도 훨씬 잔인하게 삶을 표현하는 작가가 바로 위화다. 그가 만들어낸 잔상은 뚜렷하게 각인되어 쉽게 잊혀지지 않게 만든다.

 

대대로 부유했던 가문에서 태어난 젊었을 적 푸구이는 백묘가 넘는 땅을 모조리 도박으로 날려버렸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부유함을 잃어버린 푸구이는 고된 노동으로 삶을 연명해야만 했고, 어이없는 사건 탓에 아들 유칭을 떠나보낸다.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 자전의 시신을 관에 넣는다. 나중에는 그의 딸 펑샤과 사위 얼시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핏줄인 손자 쿠건까지 잃는다. 푸구이의 삶은 자의와 타의 양쪽에서 거칠게 불어 닥치는 상실의 삶이었다.

 

푸구이의 삶을 몇 줄로 적어놓으니 가족을 다 떠나보낸 보잘 것 없는 늙은이의 삶이나, 이 삶을 적으면서 그가 겪었을 전쟁터와 일터에서의 고된 기억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를 홀로 남겨두고 차례로 떠나감에 따라 겪었을 상실의 기억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따름이다. 내가 푸구이를 기억하는 한 이 감정은 지속될 것 같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279p-

 

모든 고통을 뒤로하고 늙은 소 한 마리를 끌고서 밭을 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롭다. 정말 살아있음에 감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떤 희망도 없이 홀로 남겨진 이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분노의 표출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나이를 더 먹고 모든 것에 초연해지면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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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은 위험해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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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란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전도서 -4p-

 

시뮬라크르. 차례를 소개하기도 전에 등장하는 시뮬라크르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검색해보니 대략 이런 뜻이었다. 모델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가는 역동성과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흉내와 가짜와는 구별되는 것.

 

실제를 보고 만들었으나 실제와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생각해야 할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이자, 연예인 문근영을 판에 박은 듯이 닮은 문근영이 바로 그 시뮬라크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가는 문근영이 그 문근영이 아니라고 또 한번 언급한다.

 

이 소설은 블랙코미디 냄새가 짙게 코끝을 간질거린다. 넋 놓고 있자니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 박장대소가 터져 나온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 검은 곳을 뚫어지게 응시해보면 ‘이렇게 해야만 이 모든 현상이 설명되는구나.’ 라는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불가항력이 불러오는 공허한 감정이 폐부를 가득 채운다.

 

그 블랙코미디의 주성분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각종 신조어들이다. <문근영은 위험해>에는 총 209가지의 신조어들이 등장한다. 노란색의 다양한 형태를 가진 각주에 감동하면서, 나는 209단어 중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에 색깔을 덧입힌다.

 

<문근영은 위험해>의 이 단어들은 젊은 감성을 자극한다. 사전적 표기법을 패러디 하고 있는 불필요하게 자세한 노란 각주의 설명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대할 때마다, 마치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듯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문근영은 위험해>는 대한민국이 낳은 잉여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손을 잡고 만들어낸 잉여의 개념은 소설 속 사회에 올바르게 적응하지 못한 걸스카우트 멤버. 혜영, 승희, 성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책의 뒤표지에 적힌 대로 은둔형 오타쿠, 찌질한 스토커, 조루 음모론자다. 이들은 넷 상에 뿌려지는 단어들을 정상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기승전병? 아니 기승병병의 에베레스트 산으로 가는 구조를 띄고 있는 이 소설은 스토리는 병맛으로 흘러가지만, 세상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인간과 사회와 미디어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중독성 레알 갑의 SF 판타지, 미스터리, 서스펙트의 소설이었다.

 

문근영이 무엇인지 밝히면 썩은떡밥을 제공해버려 재미가 없어질 것 같으므로 입이 간질거리지만 참는다. 대신 그 속에 숨겨진 촌철살인의 명문장을 몇가지 옮겨본다. 힌트는 매트릭스다.

 

“하루 열다섯 시간씩 학교에 잡아놓는 것도 교육의 일부였고, 아이들에게 모두가 서로의 적이라고, 등수에서 밀리면 패배자라고 가르쳐 준 것도 교육의 일부였다. 또한,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 가르쳐 준 것도 교육의 일부였다.” -79p-

 

“물론 고등학생 정도 되면 밝은 앞날을 위해서 시험 시간에 스스로 믿는 것과 답안지에 적어야 하는 답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80p-

 

“사람이 성실해야 한다는 뜻은 추가 시급은 못 주겠지만 남아서 재고파악을 하라는 소리였고, 뭐든지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의 뜻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먹어도 좋으니 대신 오늘 30분 일찍 와서 청소한 건 급료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말의 뜻은 이번 명절에도 나와서 근무하라는 소리였으며, 사람이 눈앞에 이익에 휘둘려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번에도 시급 인상은 없다는 소리였다.” -96p-

 

“정부라는 존재는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그들은 국가고시를 패스한 재원들이었다. 엘리트 코스에 있으면 있을수록, 젊으면 젊을수록,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다만 그 안에는 개개인의 노력을 순식간에 무로 화하는 놀라운 시스템이 있었다. 모두의 노력과 시도는 서로 충돌하고 상충하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로 변했다. 마치 양자적 요동상태라 부르는 현상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런 시스템 속에 있으면 똑똑하건 멍청하건 빠르건 늦건 간에 배를 바닥에 붙인 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24p-

 

“한 번만 말할 거니까 똑똑히 들어. 우리가 한국 금융계에 새로운 고도의 금융기술을 보여줄 거거든. 완전 수익이 747 점보제트기처럼 날아갈거야. 그녀가 제시하는 황금빛 청사진에 작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코스피가 5천 포인트를 찍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164p-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그건 혁명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가속화하는 거야. 자동차 망가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브레이크를 고장 내는 거지. 공산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브레이크였던 셈이야.” -178p-

 

“상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고 어떤 미치광이가 한 도시에 사람들을 고립시켜 쏴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군인들은 상관이란 이유로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고스란히 수행해. 그렇게 대통령이 되어 수백 명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이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풀려나. 29만 원밖에 없다고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며 사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191p-

 

[네이버 북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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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의 증언 - 나는 왜 KBS에서 해임되었나
정연주 지음 / 오마이북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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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불어닥쳤던 2008년, 그 해의 12월 31일 보신각 타종행사 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날은 우연의 장난인지 TV로는 KBS 1TV, 컴퓨터로는 아프리카 TV를 동시에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장소를 촬영한 두 방송에서 전혀 다른 장면이 송출되었다.

 

아프리카 TV에서는 촛불과 노란 풍선. 그리고 빨간 피켓을 든 시민들의 모습과 “이명박은 물러가라!” 라는 외침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KBS에서는 행사무대의 오세훈 서울시장의 인터뷰와 연예인의 축하무대가 카메라를 통해 비치고 있었다.

 

드디어 새해를 알리는 10에서 0까지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컴퓨터의 스피커에서 이명박 퇴진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폭죽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기억이었다.

 

이 사건 말고도 2010년엔 G20 개최, 2011년엔 제주도 세계 7대 경관 선정에 관련해서 방송국은 엄청난 특집방송과 광고를 퍼부어댔다.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언론사 본연의 모습이 아닌 프로파간다(이념선전)에 집착하는 광고회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그날 이명박 후보와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형적인 ‘재벌회사 사장’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을 많이 하며, 거침이 없고, 심한 경우 안하무인이었다. -35p-

 

MB 정부를 높이기 위한 모든 프로파간다의 배후에는 언론장악을 지시한 MB 정부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공정한 보도에 힘쓰던 공중파 방송국을 밟아 뭉개버렸다. 임기가 남아있었던 KBS의 정연주 사장. MBC의 엄기영 사장을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MB 정권 출신의 이병순, 김인규. 그리고 김재철을 앉혀놓은 것이다.

 

노아에게 나뭇가지를 물어다 준 한 마리 비둘기는 언론이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암흑의 세상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 희망의 땅이 보인다는 것을 전하는 언론이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354p-

 

모든 것이 어두워 불안에 떨어야 했던 암흑의 세상. 나뭇가지 하나를 물어와서 노아에게 희망의 땅을 알린 비둘기처럼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던 정연주 사장은 어떤 압력에도 보장된 임기를 채워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을 지키는 길이라며 갖은 억압에도 끝까지 투쟁했다.

 

대부분의 법조 출입기자들은 대검찰청 기자실을 중심으로 취재활동을 하고, 법원취재는 매우 등한시한다. 그러다보니 검찰이 주는 먹이를 덥석덥석 물면서 그게 특종이라 여기고 대서특필한다. -202p-

 

<정연주의 증언>에서는 MB 정부가 KBS 이사진을 물갈이하고, 감사원과 검찰 권력을 지배하고, 조·중·동 언론과 결탁하여, 정연주 사장에게 1,500억의 배임에 의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라는 허무맹랑한 죄목을 씌워 강제로 KBS의 사장을 쫓아내는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공개된다.

 

정연주 사장은 <증언>을 통해 KBS가 적자경영이 아니라 오히려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음을. 1,500억의 배임죄가 허구였음을. 바른 보도로 많은 수상을 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정연주의 증언>의 주장은 그와 검찰의 1심과 2심 판결. 그리고 지난 12일 대법원의 마지막 판결 덕분에 사실임이 드러났다. 정권의 눈 밖에 난 인물이라는 이유로 저지르지도 않은 황당한 죄를 짊어짐으로써 겪었을 근 4년 동안의 고통이 드디어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행스러움과 더불어 글을 쓰는 지금 속보로 올라온 또 하나의 뉴스(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자진사퇴 뉴스)는 권력의 견제와 국민에게 올바른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고, 권력과 돈맛에 취해 그것을 등에 업고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정거장쯤으로 생각하는 언론인이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하다. 부디 그만둘 땐 그만두더라도 지은 죗값은 제대로 치러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네이버 북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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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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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 거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가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찾아다니는 놈들이야. -8p-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수용소는 그들의 말처럼 밀림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수용소 안의 세계는 밀림이 작동하는 법칙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추잡스럽다. 왜냐하면, 자연의 밀림이 다른 개체들이 각자 가진 순수한 힘의 크기에 의해서 작동한다면, 수용소의 밀림은 사회주의라는 외적인 체제가 힘의 크기를 조작해서 강제로 정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외적인 힘은 정오를 단 한마디에 오후 한 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힘이 세다.


“모든 선조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어.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가 정오라는 것을 말이야.”

“그건 그 사람들의 이야기야! 법령이 있은 다음부터는 오후 한 시가 되었을 때,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단 말이야.”

“아니, 그따위 법령을 누가 만들었단 말이야?”

“소비에트 정부지!” -80p-


사회주의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만, 이 법칙이 작용한다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주의건 민주주의건 할 것 없이, 외부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힘의 균형이 무너진 밀림 속에 인간이 생존하고 있다면, 어떤 체제 할 것 없이 그들 중 절대 우위에 서 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본능적인 결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수용소를 이러한 본능이 표출되는 공간으로 삼아, ‘어떻게’보다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답인 사실주의 기법을 토대로, 절대적 힘을 가진 무리(수용소 간부들)에 착취당하는 죄 없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로서 그려내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 가운데서는 개인적으로는 반장 추린이 현대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역량과 리더십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로비력까지 가지고 있는 모습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을 겪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분신은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슈호프는 구속되고 착취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그 제한된 욕구를 채우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영리하면서 정신력이 강한 남자였다. 

 

강한 남자 슈호프는 그와 대조적이었던 금권력과 로비를 상징하는 체자리의 방식에 일찌감치 한계가 찾아올 것이라 예감한다. 그는 자신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체득했고, 그 방법은 책의 시작에서부터 차례대로 공개된다.


그 효율적인 방법이 가장 잘 먹혀들었던 날이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그 하루. 1951년의 어느 겨울날이었고, 가장 운수 좋은 날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책이 운수 좋은 단 하루를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10년 3일의 기록과도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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