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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1. 금기에 도전한 가족 <그랜드 마더스>
<다섯째 아이(1988)>의 등장인물인 해리엇과 데이빗은 사회적 통념들을 사실로 가정하고, 당신의 행복을 남들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과 함께 축하 인사를 건네며 즐길만한 계기가 필요했고, 행복에 넘치는 축하 인사를 받기 위해서 가족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벤이라는 존재는 모든 이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다. 벤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의식이 지금껏 숭배해왔던 모든 가치를 엎어버릴 정도였다는 점은 매우 큰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이었을까? 도리스 레싱의 전작 <다섯째 아이(1988)>의 인물과 <그랜드 마더스(2003)>의 인물 성향은 달라졌다. 도리스 레싱의 인물들은 이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족의 몸집을 줄였고, 스스로 미니멀라이징화 되었다. 그들은 이미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다. 그렇기에 누구의 관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12. 나른하고 흡족한 풍경.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놓인 테이블마다 비슷하게 축복받은 인생들이 노닥거렸다.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바다는 불과 몇 미터 아래에서 슈르르슈슈, 한숨 소리를 내며 해변으로 밀려왔고, 바다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그들을 오히려 선망했다.
<그랜드 마더스>의 첫 번째 소설 <그랜드 마더스>의 최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가족의 숫자는 최소 4명뿐이었다. 아빠, 엄마, 아들 , 딸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엄마와 아들. 이렇게 4명이었다. 이 4명의 인물은 모든 욕구를 이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4명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불행해졌다.
60. 뭔가 있었다... 뭔가 불쾌한 것... 그녀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공간. 메리는 그걸 깨달았다.
83. 벡스터즈 정원 아래쪽에서 한나와 함께 길가에 선 채 로즈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게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 웃음은 그녀, 메리를 조롱했고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모든 걸 이해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어떤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새로움 속에서도 부작용은 발견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주의의 불편한 이면을 발견했다. 극단주의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2.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어.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
166. 빅토리아는 필리스가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를 노리는 끔찍한 위험들... 함정과 올가미, 여자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을 오히려 미끼로 삼아 그 여자들을 낚는 악마들.
<테스>의 비극도 이겨낸 강인한 여인. 빅토리아의 모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난 그녀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표면적인 장벽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상징인 테스는 농락당했지만, 현재의 상징. 빅토리아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낸다. 오래전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곳의 몽환적인 기억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 기억을 잃지 않은 덕분에 그녀의 딸 메리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장벽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메리는 그녀가 낳은 다른 자식인 딕슨과는 달리 스테이브니 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빅토리아가 만들 울타리와 스테이브니 가가 제공할 울타리의 격차는 너무나 크고,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당연했기에. 앞으로 닥쳐올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빅토리아는 이미 체념했다. 184. 메리는 스테이브니가 되고 싶을 거야. 그래,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해. 결국 그렇게 될 테니까. 슬픈 현실이었다. 아마도 훗날 메리가 빅토리아를 이해할 날이 온다면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3. 낙관적인 더욱 낙관적인 파국. <그것의 이유>
<로마제국 쇠망사>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한 소설이다. 로다이트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론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왕정과 독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알레고리 소설 같기도 하다.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시키는 과거의 수호자는. 이 소설의 화자인 현자 십이 호로서 상징된다. 그의 눈에 비친 젊은 세대의 국가는 급격하게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214. 내가 공들였던 모든 것들이 자취 없이 사라졌다. 찬란했던 시절, 탁월했던 날들이 머나먼 꿈, 모두 깨져버린 꿈만 같았다.
바야흐로 쾌락이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십이 호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248. 그는 잊은 게 아니었다. 훌륭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훌륭하다는 걸 전혀 몰랐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의 일원인 듯 보였지만 데스트라의 아들이며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유쾌해서 우리 모두가 찬사를 보냈던 그 데로드는 청맹과니였다. (중략) 우리는 다양한 상상과 원망과 의심으로 우리 자신을 속였다. 우리는 이 남자, 데로드를 악당으로, 야욕에 차서 음모를 꾸미는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여겼다, 실은 처음부터 멍청했을 뿐인데, 그게 전부였는데 우리는 그걸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스트라는 십이위원회를 낙관했고, 십이위원회는 데스트라를 낙관했다.
깨달음.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공개된다.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 외모는 출중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이자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대 지도자였던 데스트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리더십과 정치력은 훌륭했지만, 후대의 왕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르자. 모성애가 발동했던지. 낙관주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십이인 위원회의 믿음이라는 회피 수단으로 데로드의 치부를 묵인했던 것이다. 자신의 실책을 누군가 발견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에서 이와 같은 낙관은 무너진 상태였다.
4. 전쟁과 구원. <러브 차일드>
소설보다 매력적인 추천사는 소설의 기대감을 증폭시켜 소설의 재미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러브차일드>는 정혜윤 작가가 느낀 초연한 사랑, 관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낭만적인 성격을 논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소망하는 것과 강렬한 기억을 남긴 전환적인 순간과 자신을 달래주었던 구세주라는 존재. 이러한 측면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만약. 내가 데이브였다면, 전쟁 상황. 언제 전시에 투입될지도 알 수 없고, 목적지조차도 알 수 없는 군함 안에서 심하게 뱃멀미를 하며,하며, 발이 퉁퉁 부을 정도의 고통.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장소에서 만난 어떤 여인이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조건이라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며 눈물을 흘렸던 대프니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이다. 레싱이 이 에피소드를 이유 없이 집어넣었을 리가 없다. 분명 대프니에게도 필요했던 썸씽이라고 레싱은 판단했을 것이다.
401. "사랑스러운 시를 찾아냈어. 물론 당신은 알고 있겠지. <디어드리>라고 제임스 스티븐스가 쓴 시인데? 이걸 읽으면 당신이 떠올라. '그러나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았네. /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가운데 / 그토록 아름다운 이는 없었네.' 디어드리와 대프니. 그리고 당신은 여왕이지. 나의 여왕 대프니."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이브는 대프니라는 인간에 대한 매력보다는 어떤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의 의미로서 디어드리라는 환상까지 덧씌워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조라는 군인의 부인이며, 조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며, 전쟁 내내 조를 그리워했고, 데이브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었다는 점은 데이브의 의식 안에서만 부정된다. 나중에 대프니와 자신과의 관계로서 자신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대프니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그녀를 집착한다.
381. 전쟁은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기간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간간이 교전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전투, 위험, 죽음, 그러다가 권태와 무위가 다시 반복됐다. 그러니 전방에서 오는 소식은 늘 똑같았다. "전쟁은 어땠어?" "아이고, 그 권태라니, 그게 가장 힘들었다네." (중략) 캠프 X의 원태는 질병, 바이러스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는 질병 같은 것이었다. 권태 증세를 완화시키는 건 소문이라는 열병이었다. 전시의 소문. 이건 연구 과제였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의외의 공간에서 공포와 고독과 희망이 배태하여 꿈의 광채를 입은 징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술집이나 막사에서 어느 경솔한 자의 입을 통해 기어이 누설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순식간에 하루나 일주일 만에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얼굴을 한 미지의 공포와 실제로 다가오는 권태가 극심해질수록 이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으로서 증상이 더 커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관념은 전쟁이 끝나고 데이브의 가정이 생기고 난 이후에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진 속의 남자아이는 극한의 순간. 구세주와의 환상적인 하룻밤을 상징하는 <러브 차일드>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