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친하지 않으면 집안이 흔들린다. 매우 까다롭고 힘든 주문이다. 부자 관계는 여타의 어떠한 인간관계보다 미묘하다. 보통은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갖는게 상식이다. 거꾸로 고마와하지 않는 자를 위해 끝까지 배려하는 사람은 드물다. (예외적인 분들은 대개 성인의 반열에 오르곤 한다.) 그러나 부자관계에선 종종 그렇지 않다. 잘해주되 상대방의 심사를 엽렵하게 헤아려야 하며, 그에 상응한 보답이나 존경을 섣불리 기대하다간 산통깨지기 십상이다. 양쪽 다 천하에 그런 상전이 따로 없다.
처음엔 자식이 원수라고 투덜대지만 삼십년쯤 지나면 그 자식이 아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으로 바뀐다. 받은 게 없다고 대충했다간 패륜아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준 게 없어도 내놓으라고 호통치면 마누라 눈치보며 얼른 받들어야 한다. 키워준 은공을 어렸을 땐 몰랐지만 새끼 키우면서 깨닫게 된다. 물론 웬만해선 효자란 칭찬을 듣기는 쉽지 않다.
이런 얘기는 오늘날에 이르러 대단히 유교적이며, 지극히 도덕적인 가풍에서만 실현 가능한 얘기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집안의 최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공부 잘하고 교양 넘치며, 성격좋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다행히 부모의 지극정성을 알아주는 아이라면 설사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대다수 무심하고 철없는 친구들은 공연히 부모 애간장만 녹이고 결국엔 평범한 장삼이사로 인생을 산다. 그나마 패가망신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고 무사히 한 세대를 넘기는 것 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어야할 세상 아닌가.
때로는 아비가 못나서 아들도 그런게 아니냐는 자책이 들 때도 있다. 누구말마따나 아비는 바담풍 하면서 아들에겐 바람 풍하길 바랜다고, 자신은 비록 개똥밭에 구를 지언정 아들은 고관대작의 자제 못지않게 뼈를 깎고 살을 발라 키웠지만, 그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아비는 뒤돌아서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물론 호랑이 아비에게서 개 아들이 나오겠느냐는 옛말이 있지만 실제로 호랑이 유전자와 제왕의 타이틀을 대물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개가 됐는지를 따져 들어가면 그 아비도 호랑이탈을 쓴 늙은 개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몇년전 김모씨가 IOC위원으로 대단한 위세를 부리며 군림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소개로 그의 장남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름도 잊었고, 무슨 아이템을 들고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얄상하게 생긴 중키의 아들은 불어의 액센트가 밴 영어문장을 섞어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를 한참 설명했다. 결론은 국내 체육계를 좌지우지하는 아비의 힘을 빌어 사업권을 따내볼테니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아들은 아비의 명예를 빌어 온갖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아들의 취직 자리를 청탁했고, 그 아들은 거기서 사고를 쳐서 아비 얼굴의 먹칠을 했다. 그리고 유럽으로 도망가서 사기사건에 연루돼 스캔들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런저런 추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은 대뜸 그 아들을 이용해먹을 생각부터 했다. 그의 열렬한 사업설명은 한귀로 흘려버리고, 머릿속은 오로지 그 아비가 이 철부지에게 무엇을 얼마나 밀어줄 수 있을까 나중에 어떻게 떨어낼 것인가 하는 추잡한 계산만 했다. 그 아비는 자식에게 제때 베풀지 못했던 부성애를 뒤늦게, 분별없이 발휘했다. 세상 인심이 야차와 같을진대, 그 부자가 얼마 안 있어 전세계적으로 망신살이 뻗치고 결국엔 평생을 쌓아올렸던 그 빛나는 명예마저 진창에 처박게 된 결말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얘를 들면 한도 없다. 이승만의 양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존속살해후 자살했으며, 박정희의 외아들 지만도 나이 오십줄에 여전히 폐인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 전두환의 아들 셋이 아비의 더러운 돈을 관리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의 아들 얘기는 구태여 꺼낼 가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위대한 아비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게 그 자식의 입장에선 더 큰 부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아비가 너무 잘난 바람에 아들이 묻혀버리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따라서 자식이 잘되려면 아비는 너무 잘나지도, 그렇다고 너무 못나지도 않아야 한다는 건가.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때문에 울었다>라는 책에는 케네디, 에디슨, 간디, 헤밍웨이, 처칠, 록펠러, 조지 5세 등 최고의 위인들과 그들의 열성인자만 모은 못난 아들의 얘기가 담겨있다. 다 읽고 나니 제목이 잘못된 것 같다. 대부분의 위인들께선 자식 때문에 울진 않았다. 그 정도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면 울 필요도 없었을게다. 케네디 형제들의 아버지 죠지프는 자신의 정치욕을 대리 성취할 자식이 필요했고 믿었던 세아들이 비명횡사하자 가장 얼뜨기 막내 에드워드에게 기대를 걸었다. 애당초 그릇이 아닌데 담을려고 했으니 넘칠 수 밖에. 에디슨 역시 첫부인에게 낳은 아들 둘은 아비의 발명가기질도 없고 사업가의 수완도 없이 평생 아비의 도움으로 살아갔던 무능한 도령들이었다. 자신이 초등학교를 일년도 못다녔던 에디슨은 많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헤밍웨이와 폴고갱은 자식 낳아놓고 돌아보지도 않은 망나니 아비였으니 후손이 잘됐으면 외려 이상하다. 처칠도 아들을 그릇에 맞게 키웠으면 잘나가는 정치칼럼니스트로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단한 아버지 밑에서 착실한 아들로 만족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허풍만 떨고 산 아들에게 무작정 비난을 퍼부을 수 없는 이유다. 마하트마 간디는 상식으로 알고 있던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의 아버지였다. 대단히 완고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이다. 그의 아들들은 가문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지 않고선 정상적인 나이에 자기가 원하는 신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잘못을 하면 혹독한 노동과 장기간의 힘든 일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에 반발한 장남은 아버지 간디의 노여움을 평생 벗지 못했고 , 쓸쓸히 죽어가야 했다. 자식들에게 엄한 도덕률을 강요했던 간디 역시 좋은 아버지로 남기는 어려울 듯 하다.
가족은 일종의 성채이기 때문에 바깥 사람이 엿본 대강의 가족사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가 위대하고 아니고는 자식의 성공에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식이 그만한 그릇이 되면 다행이겠으나 그 아버지 밑에서 방치될 경우, 오히려 그릇이 형편없이 작아지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들의 편에서 아버지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아들은 늘 외롭다. 자신의 모든 문제는 열성 유전자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늘 군림할 뿐이며 아주 가끔 하늘에서 강림할 따름이다. 아들의 기도를 들을 짬이 없는 아버지들이었다.
이 책의 결론은 각자가 내리는게 좋다. 나의 주장은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만이 왕도다. 스스로 공부하게 만들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서 패배의 아픔과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간직하게 해야 한다. 어떠한 물적 풍요도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야한다. 어릴 때 호의호식에 물들면 온 재산은 먹고 입는 것으로 절딴 날 것이다. 부정한 것을 아비의 힘이나 희생으로 가능케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단숨에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산이 있다면 아들이 인생을 포기하거니 망치지 않게 할 정도의 비상약으로 그치는게 옳다. 철없는 아들에게 부모가 남긴 재산은 마지막 독배가 될 것이다. 아들은 그 재산이 있다는 것 때문에 무모한 짓을 하고 실패해도 반성할 줄 모르며, 급기야는 단숨에 독배를 들이키고 부모를 원망하며 집안의 문을 닫는다.
아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다면 아들의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책을 읽게 하려면 먼저 책을 읽고, 예의를 가르치려면 예절바르게 행동하라. 아이가 멋진 글을 쓰게 만들려면 아이에게 정성들여 편지를 쓰고, 아이를 리더로 만들고 싶으면 아이를 진심으로 존경해라. 개천에서 용이 잘 안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생 책 한권 안읽고 무례한 모습만 보이며, 글쓰기를 가장 두려워하고 아이들을 무시하기 일쑤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만은 잘나기를 바란다면 그건 허황된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므로, TV부터 끄는 게 순서다.
세상은 공평하다. 잘난 집만 계속 잘나가면 무슨 재미인가. 부자가 삼대는 고사하고 당대를 못넘기니까 그나마 기대를 걸어보지 않나. 강남 사는 아이들이 좋은 대학은 다 간다고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모여 고시공부나 하고있는 대학을 굳이 보낼 이유가 없다. 차라리 심지굳은 아이로 키워 나라밖으로 내보내는 편이 상책이다. 콩 심은데 콩 나기 때문에 묵정밭 좋다고 공연히 자랑말고 씨앗 하나라도 제대로 보고 뿌려야 한다. 이래저래 무자식이 상팔자인 것은 고금의 일치된 정설이다.