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조각 정보들은 필요없을 땐 파리처럼 눈앞에서 웽웽거리다가 약에 쓸라치면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JS밀이던가, 헤딩이던가 골똘히 생각했던 인물이 찾고보니 토마스 카알라일이었다. 덕분에 밀과 헤딩에 대한 정보도 훑어보게 되긴 했지만, 시간없을 땐 그런 여유작작한 지적 소요가 즐겁지 만은 않다.

실패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몇줄로 줄여놓으면 그저 호사가들의 입담 정도로 다가올 뿐이다. 햐 그 양반 고생 좀 했겠는걸. 나같으면 훽 돌아버렸을텐데. 스물여섯번 떨어졌다구. 인간승리이전에 저 사람은 바보임에 분명해. 등등. 아마 여기 소개된  (한때)불운했던 사람들의 모진 경험을 십분의 일만 겪게 된다면 그런 웃음섞인 코멘트들은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웬만한 지인의 죽음은 한시간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은 의식이 존재할 때까지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이들의 인생을 깊이 파볼 생각이다. 그 현대판 시지프스들의 기약없는 도전은 고시 13수생처럼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위인전에서 칭송해마지 않는 백절불굴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 그들에게도 시간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을 테고, 그런 만큼 인생은 소중했을 것이며, 버려진 시간들은 아까왔을 것이고, 좌절할 때마다 참혹한 유혹이 있었을게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눈도 깊어져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더 분명한 것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육안은 침침하고 시어져 눈물과 눈꼽으로 퇴화될 지언정, 심안은 더욱 형형하고 순해야 한다. 서서히 사람을 대할 때 육안을 감고, 심안을 뜨게 된다.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살피던 눈은 간추린 정보를 심안에게 넘겨주고 피곤한 꺼풀을 닫는다. 심안은 그 정보를 분석해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전까지 좋은 감정을 잃지 않되 믿거나 맡기지 않는다. 때론 심안조차 감아버린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알만큼 알았으되 더 보이지 않으면 내 눈은 무리하지 않는다.

비단 눈뿐인가.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귀도 그리해야 한다. 늙어가면 감각기관은 점차 퇴화하고 그 기관들이 평생 고생하며 남겨준 데이터와 정보를 통해 다른 인지기관이 승하고 밝아진다. 그 마저도 쇠하면 죽는 것이다.

뜬금없는 글조각들을 모아놓고 발문도 없이 붙일 수 없어 한마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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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교정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 이그나티우스 피아자는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몬테레이 만 지역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싶었다. 피아자는 그 지역의 척추 교정 의사들로부터 그곳에는 이미 척추 교정사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병원을 하나 더 먹여 살릴 만큼 환자가 많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피아자는 날마다 열 시간씩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이 마을에 온 새로운 척추 교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1만 2천5백가구의 문을 두드리고 6천 5백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들에게 자신이 곧 문을 열게 될 치료 시설을 방문해 달라고 일일이 부탁했다. 그러한 끈기와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치료 시설이 문을 연 첫 달 그는 233명의 새로운 환자를 받았고,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7만 2천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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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코카콜라 사는 400캔의 콜라밖에 팔지 못했다.

농구계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농구 팀에서 제명되었다.

셰일라 훌즈워스는 열 살밖에 안 됐을 때 시력을 잃었다. 치아 교정기의 덮개가 부러져 튀어나오면서 두 눈을 깊게 찌른 것이다. 시력을 잃었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고,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 우먼이 되었다. 그녀가 해낸 일 중에는 1981년 얼음으로 뒤덮인 레니어 산 정상을 등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10종 경기 우승자 레이퍼 존슨은 내반족을 갖고 태어났다.(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병)

세우스 박사가 쓴 첫번째 아동 서적 <나는 멜베리 거리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27개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그리고 28번째 출판사 밴가드 프레스는 그 책을 600만 권 이상이나 팔았다.

리처드 바크는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해 제트기 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공군 조종사가 된 지 20개월만에 그는 그 일도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는데 그 잡지사는 얼마 안 가 부도가 났다. 삶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갈매기의 꿈>을 쓸 때도 그는 결말을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 원고는 그가 결말을 생각해 낼 때까지 무려 8년의 세월을 잠들어 있었다. 막상 원고가 완성되고도 18개의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러나 일단 책이 출판되자 그 책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7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으며, 리처드 바크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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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썼을 때, 이 책은 헬스 커뮤니케이션 사가 출판에 동의하기 전까지 33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뉴욕의 모든 중요한 출판사들은 이렇게 말했다.“이 책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들만 가득하군요. 이렇게 짧고 간단한 이야기들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 이후로 우리가 낸 이 <101가지 이야기> 시리즈는 20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이나 읽혔다.

1935년에 <뉴욕 헬러드 트리뷴>지는 조지 거슈윈의 대표곡 <포기와 베스>에 대한 비평기사에서 그것을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평가했다.

1902년에 월간 <애틀랜틱>의 시 담당 편집자는 다음의 메모와 함께 스물여덟 살 청년 시인의 시들을 돌려보냈다. ‘미안하지만 우리 잡지에는 당신의 박력 넘치는 시를 실어 줄 지면이 없습니다.’ 그 시인은 바로 로버트 프로스트였다.

1889년 루디야드 키플링은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너>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거절 편지를 받았다. ‘미안합니다. 키플링 씨. 하지만 당신은 영어를 구사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키플링: 정글북’의 작가인 영국의 시인 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는 신인 작가로 4년을 보내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출판 거절 편지를 받았다. 결국 알레스는 자신이 쓰고 있는 <뿌리>라는 작품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작품에 9년을 매달렸지만 결국 능력이 없다고 느낀 헤일리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화물선에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화물선 후미에 서서 배가 지나간 자국을 바라보며 바다에 뛰어내리려는 순간, 그의 선조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모두가 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가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넌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를 굳게 믿고 있다!”
그로부터 몇 주 동안 <뿌리>의 마지막 원고가 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존 번연은 자신의 종교적 관점 때문에 베드포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감옥에서 그는 대표작 <천로역정>을 썼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탐험가인 월터 랄리 경은 13년 동안 투옥되어 있으면서 <세계사>를 썼다. 그리고 독일의 종교 개혁자이자 마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혀 있는 동안 성경을 번역했다.

토머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의 원고를 한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집 하인이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 칼라일은 포기하지 않고 펜을 들고 그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62년에 네 명의 여성이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공연을 하고, 작은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음반을 만들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나중에 그들은 또 한 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역시 전혀 팔리지 않았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그리고 아홉번째 음반까지 모조리 실패였다. 1964년 초, 그들은 유명한 딕 클락 쇼에 출연했다. 방송국은 그들이 쓴 비용 정도의 출연료만 주었으며, 이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얼굴을 드러냈지만 어떤 굉장한 계약도 맺을 수 없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우리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순식간에 여러 차트에서 1위로 뛰어올랐다. 그 이후 다이애나 로스와 슈프림스는 미국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 탁월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잠깐의 후퇴를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메리 케이)

윈스턴 처칠은 유명한 옥스포도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고전 문학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휘슬러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화학 과목에서 낙제를 했고, 미국 육군 사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5년에 베른 대학은 어떤 박사 학위 논문을 부적절하고 공상적이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 논문을 쓴 젊은 물리학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물론 실망했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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