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1. 3월의 책 선정의 변


리스트에 오른 책 가운데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북살림의 3월의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제7일>을 읽은 경험1 덕분에 위화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는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운이 충만한 휴머니즘 문학이라고 평가해왔었다. 가장 최근의 작품이었던 <제7일>에 도달해서야 작가는 죽음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가랑비 속의 외침>은 2월의 책이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핵심주제인 로고테라피에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던져줄 만한 작품일 것으로 기대했다.


2.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죽음


13. 기억 속의 일이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날려버린 채 껍데기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느낌은 그 안의 것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 아마도 기억이란 속세의 은혜와 원한을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인듯싶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는 설명만 듣고 선택한 이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니 충만한 삶의 기운을 내포한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가랑비 속의 외침>의 배경인 1960년대의 중국. 이곳은 가난에 수반하는 고생스러움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고 성적 욕구를 푸는 것정신적인 만족과 가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삶은 점점 더 팍팍해져만가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빠 여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도무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공생을 바라기보다 홀로 몸뚱아리에 의존한 채, 경험 하나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327. 어른들의 권력이 아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들과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오랜 역사의 산물인 공맹과 노장의 정신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규범은 무너졌으며, 사회안전망은 부재했다. 사회는 점차 부패해져만 가고, 손광림의 주위에는 불온한 영혼의 소유자들만 가득했다. 이런 세상에서 유년기를 보낸 손광림은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함께 이겨낼 사람들을 물색하고 접촉하지만, 그 누구와도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손광림을 떠나갔다. 이들은 현재의 손광림의 의식 속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니 살아가기 벅찬 순간의 손광림의 무의식이 그들을 정중히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이 죽음이 완결이 아닌 연속이라는 점이다. 만남과 죽음의 기억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무한루프처럼 이어진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가랑비 속의 슬픈 외침이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진다. 손광림 홀로 그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위화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작품은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웠다. 내가 그에 대해서 평가해왔던 기본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32.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시종일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비한 호흡과 현실적 존재가 섞여 있어서 나는 그의 진정한 사인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마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할아버지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아침.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나서 바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겁과 쥐새끼 같은 생활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소설의 형태가 삶을 갈구하는 것에서 죽음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변했으나 그것을 그려내는 그의 개성있는 문장은 그대로였다. 이야기의 힘이 센 특유의 문장으로 시점이 흔들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숨은 타고난 해학적 문체로 그들이 겪을 비극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느꼈던 위화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3.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록


위화작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과거의 슬픈 기억을.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일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의 명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손광림의 기억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광림이 살아있는 한 그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46. 산 자가 망자를 땅에 묻고 나면 망자는 영원히 그곳에 누워 있게 되고 산 자는 계속 살아 숨쉰다.


48. 계속 살아갈 자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오직 죽음을 앞둔 자의 눈만이 햇발을 뚫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음으로써 그 공간의 사람들을 불온하게 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테다. 평범한 사람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비극을 수차례 경험한 손광림이 그곳에서 정체되지 않고, 아픔을 딛고, 북경으로 주거지를 옮겨갔다는 점은 단순히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초월한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당신을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미 비극인 것이다.


30. 내가 남문을 멀리 떠난 후부터 남문은 내게 고향으로서의 친근함을 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난 이 생각을 고수했다. 옛일을 회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착함을 잃게 되면서 짐짓 평온을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고, 설령 그것이 감상적인 상황과 함께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31. 기억 속의 저수지는 내게 늘 따뜻함을 전해주는 곳이었으나, 내 앞에 나타난 현실 속의 저수지는 내 과거를 일깨웠다. 수면에 부유하는 더러운 쓰레기들은 저수지가 날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과거의 한 기표로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문에 남아서 나에게 영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45. 시간은 투명한 어둠을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은 감춰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아니다. 논밭, 거리, 강, 집은 모두 사실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 함께하는 동반자들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앞으로 혹은 뒤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225. 나의 기억이 맹렬한 속도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질병과 노쇠함이 그의 과거를 무정하게 갉아먹어 들어갔다. 그는 그 자신이 가장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었고, 나와 마주치면서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무 판자를 만난 것처럼 남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