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야 들어오는 아비의 코트깃엔 피로가 잔뜩 묻어있었다. 부석부석한 얼굴, 눈가에 어제보다 더 깊게 패인 주름, 웅얼거리는 쉰 목소리, 그리고 산발까지는 아니지만 제멋대로 흩어진 머리칼. 웃옷도 벗지 않고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습관처럼 TV를 켜고, 촛점도 맞추지 않고 화면을 한동안 정물처럼 바라보곤 했다. 잠결에 나는 그가 묻혀온 새벽 찬공기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이불을 끌어덮었다. 서너시간 후엔 일어나야 한다.

아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말을 꺼낼 때면 마치 주파수가 안맞는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듯 주제와는 동떨어진 얘기들을 툭툭 던지곤했다. 그러다가 오늘은 안되겠다 싶으면 퉁명스럽게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가족들이 먼저 말을 걸기는 쉽지 않았다. 변덕이 심하고 날카로운 사람이다. 자상할 때는 봄날같은 반면, 심사가 틀어지면 쨍소리 나게 불을 뿜었다. 섣불리 어정쩡한 주제를 들고 갔다가 본전도 못건지기 십상이니 구태여 그런 봉변을 사서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비는 점점 말을 하고 싶어했고 나는 듣지 않게 됐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거대한 컨텐츠 즉 이야기였다. 세상에 관해 물으면 아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며 아름답고 웃기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머리 셋달린 공룡이나 엉덩이에서 끊임없이 솜사탕을 뽑아대는 난장이는 없었지만, 대신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공수부대 자원입대하겠다는 중고등학교 6년, 공부는 안하고  공부만 죽어라 했던 삼류 일류대학생 시절, 그리고 황당했던 육군 병장, 파란만장한 신문사시절, 안되는 것 없던 삼십대, 되는 것 하나 없던 사십대. 아비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었고 또 만들었다. 그가 남긴 글은 3인칭 관점이 없다. 당신의 입으로 얘기할 뿐이다. 주관이 허락하는 만큼의 객관만 인정했다. 그 둘은 가끔 싸우긴 하지만 대체로 그의 안에서 화락했다.        

작아지면 살기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비는 그렇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그 역시 한때는 제국을 꿈꾸었다. 말이 쓰러질 때까지 거침없이 저 누런 들판을 내달리고 싶었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음날 새벽까지 그는 결코 쉬지 않았다. 크게 더 크게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만 쉬고싶어 하는 운명의 팔목을 잡아끌며 힘겹게 도착한 곳부터 그는 무너져갔다. 그때 아비는 알게 됐다. 운명이 자신의 등을 떠밀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나이 마흔 넷에 아비는 대문을 닫아걸고 운명과 골방에 마주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꺼냐 담판을 짓기로 했던 모양이다. 가끔 문틈으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귀를 대보면 아비는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운명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아비는 나에게 이중적이었다. 당신을 뛰어넘길 바랬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만큼 가혹하게 몰아부쳤다. 당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교육을 내가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현실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그따위 교육으로는 자신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비는 말했다. 너보다 두세시간 잠도 덜자고, 너보다 삼십년을 앞서 있으며, 너보다 훨씬 더 혹독한 어머니가 있었던 아이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느냐.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교육을 받는다면 너는 결코 아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이 아비와 범주를 달리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의 길고 긴 프랑스 유학은 시작됐다. 그리고 유학 일년만에 아비는 자신만 남겨놓고 모든 가족들을 나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비는 이중적이었다. 당신을 연민하지 않기를 바랬다. 아비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그 아비를 뛰어넘는 것이다. 아비를 연민하면서 효도는 시작된다. 아비와 큰 아들의 갈등은 연민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아비의 자존심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는 하늘같은 아비가 되고 싶었다. 나의 하늘이기를 그는 늘 소망했다.   

질서가 무너지고 너절한 것을 싫어했지만, 단순하고 화려한 것의 어울림을 좋아했다. 넓기만 하고 디테일이 없는 것을 조롱했다. 당신 몸에 사치한 것은 무관심했지만, 최고급이 주는 미적 쾌감과 내밀한 실용성을 모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했고,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으며, 심심하다는 말을 몰랐다. 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결코 자유를 속박당하진 않았다. 사람들이 항상 곁에 많았다가,  마흔넷을 경계로 사람들이 제 알아서 멀어지더라 했다. 그 후론 사람을 무척 가렸다. 모르는 이는 아비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걸 몹시 힘들어했다. 오랫동안 서로 힘들어 하다가 사람들도 아비도 그만 지쳤다. 찾지 않으니 편하다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사람생각 난다며 그리워했다.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장례를 치르겠거든, 정해진 사람 이외에 일체 알리지 말아라. 가는 마당에 정신만 사납다. 신문에 부음 한줄로 알려지고 싶지 않으니 그런 짓도 삼가하라. 마음에도 없는 조사는 깔끔치 않다. 그때도 그런게 있겠냐마는 꽃도, 돈도 받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히고 절대로 받지 말아라. 그런 바보같은 꽃들에 둘러싸이고 싶지 않다.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고, 설사 그렇다해도 그리 보이기 싫다. 정성을 들이겠다면 당신이 좋아했던 취향대로 해놓고, 단 모두가 그것을 즐겨라. 그도저도 사정이 안닿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게 최선이다. 아비는 말했다. 마치 물고기를 방생하듯 그렇게 놓아주면 될 일이라 했다.     

아비는 내게 책을 남겼다. 해마다 1~2백권씩 사들인 책은 서가에 아무 순서없이 꽂혀있다. 배달받은 날짜순으로 하랴, 책 크기나 색깔대로 하랴, 그렇다고 쟝르별로 모아서 내 책보기 내력을 치마들추듯 한눈에 들켜야 좋겠느냐, 책은 꽂혀있는게 편안해보이면 그게 최고라했다. 하루에 두어차례 서가 앞에 버티고 서있다가 무심코 뽑아든 책을 훑어보며, 언제 이놈을 샀지 하며 집 나간 자식 돌아온 듯 즐거워했다. 아비의 책을 들어보면 안다. 반신욕하며 읽은 것들은 겉장이 우글쭈글하다. 책에 밑줄을 치는 법은 좀처럼 없다. 귀퉁이를 접어놓거나 갖가지 색깔의 스티커를 붙여놓는다. 그래야 그 페이지를 다 읽어본다는 것이다. 독서의 원칙이 있다. 산 책들의 평균 삼분의 일은 열심히 읽는다. 또 삼분의 일은 대충 읽거나 가끔 들춰본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안읽는다. 그런 책들은 티가 난다. 즉 손대면 베어질 정도로 깔끔하다. 마음에 안드는 책은 절대로 안읽는다. 그런 책을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아마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요. 나는 아직 사랑에 서툴러서 양 쪽 다 걸어보려하오.

그런 아비도 자기 책을 갖고 싶어 한때 욕심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고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책은 자기가 내겠다고 나서는 물건이 아니다. 남들이 읽어보자 아우성을 쳐야 마지못해 공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남이 읽을 것을 전제로 써서도 안되며, 그것을 의식해서도 안된다. 신문잡지에 내는 글과, 학위논문으로 내는 글과, 내 이름이 박힌 책에 나오는 글이 확연하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잠깐 읽히고 말 책이면 더군다나 조심해야 한다. 일년 지나 읽었을 때 구절마다 송장냄새 나고 넘기는 쪽마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기분이 든다면 그런 망신이 없다. 책한 권 내는게 가문의 영광으로 기억될만큼 불학무식한 집안이 아니므로 출판기념회 따위의 어색하고 한심한 이벤트는 삼가해야 마땅하다. 책 한권 떼었다고 떡 하자 보채는 자식놈은 차라리 떡장수를 시키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큰 물고기>를 읽고 올해의 책으로 일찌감치 주위에 선포했다. 아들 가진 아비들은 한권씩 사볼 일이며, 그 아비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땅히 읽어볼 만하다. 장영희선생의 번역후기는 감동적이되 다른 지면에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후기를 읽고나면 웬지 뒷심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든다. 아비가 존경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쉽지 않을게다. 가끔 그들은 말한다. 이 세상에게서 손가락질 당하고 비굴한 웃음 흘리고 다닐 망정, 단 한사람 아들에게만은 당당한 아비로 남기를 바라는게 바로 남자들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가 평생 돌보지 못한 아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그는 큰 물고기가 되고 싶었을까. 이 책을 아들의 입장에서 한번 읽고, 아비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읽고자 한다. 지금 중학생인 아이가 삼십년 쯤 후에 아비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쓸 얘기를 미리 써놓았다. 이런게 노파심이요, 헛되고 염치없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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