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야 들어오는 아비의 코트깃엔 피로가 잔뜩 묻어있었다. 부석부석한 얼굴, 눈가에 어제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 웅얼거리는 쉰 목소리, 그리고 산발까지는 아니지만 제멋대로 흩어진 머리칼. 웃옷도 벗지 않고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습관처럼 TV를 켜고, 촛점도 맞추지 않고 화면을 한동안 정물처럼 바라보곤 했다. 잠결에 나는 그가 묻혀온 새벽 찬공기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이불을 끌어덮었다. 서너시간 후엔 일어나야 한다.

아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말을 꺼낼 때면 마치 주파수가 안맞는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듯 주제와는 동떨어진 얘기들을 툭툭 던지곤했다. 그러다가 오늘은 안되겠다 싶으면 퉁명스럽게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가족들이 먼저 말을 걸기는 쉽지 않았다. 변덕이 심하고 날카로운 사람이다. 자상할 때는 봄날같은 반면, 심사가 틀어지면 쨍소리 나게 불을 뿜었다. 섣불리 어정쩡한 주제를 들고 갔다가 본전도 못건지기 십상이니 구태여 그런 봉변을 사서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비는 점점 말을 하고 싶어했고 나는 듣지 않게 됐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거대한 컨텐츠 즉 이야기였다. 세상에 관해 물으면 아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며 아름답고 웃기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머리 셋달린 공룡이나 엉덩이에서 끊임없이 솜사탕을 뽑아대는 난장이는 없었지만, 대신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공수부대 자원입대하겠다는 중고등학교 6년, 공부는 안하고  공부만 죽어라 했던 삼류 일류대학생 시절, 그리고 황당했던 육군 병장, 파란만장한 신문사시절, 안되는 것 없던 삼십대, 되는 것 하나 없던 사십대. 아비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었고 또 만들었다. 그가 남긴 글은 3인칭 관점이 없다. 당신의 입으로 얘기할 뿐이다. 주관이 허락하는 만큼의 객관만 인정했다. 그 둘은 가끔 싸우긴 하지만 대체로 그의 안에서 화락했다.        

작아지면 살기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비는 그렇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그 역시 한때는 제국을 꿈꾸었다. 말이 쓰러질 때까지 거침없이 저 누런 들판을 내달리고 싶었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음날 새벽까지 그는 결코 쉬지 않았다. 크게 더 크게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만 쉬고싶어 하는 운명의 팔목을 잡아끌며 힘겹게 도착한 곳부터 그는 무너져갔다. 그때 아비는 알게 됐다. 운명이 자신의 등을 떠밀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나이 마흔 넷에 아비는 대문을 닫아걸고 운명과 골방에 마주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꺼냐 담판을 짓기로 했던 모양이다. 가끔 문틈으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귀를 대보면 아비는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운명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아비는 나에게 이중적이었다. 당신을 뛰어넘길 바랬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만큼 가혹하게 몰아부쳤다. 당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교육을 내가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현실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따위 교육으로는 자신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비는 말했다. 너보다 두세시간 잠도 덜자고, 너보다 삼십년을 앞서 있으며, 너보다 훨씬 더 혹독한 어머니가 있었던 아이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느냐.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교육을 받는다면 너는 결코 아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이 아비와 범주를 달리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의 길고 긴 프랑스 유학은 시작됐다. 그리고 유학 일년만에 아비는 자신만 남겨놓고 모든 가족들을 나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비는 이중적이었다. 당신을 연민하지 않기를 바랬다. 아비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그 아비를 뛰어넘는 것이다. 아비를 연민하면서 효도는 시작된다. 아비와 큰 아들의 갈등은 연민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아비의 자존심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는 하늘같은 아비가 되고 싶었다. 나의 하늘이기를 그는 늘 소망했다.   

질서가 무너지고 너절한 것을 싫어했지만, 단순하고 화려한 것의 어울림을 좋아했다. 넓기만 하고 디테일이 없는 것을 조롱했다. 당신 몸에 사치한 것은 무관심했지만, 최고급이 주는 미적 쾌감과 내밀한 실용성을 모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했고,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으며, 심심하다는 말을 몰랐다. 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결코 자유를 속박당하진 않았다. 사람들이 항상 곁에 많았다가,  마흔넷을 경계로 사람들이 제 알아서 멀어지더라 했다. 그 후론 사람을 무척 가렸다. 모르는 이는 아비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걸 몹시 힘들어했다. 오랫동안 서로 힘들어 하다가 사람들도 아비도 그만 지쳤다. 찾지 않으니 편하다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람생각 난다며 그리워했다.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장례를 치르겠거든, 정해진 사람 이외에 일체 알리지 말아라. 가는 마당에 정신만 사납다. 신문에 부음 한줄로 알려지고 싶지 않으니 그런 짓도 삼가하라. 마음에도 없는 조사는 깔끔치 않다. 그때도 그런게 있겠냐마는 꽃도, 돈도 받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히고 절대로 받지 말아라. 그런 바보같은 꽃들에 둘러싸이고 싶지 않다.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고, 설사 그렇다해도 그리 보이기 싫다. 정성을 들이겠다면 당신이 좋아했던 취향대로 해놓고, 단 모두가 그것을 즐겨라. 그도저도 사정이 안닿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게 최선이다. 아비는 말했다. 마치 물고기를 방생하듯 그렇게 놓아주면 될 일이라 했다.     

아비는 내게 책을 남겼다. 해마다 1~2백권씩 사들인 책은 서가에 아무 순서없이 꽂혀있다. 배달받은 날짜순으로 하랴, 책 크기나 색깔대로 하랴, 그렇다고 쟝르별로 모아서 내 책보기 내력을 치마들추듯 한눈에 들켜야 좋겠느냐, 책은 꽂혀있는게 편안해보이면 그게 최고라했다. 하루에 두어차례 서가 앞에 버티고 서있다가 무심코 뽑아든 책을 훑어보며, 언제 이놈을 샀지 하며 집 나간 자식 돌아온 듯 즐거워했다. 아비의 책을 들어보면 안다. 반신욕하며 읽은 것들은 겉장이 우글쭈글하다. 책에 밑줄을 치는 법은 좀처럼 없다. 귀퉁이를 접어놓거나 갖가지 색깔의 스티커를 붙여놓는다. 그래야 그 페이지를 다 읽어본다는 것이다. 독서의 원칙이 있다. 산 책들의 평균 삼분의 일은 열심히 읽는다. 또 삼분의 일은 대충 읽거나 가끔 들춰본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안읽는다. 그런 책들은 티가 난다. 즉 손대면 베어질 정도로 깔끔하다. 마음에 안드는 책은 절대로 안읽는다. 그런 책을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아마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요. 나는 아직 사랑에 서툴러서 양 쪽 다 걸어보려하오.

그런 아비도 자기 책을 갖고 싶어 한때 욕심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고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책은 자기가 내겠다고 나서는 물건이 아니다. 남들이 읽어보자 아우성을 쳐야 마지못해 공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남이 읽을 것을 전제로 써서도 안되며, 그것을 의식해서도 안된다. 신문잡지에 내는 글과, 학위논문으로 내는 글과, 내 이름이 박힌 책에 나오는 글이 확연하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잠깐 읽히고 말 책이면 더군다나 조심해야 한다. 일년 지나 읽었을 때 구절마다 송장냄새 나고 넘기는 쪽마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기분이 든다면 그런 망신이 없다. 책한 권 내는게 가문의 영광으로 기억될만큼 불학무식한 집안이 아니므로 출판기념회 따위의 어색하고 한심한 이벤트는 삼가해야 마땅하다. 책 한권 떼었다고 떡 하자 보채는 자식놈은 차라리 떡장수를 시키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큰 물고기>를 읽고 올해의 책으로 일찌감치 주위에 선포했다. 아들 가진 아비들은 한권씩 사볼 일이며, 그 아비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땅히 읽어볼 만하다. 장영희선생의 번역후기는 감동적이되 다른 지면에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후기를 읽고나면 웬지 뒷심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든다. 아비가 존경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쉽지 않을게다. 가끔 그들은 말한다. 이 세상에게서 손가락질 당하고 비굴한 웃음 흘리고 다닐 망정, 단 한사람 아들에게만은 당당한 아비로 남기를 바라는게 바로 남자들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가 평생 돌보지 못한 아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그는 큰 물고기가 되고 싶었을까. 이 책을 아들의 입장에서 한번 읽고, 아비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읽고자 한다. 지금 중학생인 아이가 삼십년 쯤 후에 아비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쓸 얘기를 미리 써놓았다. 이런게 노파심이요, 헛되고 염치없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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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시절 문학을 얘기하던 친구들로부터 였다. 기자라면 정권의 꼬붕으로 도매금에 넘기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김훈을 말하면서 그가 한국일보기자라는 것까지 얘기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자가 돼야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기자로 십수년을 보냈던 것은 전적으로 유관영씨가 전자신문에 육군병장으로 곧 제대할 영문학과 졸업생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문학기행의 필자였다. 어깨너머로 읽은 그의 기행문은 미려했다. 학부시절 수업시간을 빼먹고 나는 과사무실에서 소설책을 읽으며 교실에 들어간 친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읽었던 소설과 그것을 쓴 사람들을, 내가 한번도 가본적 없는 땅과 묶어서 그는 신문 한면에 털어 썼다. 스마트하게 잘생긴 얼굴과 벌써 약간 희끗하던 앞머리, 그리고 그의 날카로운 문체를 나는 좋아했다. 

신문사를 떠돌면서 가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일보에도 일년 있었지만 그때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있던가 그랬다. 성격이 부딪힌다고 했다. 신경질이 심하다고도 했다. 얼마 못갈 거라고 다들 그랬다. 이례적으로 나는 한마디도 코멘트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그게 맞아라고 단정해 말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웬지 그래야 맞는 것 같았다. 섣부름이여, 경박함이여, 글쓰는 자에 대한 치졸한 단정이여.

얼마전부터 웬만한 그의 책은 줄거리도 챙기지 않고 사들였다. <자전거..><아들아...><밥벌이의...> 등의 잡문 모음은 공연히 샀다 싶었지만 <칼의 노래>는 좋았다. 앞의 책들은 여유롭지 못하고 뭔가 공연히 날이 서있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자가 항상 날카로우면 글읽는 자들이 힘들어 한다. 글쓰는 자라면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남다르기를 기대하지만, 과유불급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사람들을 내내 피곤하게 만들어선 못쓴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모순투성이요, 어디다 하소연할데도 없고, 누구라 예외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세상에 몰려가며 살고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제멋에 지친 억지가 , <아들아...>는 어울리지 않는 비분강개(그렇게 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하면 그뿐인  것을), <밥벌이...>는 다 아는 짜증이 담겨있다. 두번 들쳐보지 않았다.

<칼의 노래>를 다행히 먼저 샀기에 다른 책들도 사게 되었고, 오늘 <현의 노래>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인간은 복잡하다. 별것도 아닌 두뇌는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고 사고를 유발시킨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주변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각각의 삶은 서로 비슷하지도 않다. 머리수만큼 다양하다. 한 인간이 있다. 삼척동자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훌륭한지, 어떻게 죽었고, 무슨 말을 유언으로 남겼는지 다 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아는 걸까, 과연 정확하게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한 인간을 농축시켜 하나의 오브제로 만든다면? 김훈은 인간을 바짝 말려 미이라로 만드는 실험을 한다. 어디 너의 마지막 남은 게 무엇인가 보자. 누군가는 아홉켤레 구두로 남더라고 했지만, 김훈은 교활하게 이순신이란 최고의 유명인을 골라 <그 사람은 무엇으로 남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메마른 조소를 던진다. 곧이어 그는 이순신의 이름 대신 너를 집어넣고, 나를 집어넣어보자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황산벌> 계백의 처가 남긴 유명한 대사.<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뒈지는 거다> 이순신도 이름때문에 죽었다. 그도 한때는 살고 싶었을 게다. 전쟁도 버리고, 승리도 패배도 다 던져버리고 송장썩는 산골에라도 숨어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은 가장 먼저 이순신으로부터 삶에의 집착을 송두리째 걷어냈다. 매일 베어 죽이고, 물에 넣어 죽여야 하는 장수에게 자기 삶의 집착이란 가당치 않다. 그래서 그는 자기 수발을 들던 젓국내나는 여인이나, 도망친 병졸이나, 잡힌 포로나 똑같이 <오늘 베었다>라는 단어만 일기에 적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베고 나면 똑같은 것. 울고 짜고 고민하고 용서하는 것이 오히려 헛될 뿐이다.

<칼의 노래>에는 칼, 즉 무(武)로만 남은 이순신의 미이라가 있었다. '무'란 곧 죽음의 미학이요, 또 그것은 삶에 대한 추접한 집착을 잘라내는 단(斷)이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생계와 사계를 구분짓는 철학이다. 문처럼 갈래많고 복잡하지 않다. 그 단어 하나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없는, 아주 희귀한 말이다. 이순신은 그렇게 생을 건너뛰어 무로 남았기에 오늘까지 명료하게 기억되고 있다. 숱한 일화와 미담은 그 후에 무지렁이 백성들과, 족제비같은 관변학자들이 붙인 허접스레기일 뿐이다.

<현의 노래>는 악(樂)으로 남은 우륵의 미이라 만들기다. 임진왜란은 재미없었는데 가야는 재미있다. 이순신의 캐릭터를 맡은 이사부의 연기도 괜찮았다. 김훈은 그런 캐릭터가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순신보다 이사부가 훨씬 잘 마른 미이라다. 악이 무보다 약할 리 없건만, 글로 써놓으니 한없이 유약하고 옹졸하다. 우륵이 칼 든자와 댓거리할 때 정말 내질러야 할 이야기는 속옹알이로 처리된다. 무인들은 악사를 베어봐야 득이 없다 하며 그를 살려둔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힘이 없다. 소리는 살아있을 때 뿐. 몸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자연에 있는 것도 아닌. 그저 몸을 빌리고, 자연의 바람에 비벼 내는 것. 그자체로 공허하다. 이래놓으니 힘있을 턱이 없다. 애당초 김훈은 악을 이야기하되 악의 힘과 역할을 강조하는 일은 부질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악을 다른 매체로 표현하기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김훈의 필력으로도 역부족이다.  

<현의 노래>에서도 여전히 생과 사의 긴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여전히 무감각하게 처리된다. 순장 전날 밤 도망친 지밀시녀 아라는 태자가 묻히던 날 등떠밀림으로 따라 묻히고, 그 뒤에서 남편 니문은 금을 뜯는다. 첫날밤의 관능에대한 기억도, 잦은 오줌줄기같은 세찬 삶의 집착도,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살아난 자는 그렇게 죽을 뿐이다. 밀통하던 적장에게 목숨을 구하던 야장 여로와 그의 아들 여적도 <병장기는 손에 쥐는 자의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이사부에게 베임을 당했다. 왕도 죽고, 태자도 죽고, 그의 못난 아들도 멸(滅)했다. 같은 시간에 일만 이천오백의 포로뒤에 일만 이천오백의 병졸이 서서 군령 하나에 일만이천오백이 사의 경계로 들어갔다. 그들의 송장무더기 밑에는 병장기가 깊이 묻혀졌다. 마치 왕의 시신이 덩어리쇠위에 놓여지듯이. 쇠는 곧 힘이요, 욕망이며, 무기(武)와 연장이었다. 평생을 마음에 품고, 손에 들며 좇았던 그 물건위에 인간들의 시체가 놓여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설정이다.    

김훈은 <인간이 무엇으로 남는다>라는 것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듯하다. 뺄 것 빼고, 날릴 것은 날리고, 말릴 것은 모두 말려 이게 남았는데, 도대체 이것때문에 산다는 것인가. 이런 투로 말한다.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죽이고 또 죽여, 이젠 죽고 죽인다는 게 더이상 사건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니까 그 나머지도 비슬비슬 힘을 잃는다. 소리도 안남고, 칼도 더이상 날이 서있지 않다. <멸>이다. 생과 사가 아니라 별빛처럼 명하다 멸할 뿐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김훈이나 나나 명멸하는 것은 알바 아니다. 그저 터럭 한끝도 안되는 지금의 시간이 소중할 뿐이다. 아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의 차이는 이와같다. 고덕과 법사들이 떼를 지어 칼을 두드리고 목탁을 치며 지행일치를 목젖앞에 들이댄다 해도 나는 구분해서 따로 갈 생각이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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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각 정보들은 필요없을 땐 파리처럼 눈앞에서 웽웽거리다가 약에 쓸라치면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JS밀이던가, 헤딩이던가 골똘히 생각했던 인물이 찾고보니 토마스 카알라일이었다. 덕분에 밀과 헤딩에 대한 정보도 훑어보게 되긴 했지만, 시간없을 땐 그런 여유작작한 지적 소요가 즐겁지 만은 않다.

실패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몇줄로 줄여놓으면 그저 호사가들의 입담 정도로 다가올 뿐이다. 햐 그 양반 고생 좀 했겠는걸. 나같으면 훽 돌아버렸을텐데. 스물여섯번 떨어졌다구. 인간승리이전에 저 사람은 바보임에 분명해. 등등. 아마 여기 소개된  (한때)불운했던 사람들의 모진 경험을 십분의 일만 겪게 된다면 그런 웃음섞인 코멘트들은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웬만한 지인의 죽음은 한시간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은 의식이 존재할 때까지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이들의 인생을 깊이 파볼 생각이다. 그 현대판 시지프스들의 기약없는 도전은 고시 13수생처럼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위인전에서 칭송해마지 않는 백절불굴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 그들에게도 시간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을 테고, 그런 만큼 인생은 소중했을 것이며, 버려진 시간들은 아까왔을 것이고, 좌절할 때마다 참혹한 유혹이 있었을게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눈도 깊어져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더 분명한 것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육안은 침침하고 시어져 눈물과 눈꼽으로 퇴화될 지언정, 심안은 더욱 형형하고 순해야 한다. 서서히 사람을 대할 때 육안을 감고, 심안을 뜨게 된다.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살피던 눈은 간추린 정보를 심안에게 넘겨주고 피곤한 꺼풀을 닫는다. 심안은 그 정보를 분석해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전까지 좋은 감정을 잃지 않되 믿거나 맡기지 않는다. 때론 심안조차 감아버린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알만큼 알았으되 더 보이지 않으면 내 눈은 무리하지 않는다.

비단 눈뿐인가.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귀도 그리해야 한다. 늙어가면 감각기관은 점차 퇴화하고 그 기관들이 평생 고생하며 남겨준 데이터와 정보를 통해 다른 인지기관이 승하고 밝아진다. 그 마저도 쇠하면 죽는 것이다.

뜬금없는 글조각들을 모아놓고 발문도 없이 붙일 수 없어 한마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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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교정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 이그나티우스 피아자는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몬테레이 만 지역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싶었다. 피아자는 그 지역의 척추 교정 의사들로부터 그곳에는 이미 척추 교정사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병원을 하나 더 먹여 살릴 만큼 환자가 많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피아자는 날마다 열 시간씩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이 마을에 온 새로운 척추 교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1만 2천5백가구의 문을 두드리고 6천 5백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들에게 자신이 곧 문을 열게 될 치료 시설을 방문해 달라고 일일이 부탁했다. 그러한 끈기와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치료 시설이 문을 연 첫 달 그는 233명의 새로운 환자를 받았고,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7만 2천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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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코카콜라 사는 400캔의 콜라밖에 팔지 못했다.

농구계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농구 팀에서 제명되었다.

셰일라 훌즈워스는 열 살밖에 안 됐을 때 시력을 잃었다. 치아 교정기의 덮개가 부러져 튀어나오면서 두 눈을 깊게 찌른 것이다. 시력을 잃었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고,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 우먼이 되었다. 그녀가 해낸 일 중에는 1981년 얼음으로 뒤덮인 레니어 산 정상을 등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10종 경기 우승자 레이퍼 존슨은 내반족을 갖고 태어났다.(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병)

세우스 박사가 쓴 첫번째 아동 서적 <나는 멜베리 거리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27개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그리고 28번째 출판사 밴가드 프레스는 그 책을 600만 권 이상이나 팔았다.

리처드 바크는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해 제트기 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공군 조종사가 된 지 20개월만에 그는 그 일도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는데 그 잡지사는 얼마 안 가 부도가 났다. 삶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갈매기의 꿈>을 쓸 때도 그는 결말을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 원고는 그가 결말을 생각해 낼 때까지 무려 8년의 세월을 잠들어 있었다. 막상 원고가 완성되고도 18개의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러나 일단 책이 출판되자 그 책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7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으며, 리처드 바크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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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썼을 때, 이 책은 헬스 커뮤니케이션 사가 출판에 동의하기 전까지 33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뉴욕의 모든 중요한 출판사들은 이렇게 말했다.“이 책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들만 가득하군요. 이렇게 짧고 간단한 이야기들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 이후로 우리가 낸 이 <101가지 이야기> 시리즈는 20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이나 읽혔다.

1935년에 <뉴욕 헬러드 트리뷴>지는 조지 거슈윈의 대표곡 <포기와 베스>에 대한 비평기사에서 그것을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평가했다.

1902년에 월간 <애틀랜틱>의 시 담당 편집자는 다음의 메모와 함께 스물여덟 살 청년 시인의 시들을 돌려보냈다. ‘미안하지만 우리 잡지에는 당신의 박력 넘치는 시를 실어 줄 지면이 없습니다.’ 그 시인은 바로 로버트 프로스트였다.

1889년 루디야드 키플링은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너>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거절 편지를 받았다. ‘미안합니다. 키플링 씨. 하지만 당신은 영어를 구사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키플링: 정글북’의 작가인 영국의 시인 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는 신인 작가로 4년을 보내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출판 거절 편지를 받았다. 결국 알레스는 자신이 쓰고 있는 <뿌리>라는 작품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작품에 9년을 매달렸지만 결국 능력이 없다고 느낀 헤일리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화물선에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화물선 후미에 서서 배가 지나간 자국을 바라보며 바다에 뛰어내리려는 순간, 그의 선조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모두가 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가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넌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를 굳게 믿고 있다!”
그로부터 몇 주 동안 <뿌리>의 마지막 원고가 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존 번연은 자신의 종교적 관점 때문에 베드포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감옥에서 그는 대표작 <천로역정>을 썼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탐험가인 월터 랄리 경은 13년 동안 투옥되어 있으면서 <세계사>를 썼다. 그리고 독일의 종교 개혁자이자 마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혀 있는 동안 성경을 번역했다.

토머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의 원고를 한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집 하인이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 칼라일은 포기하지 않고 펜을 들고 그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62년에 네 명의 여성이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공연을 하고, 작은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음반을 만들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나중에 그들은 또 한 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역시 전혀 팔리지 않았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그리고 아홉번째 음반까지 모조리 실패였다. 1964년 초, 그들은 유명한 딕 클락 쇼에 출연했다. 방송국은 그들이 쓴 비용 정도의 출연료만 주었으며, 이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얼굴을 드러냈지만 어떤 굉장한 계약도 맺을 수 없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우리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순식간에 여러 차트에서 1위로 뛰어올랐다. 그 이후 다이애나 로스와 슈프림스는 미국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 탁월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잠깐의 후퇴를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메리 케이)

윈스턴 처칠은 유명한 옥스포도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고전 문학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휘슬러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화학 과목에서 낙제를 했고, 미국 육군 사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5년에 베른 대학은 어떤 박사 학위 논문을 부적절하고 공상적이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 논문을 쓴 젊은 물리학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물론 실망했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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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에 마침표 찍다가 키를 잘못 눌러 텍스트를 몽땅 날렸다. 이런 황당하고 속상하는 재난이 심심찮게 발생해 사람 떡심풀리게 만든다. 이럴 때 쓰라고 후배들이 아주 간단한 응급처치(Ctl+?)를 가르쳐 주서 용케 다시 살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중요한 원고를 쓸 때 이런 일을 당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 경험상 가장 무난한 처리방법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새로 쓰는 것이다. 가급적 날려먹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한두시간을 더 들이면 아까 날려먹은 글보다 훨씬 괜찮은 것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빽빽하게 써놓은 글을 세번씩 날린 적도 있었다. 이 지경에 이르면 화도 안나고 뭔가 신탁같은 것이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절대로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그런 뜻이든가, 아니면 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뜻이든가, 여하튼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나게 된다.

저명한 사학자 토마스 카알라일이 2년동안 공을 들였던 역저 <프랑스혁명>의 초고를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그집 하녀가 불쏘시개로 쓰는 바람에 다 태워버렸다는 얘길 듣고 잠자코 펜을 들어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글 잘쓰는 영문학자 장영희교수도 장애의 몸으로 미국에서 몇년동안 고생하며 어렵사리 끝마친 박사학위 논문 초고를 가방 째 잃어버려 역시 처음부터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두세시간 쓴 잡문이 날아갔다고 잔뜩 골을 부리는 나는 영락없는 소인배 꼬락서니 아닌가 말이다. 그런 줄 알고 잠자코 부글부글 끓는 심사를 가라앉혀 자꾸 꼬리를 끊고 도망가려는 원고의 낱말들을 서둘러 붙잡는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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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장은 40대 후반의 직장인으로 갱년기에 접어들어 건강이 썩 좋지 않다. 게다가 회사에선 갈수록 부담이 커져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주변의 친구들도 새출발을 권하는데.

"저희 회사는 다시 다운사아징을 하고 있습니다. 다운사이징을 하면 업무영역도 더 넓어지고 할당 목표액도 크게 늘어나는데 걱정입니다. 이제까진 어떻게 버텨왔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활동적으로 잠재고객들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 이일에 더이상 재미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훈련삼아 쓰는 글이니 날려먹은 원문 그대로 살려놓을 이유도 굳이 없다. 몇가지 생각나는 질문과 간단한 대답만 적어본다.

1. 이제까지 잘해오셨는데 갑자기 재미를 잃으신 근본적인 이유는 어떤 것입니까?

-건강에 자신을 잃었다. 이사승진하려면 더 고생해야하는데 그만한 자신도 없고 그렇게해서 꼭 이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2. 그만두시겠다면 언제쯤을 적기로 생각하시나요.

- 가급적 여유있게 결정하고 싶지만 회사여건상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계약직은 보는 눈이 있어서 못하겠고.

3. 먼저 회사를 그만두신 친구분들은 뭐라고 하시는지요?

- 회사 일하면서 장래 구상을 한다는 건 공연한 시간낭비. 발로 뛰면서 눈으로 확인하면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나오려면 한시라도 빨리 나오라고 한다.

 4. 만일 내일 그만두신다면 모레부터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 가족들과 여행도 며칠 갔다오고, 건강진단도 받고, 시간을 내어 규칙적인 운동을 하겠다. 한달후엔 친구들도 연락해서 만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 6개월쯤 탐색기를 거쳐 본격적인 새일은 내년초부터 할 생각이다.

5. 새출발하는데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 아무래도 밑천이 짧아서 시행착오가 허용이 안되는 것이 가장 신경쓰인다. 조심해야한다. 건강도 관리가 필요하고, 경험이 다양하지 못한 것도 걱정이다.

6.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 들으셨습니까.

- 우선 욕심부리지 말라. 처음부터 투자를 크게 하지 말라. 대기업에 있었다는 사실은 빨리 잊어라. 신입사원처럼 겸손하라.

7. 계획과 실천의지가 분명하고 꼼꼼하군요. 타이밍은 언제라도 무방하겠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놓치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새출발을 위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고취하기 위해 리더십이나 코치교육을 받아보시는 것도 여러가지 면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 프로그램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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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의 못된 버릇이 나왔다. 그 녀석은 정말로 나를 화나게 한다. 그는 미팅때마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려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짓밟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리둥절한 사이에 혼자서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 같다. 이제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정도가 되었다. 내가 화를 내면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모든 팀원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당신에게 그가 누구인지 다 말했다. 그를 다른 부서로 보내야할 것 같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야된다고 생각하는가?"

김부장은 기획팀 이진광대리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금 회사는 합병인수때문에 범사적 TFT를 구성해 연일 강행군을 하고 있다. 그런데 기획팀에서 온 이대리는 TFT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교묘한 잔머리를 쓰고 있다. 몇번 주의를 주었지만 이대리는 안중에 없다. 팀에서 빼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했다. 김부장을 코칭했다.

Q. 이대리가 기획팀에서 왔다면 TFT에서 비중이 꽤 높겠군요.

A.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기획팀이 이번 합병인수작업에 주체가 되고 있으니까 TFT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면 다른 팀원들이 일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공연히 들러리만 서는 꼴이 되선 안됩니다.

Q. 김부장에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A. 조만간 이사승진이 있습니다. 부장급으로 이 팀에 참여한 것은 제 능력을 보이라는 윗분들의 배려라고 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하는데 이래갖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웬만하면 나도 참겠는데 이건 제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꼭 해결돼야 합니다.

Q. 이대리를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쉬운가요? 그렇게 하면 훨씬 좋아지는 건가요?

A. 사실 돌려보내기도 골치아픕니다. 일단 기획팀과 TFT의 갈등으로 바깥에 비쳐지면 곤란합니다. 아마 이대리는 분명히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기획팀장인 상무님은 회사의 실세중의 실세인데 잘못 오해할 경우, 제가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진퇴양난이지요.

Q. 현재 TFT의 역할은 어떻게 규정 돼있습니까?

A. 첫째는 합병인수의 타당성에 대한 사내 각부문의 의견수렴 및 종합검토, 둘째, 합병인수 진행시 각 부문과의 시너지효과 창출입니다. 합병인수와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사진에게 정리 보고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Q. 정리해볼까요. 김부장님이 원하시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A. TFT가 맡겨진 임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완료하는 것입니다. 특정부서에 치우친 의견이 아닌 전사적 여론을 있는 그대로 경영진에 전달함으로써 합병인수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특정부서가 목소리를 높인다거나, 이익을 독식하는 것은 절대 용납되선 안됩니다.

Q.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다른 팀원들도 공감하나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A. 다른 부서에서도 기획팀과 이대리의 전횡에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확실한 합의는 없지만 TFT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니 동의할 것입니다.

Q. TFT의 운영조직과 방법에도 변화가 있어야겠군요. 지금은 어떻게 구성돼있나요?

A. 아무래도 정보나 자료가 기획팀에 집중돼있기 때문에 이대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다른 팀원들은 자기 부서 입장을 섣불리 얘기하다간 이대리에게 면박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논의가 안되는 것은 기획팀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지금은 그 역할을 그냥 이대리에게 맡겨놓았는데 앞으로는 필요한 자료는 TFT가 기획팀에 문서로 공식요청을 해야겠군요. 어차피 기안결재는 대표이사까지 올라가게 돼있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아예 명문화해서 요청하고 그 자료를 모든 팀원들이 공유해서 모두 정확한 판단들을 할 수 있도록 하는게 좋겠습니다. TFT장이신 박전무께 당장 건의드려야 겠습니다.

Q. 좋습니다. 그런데 이대리가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A. 그럴지도 모릅니다. 합병인수에 다들 바쁜데 공연히 TFT가 절차에만 신경쓰고 있다고 떠들어댈 것 같습니다. 그러나 TFT를 만든 이유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합병인수의 공감대와 시너지효과를 넓히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면 의견수렴에 필요한 절차와 시간을 허락하게 될 것입니다. 기획부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하면 시간문제는 전혀 없을 것임을 강조하겠습니다.

Q. 계획하신대로 추진하면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염려하고 있는 게 있다면?

A. 아무래도 기획팀과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만하게 처리한답시고 고개를 숙일 수도 없는 일이구요. 이대리같은 친구들이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면 기획팀과 사이가 나빠질 수 밖에 없는데 걱정입니다.

Q. 기획팀과 TFT는 적대적 관계인가요? 즉 TFT가 잘되면 기획팀이 힘을 잃는다고 생각들 하나요?

A.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기획팀이 정책결정 등에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합병인수가 기획팀만의 계획대로 진행됐다가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TFT와는 책임면에서 상조하는 관계입니다. TFT가 기획팀의 도움을 받아 전사적 공감대를 만들어가고,  기획팀은 그 공감대를 저력으로 합병작업의 목표와 추진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Q. 기획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해주고 그들의 존재가치를 전제로 역할분담과 업무흐름도를 만든다면 오히려 기획팀도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논의를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

A. 처음엔 이대리의 방자한 성격때문에 화가 났지만 문제의 본질은 기획팀에 정보가 독점돼있어 TFT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TFT의 중요성과 주어진 역할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기획팀과의 업무분장과 협력시스템을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일단 기획팀과 윈윈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자료수집, 분석처리, 결론 도출, 공감대 확보 및 전파 등), 경영진에 우리 팀이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무엇을 이런 시스템으로 하겠노라고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과정상에나 추후 합병인수 완료후에도 기획팀이 혼자 책임을 져야하는 일은 없을 터이니 그들도 환영할 것입니다.  이대리도 큰소리칠 건덕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Q. 합병인수가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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