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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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결론은 첫째, 18. 진화는 사실이다. 둘째, 212. 진리는 결과일 뿐 아니라 발달 과정의 전부가 진리이다.

셋째, 39. 우리는 그냥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변하는 과정 중에 있다.  이 세 가지가 아닌가 싶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20. 변하지 않는 '지금 이대로'로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계속 변하고 있고 이것들은 현재 짧은 순간을 거치고 있다. 진화 사상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 변화, 발전의 전 과정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의 정치, 경제, 심리학, 생태학에서 시작해 현실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 오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의 작가 카터 핍스는 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혁명가들의 이론들을 설명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의식의 진화이론을 설명하는 진 게브서의 네 개의 '의식의 구조들'(221~230) 과 문화의 진화이론을 설명하는 클레어 그레이브스의 나선형 동력이론(233~246)이었다. 이러한 진화의 단계적 발달과정을 통하여 의식과 문화의 고정성을 파괴한다. 


후에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부여한다.


396. 피상적으로 받은 영감을 폭발시키거나 일시적으로 통찰력이 생기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용기와 진정성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이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사상을 추구해야 한다.


2.


어쨌든, 낙관적 진보주의로서의 진화. 이 깨달음을 막는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다윈과 도킨스의 이론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일 테다. 이것의 의미는 적자생존과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 즉, 강한 것이 선택받고. 선택받는 것이 강하다는 점을 유일한 정상과학으로 인정함으로써 경제력의 기준을 충족시킴으로써 선택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커나갈 수 있을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효과가 이기적 선택이라는 과정을 등에 업고 거의 유일한 상태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도 큰 기대치를 충족하도록 요구받는데. 이 기대치는 대중문화에 의하여 학습되고, 인문학의 부재와 맞물려 더욱 강화된다.


과학, 의식, 문화, 종교와 같은 부분에서 변화와 진화를 감지한다면 상황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는 가능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책을 정리하면서 다듬어야 할 것 같다.


208. 역사를 보면 어떤 세계관이 특정 시대에 확실히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류 역사에 걸쳐 지배적인 세계관들이 진화해온 것을 확실히 추적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 특정한 사회를 이끄는 큰 관점이 되고, 그러다가 여러 이유로 이것이 갈라지고, 긴 역사를 거치면서 다른 세계관에게 자리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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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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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티카. 이 용어를 <몰락의 에티카>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후 몇 번 빌려와서 써먹은 적이 있다. 이 블로그의 검색창에 에티카를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검색 결과에서 자연을 수호하려는 생태주의자와 그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쓴 <녹색고전>의 이야기에 대하여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말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들(자낳괴)의 관점으로서는 "유정 (살아있는 생물) 뿐 아니라, 무정(무생물)에도 제각기 의식이 있다. 그래서 인간중심주의 사고를 내려놓자"고 주장하는. 게다가 "인간은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녹색 고전> 속의 작가들은 몰락(沒落)의 길로 향하는 밥 빌어먹는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작품을 생태주의적 관점(몰락의 선택)으로 해석하는 김욱동 선생 또한 몰락(沒落)의 길로 향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Go Down)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Go Down)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Go Down)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쓸 당시에는 이 문단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끄적였던 것 같다. <스피노자 인문학>의 힘을 빌어서야 이 문단에 적힌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가장 위에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서 몰락(沒落)이라는 것은 자낳괴의 관점일 뿐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이 선택을 '몰락의 길(沒落)'로 해석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선택을 몰락(沒落)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연민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주변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이것이 몰락(沒落)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몰락(沒落)이라고 발설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몰락(沒落)이라는 슬픔. 수동적 정념에 예속에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이것을 몰락(沒落)으로 인식하지 않고 능동적인 기쁨으로 인식한 당사자에게는 이것은 예속이 아닌. 자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몰락(沒落)이라는 용어가  멸망하여 모조리 없어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Go Down이라면 이 몰락(Go Down)은 자낳괴가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면 몰락(Go Down)이란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경험이자. 인간이 세상과 격렬하게 부딪히는 사투의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Go Down)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p.>


2.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몰락은 Go Down.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락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움받을 용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Go Down은 미움받을 용기이자. <스피노자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성이 선택한 최선의 자유였다.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떨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미움받을 용기 37 p>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이해해야 돼. <미움받을 용기 181 p>


3. 


뻗어나가는 상념을 이쯤에서 정리하고, <스피노자 인문학>의 이야기를 되새김해보려한다.


67. 욕망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간은 마땅히 욕망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욕망을 통해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인간의 선택은 내재하는 욕망이 치열하게 겨룬 이후 가장 강력한 욕망의 발현이다. 이것을 자유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선택한 자유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것을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봤자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 간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당신의 무의식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확장시킨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성의 확장은 배움으로 가능하다. 직접적인 경험으로의 깨달음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도 이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과거의 무의식 보다 지금의 무의식이 더 나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판단할 기준은 감정상태를 들여다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이 선택으로 인하여 신체와 영혼에 경쟁심과, 경외심과 경멸이라는 감정이 깃들거나 혹은 그 선택에 대하여 애써 정당화하려는 불편한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다 판단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300페이지에서 설명된 1종인식에서 역량(=이성)을 갈고 닦아 2종 인식으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서 초인을 의미하는 직관지. 3종 인식에 다다르는 것이다. 니체의 생각과 같다. 2종은 넘어, 3종 인식에 다다르게 하기 위하여 스피노자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선택에 맡기기 보다는 정치적인 제도를 개선하는 것에도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이 안전하게 자신의 심신을 개발하고 자유로이 이성을 사용하도록 말이다.


스피노자는 3종 인식인 직관지에 이르는 상태가 이상적인 형태라고 했지. 여전히 1종 인식이 만연한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어쩌면 어떤 것이 3종 인식인지 1종 인식인지조차 불분명하다. 


90. "즐거운 음악은 기쁜 자에게는 좋은 것이고, 장례식장에는 나쁜 것이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107. 우리는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되기에 그것을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욕망하기에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관계에 의해서만 가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수도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현실 세계에서의 이 모든 진행상황 자체가 '자연'의 형태이며, 그 자체를 신이라고 칭했다.


소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소피의 세계>의 스피노자 챕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면 엄지 손사락을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네게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지손가락은 오직 그것의 본성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엄지손가락이 네 손에서 뛰어올라 온 방 안을 만지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처럼 너 역시 전체 속에서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란다. 얘야, 너는 소피이지만 신이 몸에 달린 손가락이기도 하지."


55. 실재성은 곧 완전성이다


이것 자체가 자연이기 때문에 강제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즉,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몰락(Go Down) 역시 허락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싸움터에서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이유로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Go Down)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몰락의 에티카>


141. 올바른 인식이란 부분적인 앎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식.


210.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기쁨)란?

1.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2. 역량을 향한 자유


230. 이성에 인도되지 못하고 혼란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사물과 신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02. 사랑 = 기쁨 = 능동 = 이성 = 역량 = 공감 = 이해 =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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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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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기에 도전한 가족 <그랜드 마더스>


<다섯째 아이(1988)>의 등장인물인 해리엇과 데이빗은 사회적 통념들을 사실로 가정하고, 당신의 행복을 남들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과 함께 축하 인사를 건네며 즐길만한 계기가 필요했고, 행복에 넘치는 축하 인사를 받기 위해서 가족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벤이라는 존재는 모든 이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 벤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의식이 지금껏 숭배해왔던 모든 가치를 엎어버릴 정도였다는 점은 매우 큰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이었을까? 도리스 레싱의 전작 <다섯째 아이(1988)>의 인물과 <그랜드 마더스(2003)>의 인물 성향은 달라졌다. 도리스 레싱의 인물들은 이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족의 몸집을 줄였고, 스스로 미니멀라이징화 되었다. 그들은 이미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다. 그렇기에 누구의 관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12. 나른하고 흡족한 풍경.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놓인 테이블마다 비슷하게 축복받은 인생들이 노닥거렸다.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바다는 불과 몇 미터 아래에서 슈르르슈슈, 한숨 소리를 내며 해변으로 밀려왔고, 바다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그들을 오히려 선망했다. 


<그랜드 마더스>의 첫 번째 소설 <그랜드 마더스>의 최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가족의 숫자는 최소 4명뿐이었다. 아빠, 엄마, 아들 , 딸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엄마와 아들. 이렇게 4명이었다. 이 4명의 인물은 모든 욕구를 이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4명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불행해졌다.


60. 뭔가 있었다... 뭔가 불쾌한 것... 그녀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공간. 메리는 그걸 깨달았다.


83. 벡스터즈 정원 아래쪽에서 한나와 함께 길가에 선 채 로즈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게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 웃음은 그녀, 메리를 조롱했고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모든 걸 이해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어떤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새로움 속에서도 부작용은 발견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주의의 불편한 이면을 발견했다. 극단주의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2.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어.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


166. 빅토리아는 필리스가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를 노리는 끔찍한 위험들... 함정과 올가미, 여자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을 오히려 미끼로 삼아 그 여자들을 낚는 악마들.


<테스>의 비극도 이겨낸 강인한 여인. 토리아의 모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난 그녀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표면적인 장벽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상징인 테스는 농락당했지만, 현재의 상징. 빅토리아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낸다. 오래전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곳의 몽환적인 기억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 기억을 잃지 않은 덕분에 그녀의 딸 메리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장벽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메리는 그녀가 낳은 다른 자식인 딕슨과는 달리 스테이브니 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빅토리아가 만들 울타리와 스테이브니 가가 제공할 울타리의 격차는 너무나 크고,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당연했기에. 앞으로 닥쳐올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빅토리아는 이미 체념했다. 184. 메리는 스테이브니가 되고 싶을 거야. 그래,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해. 결국 그렇게 될 테니까. 슬픈 현실이었다. 아마도 훗날 메리가 빅토리아를 이해할 날이 온다면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3. 낙관적인 더욱 낙관적인 파국. <그것의 이유>


<로마제국 쇠망사>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한 소설이다. 로다이트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론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왕정과 독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알레고리 소설 같기도 하다.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시키는 과거의 수호자는. 이 소설의 화자인 현자 십이 호로서 상징된다. 그의 눈에 비친 젊은 세대의 국가는 급격하게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214. 내가 공들였던 모든 것들이 자취 없이 사라졌다. 찬란했던 시절, 탁월했던 날들이 머나먼 꿈, 모두 깨져버린 꿈만 같았다.  


바야흐로 쾌락이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십이 호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248. 그는 잊은 게 아니었다. 훌륭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훌륭하다는 걸 전혀 몰랐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의 일원인 듯 보였지만 데스트라의 아들이며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유쾌해서 우리 모두가 찬사를 보냈던 그 데로드는 청맹과니였다. (중략) 우리는 다양한 상상과 원망과 의심으로 우리 자신을 속였다. 우리는 이 남자, 데로드를 악당으로, 야욕에 차서 음모를 꾸미는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여겼다, 실은 처음부터 멍청했을 뿐인데, 그게 전부였는데 우리는 그걸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스트라는 십이위원회를 낙관했고, 십이위원회는 데스트라를 낙관했다.     


깨달음.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공개된다.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 외모는 출중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이자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대 지도자였던 데스트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리더십과 정치력 훌륭했지만, 후대의 왕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르자. 모성애가 발동했던지. 낙관주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십이인 위원회의 믿음이라는 회피 수단으로 데로드의 치부를 묵인했던 것이다. 자신의 실책을 누군가 발견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에서 이와 같은 낙관은 무너진 상태였다.


4. 전쟁과 구원. <러브 차일드>


소설보다 매력적인 추천사는 소설의 기대감을 증폭시켜 소설의 재미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러브차일드>는 정혜윤 작가가 느낀 초연한 사랑, 관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낭만적인 성격을 논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소망하는 것과 강렬한 기억을 남긴 전환적인 순간과 자신을 달래주었던 구세주라는 존재. 이러한 측면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만약. 내가 데이브였다면, 전쟁 상황. 언제 전시에 투입될지도 알 수 없고, 목적지조차도 알 수 없는 군함 안에서 심하게 뱃멀미를 하며,하며, 발이 퉁퉁 부을 정도의 고통.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장소에서 만난 어떤 여인이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조건이라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며 눈물을 흘렸던 대프니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이다. 레싱이 이 에피소드를 이유 없이 집어넣었을 리가 없다. 분명 대프니에게도 필요했던 썸씽이라고 레싱은 판단했을 것이다.  


401. "사랑스러운 시를 찾아냈어. 물론 당신은 알고 있겠지. <디어드리>라고 제임스 스티븐스가 쓴 시인데? 이걸 읽으면 당신이 떠올라. '그러나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았네. /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가운데 / 그토록 아름다운 이는 없었네.' 디어드리와 대프니. 그리고 당신은 여왕이지. 나의 여왕 대프니."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이브는 대프니라는 인간에 대한 매력보다는 어떤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의 의미로서 디어드리라는 환상까지 덧씌워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조라는 군인의 부인이며, 조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며, 전쟁 내내 조를 그리워했고, 데이브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었다는 점은 데이브의 의식 안에서만 부정된다. 나중에 대프니와 자신과의 관계로서 자신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대프니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그녀를 집착한다.


381. 전쟁은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기간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간간이 교전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전투, 위험, 죽음, 그러다가 권태와 무위가 다시 반복됐다. 그러니 전방에서 오는 소식은 늘 똑같았다. "전쟁은 어땠어?" "아이고, 그 권태라니, 그게 가장 힘들었다네." (중략) 캠프 X의 원태는 질병, 바이러스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는 질병 같은 것이었다. 권태 증세를 완화시키는 건 소문이라는 열병이었다. 전시의 소문. 이건 연구 과제였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의외의 공간에서 공포와 고독과 희망이 배태하여 꿈의 광채를 입은 징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술집이나 막사에서 어느 경솔한 자의 입을 통해 기어이 누설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순식간에 하루나 일주일 만에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얼굴을 한 미지의 공포와 실제로 다가오는 권태가 극심해질수록 이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으로서 증상이 더 커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관념은 전쟁이 끝나고 데이브의 가정이 생기고 난 이후에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진 속의 남자아이는 극한의 순간. 구세주와의 환상적인 하룻밤을 상징하는 <러브 차일드>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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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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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3월의 책 선정의 변


리스트에 오른 책 가운데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북살림의 3월의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제7일>을 읽은 경험1 덕분에 위화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는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운이 충만한 휴머니즘 문학이라고 평가해왔었다. 가장 최근의 작품이었던 <제7일>에 도달해서야 작가는 죽음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가랑비 속의 외침>은 2월의 책이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핵심주제인 로고테라피에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던져줄 만한 작품일 것으로 기대했다.


2.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죽음


13. 기억 속의 일이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날려버린 채 껍데기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느낌은 그 안의 것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 아마도 기억이란 속세의 은혜와 원한을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인듯싶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는 설명만 듣고 선택한 이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니 충만한 삶의 기운을 내포한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가랑비 속의 외침>의 배경인 1960년대의 중국. 이곳은 가난에 수반하는 고생스러움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고 성적 욕구를 푸는 것정신적인 만족과 가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삶은 점점 더 팍팍해져만가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빠 여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도무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공생을 바라기보다 홀로 몸뚱아리에 의존한 채, 경험 하나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327. 어른들의 권력이 아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들과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오랜 역사의 산물인 공맹과 노장의 정신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규범은 무너졌으며, 사회안전망은 부재했다. 사회는 점차 부패해져만 가고, 손광림의 주위에는 불온한 영혼의 소유자들만 가득했다. 이런 세상에서 유년기를 보낸 손광림은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함께 이겨낼 사람들을 물색하고 접촉하지만, 그 누구와도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손광림을 떠나갔다. 이들은 현재의 손광림의 의식 속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니 살아가기 벅찬 순간의 손광림의 무의식이 그들을 정중히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이 죽음이 완결이 아닌 연속이라는 점이다. 만남과 죽음의 기억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무한루프처럼 이어진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가랑비 속의 슬픈 외침이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진다. 손광림 홀로 그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위화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작품은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웠다. 내가 그에 대해서 평가해왔던 기본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32.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시종일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비한 호흡과 현실적 존재가 섞여 있어서 나는 그의 진정한 사인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마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할아버지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아침.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나서 바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겁과 쥐새끼 같은 생활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소설의 형태가 삶을 갈구하는 것에서 죽음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변했으나 그것을 그려내는 그의 개성있는 문장은 그대로였다. 이야기의 힘이 센 특유의 문장으로 시점이 흔들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숨은 타고난 해학적 문체로 그들이 겪을 비극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느꼈던 위화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3.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록


위화작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과거의 슬픈 기억을.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일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의 명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손광림의 기억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광림이 살아있는 한 그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46. 산 자가 망자를 땅에 묻고 나면 망자는 영원히 그곳에 누워 있게 되고 산 자는 계속 살아 숨쉰다.


48. 계속 살아갈 자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오직 죽음을 앞둔 자의 눈만이 햇발을 뚫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음으로써 그 공간의 사람들을 불온하게 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테다. 평범한 사람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비극을 수차례 경험한 손광림이 그곳에서 정체되지 않고, 아픔을 딛고, 북경으로 주거지를 옮겨갔다는 점은 단순히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초월한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당신을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미 비극인 것이다.


30. 내가 남문을 멀리 떠난 후부터 남문은 내게 고향으로서의 친근함을 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난 이 생각을 고수했다. 옛일을 회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착함을 잃게 되면서 짐짓 평온을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고, 설령 그것이 감상적인 상황과 함께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31. 기억 속의 저수지는 내게 늘 따뜻함을 전해주는 곳이었으나, 내 앞에 나타난 현실 속의 저수지는 내 과거를 일깨웠다. 수면에 부유하는 더러운 쓰레기들은 저수지가 날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과거의 한 기표로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문에 남아서 나에게 영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45. 시간은 투명한 어둠을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은 감춰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아니다. 논밭, 거리, 강, 집은 모두 사실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 함께하는 동반자들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앞으로 혹은 뒤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225. 나의 기억이 맹렬한 속도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질병과 노쇠함이 그의 과거를 무정하게 갉아먹어 들어갔다. 그는 그 자신이 가장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었고, 나와 마주치면서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무 판자를 만난 것처럼 남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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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업 -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인생을 배우다
테레사 조던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1. 배움과 경험으로 의미를 되새기다


테레사 조던이라는 낯선 작가의 책. <생활수업>은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에릭 호퍼 북 어워드'의 2015년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타이틀에 실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대한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 외에 주목할 만한 사상가 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도덕적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개인주의를 주창한 여류 사상가 아인 랜드를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174. "한 인간이 사람들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삶의 원칙이다. 한 인간이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죽음의 원칙이다. (중략) 나의 가치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나의 욕망들이 서로 충동하지 않듯, 합리적인 인간들 사이에는 이해의 상충도, 희생자도 없다."


작가는 앞에서 말한 사상가 외에도 미국의 선구자들이 남겨놓은 가치를 블로그를 개설하여 꾸준히 기록했다. 어떤 가치에 대한 기록을 공부하고, 거기에 자기의 경험도 고백하는 방식으로 자기관리를 시도한다. 마치, 우리가 영단어를 쉽게 외우기 위해서 영영사전으로 해당 단어에 대한 의미를 깊이 공부하듯이, 관련된 개념에 대해 이야기와 경험과 잠언들을 덧붙여서 우리가 그 가치들을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들을 꾸준히 증식시켰다.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 대한 피드백을 충실하게 반영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1 이외에도 작가가 판단했을 때는 믿음, 감사, 관용, 용기, 용서 같은 가치 또한 삶에 있어서 유용한 가치라서 생각해서 책에 포함시켰다. 작가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서문에서 그녀가 제기하는 문제점과 얼마 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느낀 감정과 너무나 비슷하다.  


17. 우리들 대부분은 희망하는 인간상이 있음에도 종종 그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내일 있을 회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TV 드라마에 탐닉한다. 유기농 브로콜리가 좋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빅맥 버거를 먹어댄다. 잠시만 참으면 지나갈 것을 알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하여 일을 더욱 그르치기도 한다.


우리들의 양쪽 어깨엔 천사와 악마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란 그 둘의 싸움이 펼쳐지는 시트콤과 같다. 나 역시 이 책을 쓰면서 부족한 의지와 능력으로 고전할 때에는 주로 나태와 심통과 늑장이 일상이라는 시트콤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가치. 죽음에 이르는 적으로 규정한 그것들의 이름은 음욕과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허영, 심통 고집 같은 것들이었다.


2. 쌍곡선 할인(= Hyperbolic discounting,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과 다중자아 이론, 각성과 회피


<생활수업>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인간을 망치는 부정적인 것을 다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유용했던 부분을 '늑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늑장'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늑장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과도한 가치폄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 조지 에인슬리의 견해를 가져다쓴다. 이 내용은 예전에 언급했던 쌍곡선 할인과 같은 뜻이지만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쌍곡선 할인'이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로 해석되었다.


2-1. 게으름 피우려고 하는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잘 알려진 커미트먼트 효과를 빅토르 위고의 일화로 쉽게 설명한다. 빅토르 위고는 글을 쓸 때 밖에 나가고픈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알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하인에게 옷을 숨겨두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를 구속함으로써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2-2. 다중자아 이론이라는 흥미로운 해결책을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여러가지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최근에 읽은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의 리뷰에서 언급했던 '쾌락본능' 과 '죽음본능' 2이 다중자아의 여러 얼굴 가운데 두 가지 얼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철학자 돈 로스의 말을 빌려와서 실질적으로 이렇게 제안하라 충고한다.


185. "텔레비전을 보는 자아는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싶어 하지만 그 자아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한다. 이는 곧 흥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금 일을 하면 나중에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보게 해주겠다고 흥정하면 된다." 늑장은 흥정 프로세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인 셈이다.   


2-3. 인간의 유형을 압박을 받아야만 일에 대한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각성 늑장꾼'과 자신의 가치를 성취도로 평가하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적정하며 일을 미루는 '회피 늑장꾼'으로 분류해줌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증진 시켜준다. 물론 이 각성과 회피의 이론 또한 조지프 페라리 박사의 이론을 가져온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여기에서 인용한 조지 에인슬리,돈 로스,조지프 페라리 같은 학자의 번역 서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체레사 조던이 이 책을 통하여 소개하는 학자들의 서적은 대부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상태였다.

 

3. 아나이스 닌의 잠언


193.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률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한 부분만 성장하고 다른 부분은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성장은 들쭉날쭉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성숙한 사람도 다른 부분에서는 어린애 같을 수 있다.


이것도 요즘 느끼는 부분이라 옮겨본다.


4. 퍼트리샤 넬슨 리메릭의 '얼간이 10퍼센트 법칙'의 활용법


210.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라디오와 TV에 새로운 채널이 수백 개로 늘었고 인터넷의 목소리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대다수는 끊임없이 볼륨을 높이고 미끼를 던져 주목을 끌려고 경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우려들을 확인해주는 목소리만 들으려 한다. 그러면서 갈수록 자신의 믿음 안에 갇혀 세상을 본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세상 거의 모든 일과 그에 대한 입장에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양극의 청중도 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청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최소한 무엇을 들을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 학자의 책은 국내에 딱 한권 번역되어 있는데, 이 주제 '얼간이 10퍼센트 법칙(모든 집단에는 일정 비율의 얼간이가 있다.)'을 다룬 책은 아닌 것 같다. 다시 본문 이야기로 가서.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얼간이 10퍼센트를 항상 생각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결정하는 것을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5. '지위를 위한 지출'이 야기한 '쾌락의 쳇바퀴 '


'탐욕'에서는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장에서 작가는 중산층의 소비 지출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증가하는 통계자료를 가져와서 그들의 소비액이 증가하는 이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욕구 때문인지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문제는 없는지 생각해본다.


87. "빈곤한 사회의 남편은 장미꽃 한송이로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만, 부유한 사회의 남편은 장미꽃 열두 송이를 사야한다."


작가는 개인의 문제로 모든 것을 돌리기 이전에 사회적 기준이 높아질수록 각자에게 요구하는 기준치가 높아지고, 그것이 쾌락으로 변질되어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런 악순환이 쳇바퀴로 돌아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로버트 프랭크 박사는 이것을 '지위를 위한 지출'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지위를 위한 군비 경쟁'이 오랜시간동안 우리 모두에게 효과를 미치고 있었음을 주지시킨다.


88.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했듯이, '창피하지 않게' 남들 앞에 나가기 위해 의복에 얼마를 지출해야 하는가는 그 지역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쓴 바에 따르면,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최하층의 노동자들조차도 리넨 셔츠를 입었다. 리넨 셔츠를 살 수 없다는 것은 대개 게으름이나 무능력, 때로는 그 이하를 의미했다.


89. 소비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두려움, 즉 진짜 실패보다 실패자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본질적인 불안을 인지하기 전에는 물질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그래서 최상위 소비자들처럼 막대한 소비를 한다고 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탐욕의 맨얼굴이라고 테레사 조던은 우리에게 소개시켜준다.


6.


책은 <오리지널스>같은 창의성에 대한 책, 혹은 일반 문학 작품과는 달리 다루는 주제가 전방위적인 수준으로 많다. 게다가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서 관련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금방 까먹게 되는 단점도 있다. 그렇지만 테레사 조던이라는 한 인간이 개인의 성장과 더불어 인류의 정신적 진보와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은 매우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한번만 읽으면 절대로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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