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마지막에 마침표 찍다가 키를 잘못 눌러 텍스트를 몽땅 날렸다. 이런 황당하고 속상하는 재난이 심심찮게 발생해 사람 떡심풀리게 만든다. 이럴 때 쓰라고 후배들이 아주 간단한 응급처치(Ctl+?)를 가르쳐 주서 용케 다시 살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중요한 원고를 쓸 때 이런 일을 당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 경험상 가장 무난한 처리방법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새로 쓰는 것이다. 가급적 날려먹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한두시간을 더 들이면 아까 날려먹은 글보다 훨씬 괜찮은 것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빽빽하게 써놓은 글을 세번씩 날린 적도 있었다. 이 지경에 이르면 화도 안나고 뭔가 신탁같은 것이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절대로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그런 뜻이든가, 아니면 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뜻이든가, 여하튼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나게 된다.
저명한 사학자 토마스 카알라일이 2년동안 공을 들였던 역저 <프랑스혁명>의 초고를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그집 하녀가 불쏘시개로 쓰는 바람에 다 태워버렸다는 얘길 듣고 잠자코 펜을 들어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글 잘쓰는 영문학자 장영희교수도 장애의 몸으로 미국에서 몇년동안 고생하며 어렵사리 끝마친 박사학위 논문 초고를 가방 째 잃어버려 역시 처음부터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두세시간 쓴 잡문이 날아갔다고 잔뜩 골을 부리는 나는 영락없는 소인배 꼬락서니 아닌가 말이다. 그런 줄 알고 잠자코 부글부글 끓는 심사를 가라앉혀 자꾸 꼬리를 끊고 도망가려는 원고의 낱말들을 서둘러 붙잡는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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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장은 40대 후반의 직장인으로 갱년기에 접어들어 건강이 썩 좋지 않다. 게다가 회사에선 갈수록 부담이 커져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주변의 친구들도 새출발을 권하는데.
"저희 회사는 다시 다운사아징을 하고 있습니다. 다운사이징을 하면 업무영역도 더 넓어지고 할당 목표액도 크게 늘어나는데 걱정입니다. 이제까진 어떻게 버텨왔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활동적으로 잠재고객들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 이일에 더이상 재미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훈련삼아 쓰는 글이니 날려먹은 원문 그대로 살려놓을 이유도 굳이 없다. 몇가지 생각나는 질문과 간단한 대답만 적어본다.
1. 이제까지 잘해오셨는데 갑자기 재미를 잃으신 근본적인 이유는 어떤 것입니까?
-건강에 자신을 잃었다. 이사승진하려면 더 고생해야하는데 그만한 자신도 없고 그렇게해서 꼭 이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2. 그만두시겠다면 언제쯤을 적기로 생각하시나요.
- 가급적 여유있게 결정하고 싶지만 회사여건상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계약직은 보는 눈이 있어서 못하겠고.
3. 먼저 회사를 그만두신 친구분들은 뭐라고 하시는지요?
- 회사 일하면서 장래 구상을 한다는 건 공연한 시간낭비. 발로 뛰면서 눈으로 확인하면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나오려면 한시라도 빨리 나오라고 한다.
4. 만일 내일 그만두신다면 모레부터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 가족들과 여행도 며칠 갔다오고, 건강진단도 받고, 시간을 내어 규칙적인 운동을 하겠다. 한달후엔 친구들도 연락해서 만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 6개월쯤 탐색기를 거쳐 본격적인 새일은 내년초부터 할 생각이다.
5. 새출발하는데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 아무래도 밑천이 짧아서 시행착오가 허용이 안되는 것이 가장 신경쓰인다. 조심해야한다. 건강도 관리가 필요하고, 경험이 다양하지 못한 것도 걱정이다.
6.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 들으셨습니까.
- 우선 욕심부리지 말라. 처음부터 투자를 크게 하지 말라. 대기업에 있었다는 사실은 빨리 잊어라. 신입사원처럼 겸손하라.
7. 계획과 실천의지가 분명하고 꼼꼼하군요. 타이밍은 언제라도 무방하겠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놓치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새출발을 위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고취하기 위해 리더십이나 코치교육을 받아보시는 것도 여러가지 면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 프로그램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